어떤 한 늙은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집을 그리는데 우리가 그리는 순서와는 너무 달랐습니다.
이 목수는 먼저 주춧돌을 그렸습니다.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도리와 들보 서까래를 올리고 맨 마지막에 지붕을 완성했습니다. 우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목수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와 일치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건물은 기초나 주춧돌부터 올라가지 지붕부터 올라가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멀리서 보거나 머리 속으로만 집을 그리는 사람과 실제 집을 지어본 사람의 그림의 순서는 전혀 달랐습니다. [출처:신영복의 "나무야 나무야"중에서]
완성된 것을 보는 것 하고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집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완공된 집은 아름답지만 건축과정 중에 있는 집은 더럽고, 어수선합니다. 이 건물이 언제 세워질까 제대로 세워질까 조바심도 나기도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과정보다는 완성품만 보려 한다는 점입니다. 아름다운 완성품만 보면 그 과정 중에 있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합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그렇습니다. 건물이나 물건과 달리 인간에게는 완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바라볼 때는 점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선으로 보아야 합니다. 지금 현재의 완성된 모습보다는 과거보다 얼마만큼 나아졌는지 선으로 보아야 합니다.
과거보다 나아졌다면 발전이고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나 현재나 그대로라면 비록 그 수준이 높다하더라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과정 중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이 완성품만 찾았다면 그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병든 사람, 죄인,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주님은 미래라는 관점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지금은 비록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머릿속에는 우리를 향한 위대한 조감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건축물의 위대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땅만 파놓은 듯 볼품없지만 그 건물이 완성되는 날 아주 멋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모습 때문에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에서는 성도를 서로 축복하는 시간이 있다. 예배가 시작되면 인사를 나누고 서로에게 "잘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그저 하라니까 하는 정도로 "잘되고 있습니다"를 예배 때마다 반복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문제로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잘되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떠올랐고 힘을 얻게 되었다. '잘되고 있습니다'는 현재진행형이다. 사실 우리는 결과로 '잘되었습니다'라고 말하길 원한다. '사업도 잘되었습니다' ' 자녀도 잘되었습니다' …
그러나 그런 기대가 어긋나면 '잘못되었다'를 결과로 받아들인다. '내 삶은 잘못되었다"는 회의에 빠지게 된다.
어려움 속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삶에 지칠 때 "언제 잘되는 건데 ?"라고 회의적인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면 그때, 그 이유가 이해되지 않아 괴로웠을 때도 잘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성경 말씀처럼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며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잘되고 있었던' 축복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인간의 생각으로 잘되었다고 하지만 정말 잘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정말 잘못되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삶이란 씨실과 날실처럼 고난과 기쁨이 한올씩 짜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두 다 날실로만 짜일 수 없고 씨실로만 짜일 수 없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 삶은 아직 짜여지고 있는 중이다. 내 삶에 대해 결론적인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
아직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잘되고 있습니다"를 받아드릴 수 있다면 내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낙심하여 주저앉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잘되고 있습니다" "잘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보는 건 어떨까? 정말 당신은 잘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