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천국가신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이창완 전도사님이 18살 때 이제 세례를 받았어요. 우리로 말하면 침례를 받았는데 침례를 받을 때 문답을 하잖아요.
문답을 받을 때 정말 이창완 청년이 기도 많이 하고, 준비하고 나서 세례 문답을 합니다. 그런데 워낙 믿음이 좋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김창인 목사님이 세례 문답할 때, 보통 세례 문답할 때 ‘예수님이 구세주 이심을 믿습니까?’ 이런 문답하잖아요. 다른 거 안 묻고 이렇게 물었답니다. “창완아, 너 성경 몇 번이나 읽었니?” “아이, 목사님. 뭐 부끄럽게 자꾸 그런 걸 물어보세요?” “세례 문답을 하는 질문이니까 대답을 해야 한다. 몇 번 읽었니?”
“부끄럽게 왜 물으세요?” “글쎄, 몇 번 읽었냐니까?” “예, 저 40번 읽었습니다.” “야, 대단하구나. 너 나랑 목사 바꾸자.” 그게 세례문답 다예요. 1948년 12월. 이제 김창인 목사님이 월남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젊으신 목사님이시니까 이창완 전도사가 늘 “형님, 형님” 했는데,
“창완아, 네가 나보다 설교도 잘하고 영성이 깊으니까 내려가서 목회해라.” “아닙니다. 형님, 형님은 결혼해서 가족이 있고 또 미리 월남한 사람들이 다 형님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지 나 이 전도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형님이 가십시오.” 일주일동안 서로 “자네가 가라.” “어휴, 형님 목사님이 가십시오.” 밀고 당기다가 이제 김창인 목사님이 가족을 데리고 월남을 하시고 얼마 있지 않아서 공산당이 들어와서 “김창인 목사 어디 있느냐?”고 붙잡으러 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고 월남한 것을 알았어요. 가족이 싹 월남 한 것을 알고 “이 반동분자, 남쪽으로 도망갔구먼.” 하고 이창완 전도사를 대신 붙잡아서 경찰서로 끌고 갑니다. 경찰서로 끌고 가서 “이 악질분자니까 죽는 것도 고통 가운데 죽여야 된다”고. 그래서 추운 겨울, 북한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콧물 흘리면 콧물이 내리다가 얼어버리는 그렇게 추운 영하 30도가 되는 겨울에 경찰서 마당에 큰 독을 갖다가 놓고 벌거벗겨서 집어넣고 물을 부어서 얼려 죽였어요. 그런데 이 전도사님이 물이 얼어들어 올 때 찬송을 부릅니다. 성도들이 따라와서 같이 통곡하며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우리 이창완 전도사님이 천국 가시는데요.
(찬송가 493장). 1.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점점 물이 얼어 가면서 목소리가 약해집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찬송을 부릅니다. 2. 내가 염려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점점, 점점 소리가 약해지면서 찬송 속에 조용히 천국을 가셨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성도들이 와서 그 독을 가져다가 양지 바른 곳에 가서 독을 깨서 얼음을 깨고 그 전도사님을 묻었습니다. 이것이 그 전도사님이 남긴 예수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분은 비록 그렇게 물에 얼어 순교했지만 그가 남긴 예수 사랑의 흔적이 지금까지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남길 예수 사랑의 흔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내 자랑을 하지 아니하고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닮아가고.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불쌍하고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에게 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다가 주님 앞에 가기 원합니다.
요즘 가장 핫한 연예인으로 이영자씨를 떠올리는데요. 특히"전지적 참견 시점"을 통해서 이영자 먹방으로 전국에 먹방 지도를 그려달라고 할 정도인데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데뷔한지 27년 만에 여자 방송인으로는 최초로 kbs 연애 대상을 차지한 이영자 씨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본명 "이유미"이지만 웃기지 못할 것 같아서 이영자로 바꿀 정도로 사람을 웃기려는 사명으로 살아오다 보니 데뷔 27년 만에 처음으로 여자 방송인으로 KBS 예능 프로그램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볼 빨간 당신’으로 대상을 차지했습니다.
대상을 차지하고 나서 소감을 이렇게 밝혔는데요.
“먼저 끝까지 누가 뭐래도 나를 포기하기 않게 기둥이 돼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개그우먼이 되기까지 개그 콘테스트에 8번이나 도전했지만 떨어졌고 수많은 오디션을 보면서도 꿈을 잃지 않았답니다.
이영자씨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두가 나를 포기할 때 나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묵묵히 하다 보니 꿈의 자리에 와 있더라,
꿈을 포기하지 말라. 나는 이 나이에도 꿈을 꾼다. 꿈을 멈추는 순간 나도 멈춘다"라고 말합니다.
