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 (Zinzendorf. 1700-1760)는 젊은 날 그의 영혼이 방황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화랑에 갔다가 이탈리아 무명 화가 도미니코 페티의 그림, "이 사람을 보라"(에케 호모)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었고 그 십자가는 이렇게 그의 양심에 물어 왔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 십자가를 졌다 너는 내게 무엇을 하였느냐?" 진젠도르프의 가슴은 뜨거워졌고 감동의 눈물이 그의 볼을 적셨습니다. "저는 주님을 위해 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십자가만 따르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로 다짐하며 평생 주님의 십자가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진젠도르프는 정부의 공직을 버리고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의 피난처가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털어 독일과 체코와 폴란드 국경에 인접한 헤른후트에 공동체를 만들어 18세기 신앙의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보호하였습니다. 루터 이전의 개신교도 모라비안 교도들과 형제단을 만들어 경건생활에 힘썼습니다. 전 세계에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모라비안 운동이 할레대학과 함께 근대 선교의 불을 일으켰고 1832년 7월,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귀츨라프(1803∼1851)를 우리나라 서해안으로 보내게 됩니다. 고아원의 아버지 조지 뮐러를 회심시켜 영국으로 보냅니다.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돌아온 후 영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1738년 5월, 런던 모라비안 교도 집회에서 웨슬리의 영혼이 거듭나게 됩니다. 감리교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 볼 때 자신이 회복되고, 삶이 정돈되고,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를 분별해지게 되고, 그래서 자신을 넘어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놀라운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있어나게 된 것입니다.
비가 주룩주룩 오고 있었다. 창문가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 창문을 열어 보니 우리 집 처마 밑에 한 형편없는 거지가 보따리를 옆에 끼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너무 불쌍하고 딱해 보여서 대문을 열고 그 사람한테 다가갔다. “춥고 배고프시죠? 들어오셔서 몸을 녹이고 식사하세요.” 그분을 집에 들이고 식사를 차려 드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 순간 형편없던 거지가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반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피곤하고 지치고 병이 든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입장이 180도 바뀐 것이다. 끔찍한 냄새가 나고 지저분한 누더기 옷을 입고 지친 나를 주님이 다가와서 안아 주셨다. 그것은 주님의 임재였다. 주님의 눈을 보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주님을 애처롭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주님을 뵙고 보니,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신 것이었다. 모든 수치와 비난과 모멸도 잊으신 채 주님은 내가 내쫓은 문밖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때 주님은 보따리를 푸셨다. 그 안에는 이런 말씀이 적혀 있었다. “내가 너를 십자가만큼 사랑한다.” 그리고 주님은 물으셨다. “너 목사되지 않을래?” 40년 전의 환상이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라.
그날 나는 눈물범범이 된 채 이런 일기를 썼다. ‘나를 사랑하시다 못해, 기다리시다 못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주님이 이제 내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지금 이때가 아니면 내가 언제 순종할까?’ 그날 밤 나의 일생를 주님께 헌신했다. 질병은 나의 목회1번지이다. 오늘 내가 나된 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은혜다. 출처 하용조 목사가 쓴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꾼다> 중에서
‘스탠버그의 십자가’라고 하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화가 스탠버그는 성 베드로 성당 신부의 요청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얼마 동안 그리다가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그림 값을 너무 적게 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 값을 다시 흥정할 생각으로 그리기를 중단하고 한 쪽으로 제쳐 놓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페피타’라고 하는 집시를 모델로 한 세속적인 그림이었습니다. 아마도 천박한 나체화 같은 그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모델인 페피타가 초안만 작성한 채 그냥 내팽개쳐 버린 십자가의 그림을 보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건 무슨 그림입니까?” “예수님에 관한 그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무슨 사연이지요?”하고 집시여인이 물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질문이 귀찮았지만 간단하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베들레헴에서 태어셨으며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지은 죄를 용서해주고 사망에서 건지기 위함이죠,
수많은 병든 자를 고쳐주셨고 특히 거리의 죄 많은 여인들도 용서해 주셨고 착한 일을 했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여인은 눈물을 왈칵 쏟으며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스탠버그는 여인을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울지 마세요. 예수님은 죽고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답니다.
그러니까 울음을 그치세요.” 그러자 집시여인은 눈을 번쩍 뜨면서 “정말 부활하셨습니까?”하고는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이걸 보면서 스탠버그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백성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저렇게 밝은 생명력을 얻고 있지 않는가! 나는 정말 예수의 부활을 믿고 있는가?”라고 스스로 자문자답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면서 돈이 적다 불평하며 그리기를 팽개친 것을 회개하고 기쁨으로 그림을 완성하였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유명한 ‘스탠버그의 십자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는 그림으로 기독교회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스탠버그도 페피타도 죽은 오랜 후에 스탠버그의 화랑을 방문했던 어느 귀인이 십자가 그림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모라비안 선교운동의 경건한 지도자 ‘진젠도르프 백작’입니다. 여러분들도 ‘스탠버그의 십자가’의 그림에 큰 감동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편의 강도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므로 죄 용서함 받고 천국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그런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도 나타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11:25~26)
초대교회의 순교자 중에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성 폴리캅(69-155)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체포하러온 병졸들을 정성껏 대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준 뒤 화형대 앞에 섰다고 합니다. 그때 호민관이 지금이라도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나는 86년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고 주님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왕이시요, 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겠는가?" 하고 화형대 위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최고의 죽음은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인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 때,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넘칠 것입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잘14절)
어느 날 한 여행객 부부가 레인지의 무대를 찾아왔다. 당시 무대 위에는 연극에 사용되는 소품인 큰 십자가가 놓여 있었다. 그 부부는 십자가를 진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기 때문에 레인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십자가를 들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십자가를 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는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이다. 여행객은 땀을 닦으며 레인지에게 물었다. “단지 연극일 뿐인데 왜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사용하십니까?”
그는 진지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만일 제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낄 수 없다면 이 역할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의 무게를 공감하고 있는가. 아니면 동감하고 있는가. 때로는 우리에게 닥친 일들이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우리 삶에 진정한 십자가의 의미를 동감할 수 있어야겠다.
아프리카 초원엔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동물들은 저마다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초식동물이 아무리 힘이 없다고 해도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가 하나쯤은 있기 때문에 사자와 표범 같은 맹수에게도 사냥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코뿔소에겐 강력한 뿔이, 코끼리는 큰 덩치로 자신을 보호합니다. 이런 동물들을 사냥하려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도 이 동물들에겐 함부로 덤비지 못합니다. 이런 강력한 무기를 지닌 동물 중엔 기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린은 겉보기엔 약해보이지만 강력한 파워의 뒷발차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맹수라도 이 뒷발차기에 잘못 맞게 되면 한 방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기린끼리 싸울 때는 절대 이 뒷발차기를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록 자신의 영역을 내주고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같은 동족의 생명은 보호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같은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누구보다 강한 힘이 있으셨지만 목숨을 잃을 때까지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으로선 품을 수 없는 사랑과 구원의 의지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오신 예수님이 세상의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완전한 희생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으며 그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미움과 시기대신 사랑과 평안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주님! 주님의 희생을 본받아 더 낮아지고 더 사랑하게 하소서. 남들을 사랑하며 용서하기가 힘들 때마다 주님의 희생을 생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