1991년에 MBC의 개그 콘테스트로 연예계에 데뷔하게 됩니다. 그 후로 MBC 오늘은 좋은 날, SBS 기쁜 우리 토요일, KBS 슈퍼 선데이 등에 출연해 "살아살아 내 살들아~", "안 계시면 오라이~" 등의 유행어를 히트시키며 199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 개그맨으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연예계에 발을 들여 돈도 벌고, 큰 인기를 누렸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답니다.
이영자씨의 고백입니다. “어린 나이에 유명세와 돈을 벌었고, 내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인기가 떨어질까 늘 두려웠다. 행복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웃겨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려서 밤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고 미래를 알고 싶어 점집에 가서 점을 치곤했답니다.
이영자씨가 예수 믿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sbs 관현악단을 지냈던 김정택 장로님이 1997년 1년 동안 진행해온 "아이 러브 코미디"라는 녹화를 마친 뒤 송별회식을 위해 가려는데 이영자 씨가 갑자기 이렇게 물어봅니다. "단장님, 숨겨놓은 여자 있죠?" "엥... 뭐라고요?" "제가 1년 내내 지켜봤는데 어떻게 단장님은 항상 싱글벙글하세요?" 그 말을 당황스러웠지만 무슨 말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나야 뭐 할렐루야를 하니까 늘 웃죠 늘 다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잖아요, 영자 씨는 웃을 일 많지 않아요?" 그랬더니 영자 씨가 "저는 그렇지 않아요 밤에 잠을 잘 못 자요."
순발력과 재치를 가지고 인기를 누리는 이영자 씨가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노력을 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항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부모와 형제들의 생활을 거의 책임지고 있던 상황이기에 더욱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갈등과 고민으로 시달리고 있었던 겁니다.
장소를 식당으로 옮기고 나서 일부러 영자 씨 옆으로 가서 내가 웃을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해주게 되었고
그곳에 같이 있던 홍진경 씨와 조연출자, 코디 담당자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몇 주 후에 이영자 씨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다시 몇 주 후에는 아버지, 오빠 올케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답니다.
한참 잘 나가던 이영자씨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는데요. 다이어트 비디오 파동‘을 겪으며 이 사건은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이영자씨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무척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힘들 때마다 낙심하지 않도록 꼭 붙들어 주셨어요.” 집사 직분도 받았다. 아버지, 오빠와 올케 등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했답니다.
이영자씨는 서울 충신교회 연예인 선교회 회원으로 정기적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신앙상담도 주고받는답니다.
서울드림교회에도 출석하고 있다.
충신교회 연예인 회원으로는 개그우먼, 박미선 송은이 김영철과 탤런트 김석훈, 한상진, 가수 황보가 함께 나누고 있답니다.
2017년 대한민국 기독교미술 대전에서 "하늘에서 내려와..."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받으신 장동호교수님을 소개합니다. 전주 교대 미술교육학과 교수이며 대학생 성경 읽기 선교회(UBF) 전주지부 책임간사를 맡으며 전북대와 전주교육대를 중심으로 캠퍼스 선교하기도 한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한쪽에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서 늘 마음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열등감과 트라우마를 갖고 살았습니다.
5살 때 처음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한 번도 한쪽 다리를 잊은 적이 없었고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왜 다리를 하루도 잊을 수 없을까?"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자기 다리만 보는 것 같아가지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고. 그러한 절망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한 번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서 개구리가 우는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신이 계시다면 왜 날 이렇게 불공평하게 만드셨는가! 그런 신은 신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신은 믿지 않을 것이며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술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어머님이 아들이 밥을 굶지 않는 직업을 위해서 재단사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럼 미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하였고
고등학교 선생님을 찾아가서 미술을 시켜달라고 하니 선생님이 감동을 받고 하게 되었답니다.
자기가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절에 가서 백팔 배를 했는데, 아! 절의 보살이 자기한테 이렇게 말해주는 거예요.
“네 다리는 조상들의 업보의 결과이다. 너는 그 저주를 받아서 다리가 불편한 것이다.” 더 큰 상처를 받아버렸어요.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불구가 된 것에 대해서 답을 찾아보려고 철학에 빠져보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봤지만 마음에 상처와 절망만 깊어졌습니다. 밤새 술을 마시며 잠까지 설치다가 보니 결국 폐렴까지 다가와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됩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서 미술을 가르치는 화실을 차리게 됩니다.
늘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던 26살 때에 한 친구가 전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친구가 날마다 오면 하는 말이 "이 죄인"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26년을 살면서 헛된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에 펑펑 울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 위해 사는가? 늘 죽을 생각만 합니다.
막상 죽으려고 하니 어머니가 생각이 나서 죽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친구를 보면서 "왜 저 친구는 하나님을 믿을까?"궁금해서 친구에게 먼저 교회에 가고 싶다고 했답니다.
막상 교회에 버스 타고 가는데 너무 마음이 무거웠고 목사님이 성경공부를 시작하자고 해서 하는데 두 달 만에 수련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누가복음 23:34말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죄인입니다" 우상숭배했던 것에 대한 회개가 나오게 됩니다.
아직까지 본인은 스님이 말한 조상의 저주를 받아서 이렇게 사는 줄로 알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저주 운명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구나" 믿게 되었답니다.
처음으로 자유를 얻게 되었고 하루를 아픈 다리를 잊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끝나고 나오는데 하늘을 보면서 "왜 하늘이 이렇게 아름답지" 비로써 알게 되었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의 피를 너무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쓰러질 정도였고 한 집안에 두 종교를 믿으면 안된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제 장 교수가 결심을 하고 화실에 늘 밥을 해 오시는 어머니께 이제부터는 혼자 알아서 먹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자립하겠다고 선포했답니다.
어머님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시니 "나는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확실하게 믿는다"라고 고백을 하니
어머님이 그럼 이제부터는 "네가 믿는 예수님을 나도 믿겠다"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답니다.
함께 교회를 다니는 친구가 UBF 수양회에 가자고 권해서 마지못해서 따라갔는데 그곳에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맹인에게 인과응보를 주님께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3절에 나옵니다.
"그가 맹인 된 것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구나" 그러면서 장 교수의 열등감이 씻겨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운명, 슬픔, 어두움이 떠나가게 되고 자신의 삶의 모습에 감사하게 됩니다.
죄와 열등감에서 해방되면서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드리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장 교수님의 고백입니다.
" 제 몸이 불편한 것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얻었습니다."
장 교수가 주님의 은혜에 너무 감격하여 통곡하고 울고 나서 “나 이제 주님의 영광 위해 살리라."라는 결심으로 일본에 유학을 갑니다. 13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전주 교대 미술교육학과 교수가 되었고 전주 지역에 있는 많은 대학생들을 말씀을 통해서 교육하고 제자훈련하고 또 전도하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2017년 대한민국 기독교미술 대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하늘에서 내려와’란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수상 소감입니다. “3개월 동안 대여섯 시간을 내리 서서 나무를 파내며 작업하다 보니 손목 발목은 물론 몸 전체가 더 망가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 멈출 수 없었습니다.
모든 인생이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제 모습으로, 또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1968년 TBC 방송국의 공채 6기로 선발되어 반공 드라마 "추격자"를 시작으로 연기 48년의 중견 연기자로써
이후에 "야인시대" "인어 아가씨" "모래성" "간첩 리철진"등 다수의 연기를 선보인 정영숙 권사는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데요.
48년이 다 돼가는 연예계 활동 외에 월드비전 친선대사, 한민족복지재단 홍보대사, 한기총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갱생보호공단 홍보대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정영숙 권사는 평북 선천이 고향이다. 할아버지가 장로였고 어머니는 권사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북한에서 지주고 믿는다는 이유로 숙청을 당해서 가족과 함께 3살 때 남한으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어릴 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성극과 성가대를 하였던 것들이 나중에 연기하는데 도움이 된것이 라고 하는데요. 그런데 중학교 졸업 때 큰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떨어지고 2차로 다시 넣어보니 숭의 여고 야간학교만 있어서 가기 싫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등록금이 없었는데 어머님이 가셔서 이곳은 미션스쿨이니 돈 없어도 받아달라고 학교 교장을 찾아가서 허락을 받기도 했답니다. 감사하게도 기독학교를 통해서 성가와 설교를 들으면서 기쁨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고 그 고난을 통해서 1차로 대학을 붙게 되면서 고난이 유익임을 고백합니다. 시편 119편 71편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래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1968년, 아버지와의 오랜 씨름 끝에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지원하게 된 정영숙 권사님은 이화여자대학교 진학을 원했던 딸의 노력과 간절함은 비싼 등록금으로 무마되고 결국 그녀는 숙명여대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평범했던 그녀에게 뜻밖의 일이 찾아왔는데, 바로 탤런트 모집 오디션이었다.
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하게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 그녀. 만약 이화여대를 택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정영숙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그 당시 이화여대는 연기자 활동을 금했어요. 입학 당시 제 뜻대로 해주지 않은 아버지가 왜 원망스럽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대학 진학뿐 아니라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이뤄진 일이 없더라고요. 제가 무지해서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 일마저도 얼마 전에 깨닫고 이제야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어요."
화려할 것만 같은 연기자 생활은 오히려 그녀에게 신앙 생활을 더욱 깊이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줬다.
대학교 2학년 때 봉사단체에서 섬김을 나누는데 어느 날 인도자가 같이 돌아가면서 기도하자고 하니
창피해서 나가지 않았고 나중에 후회를 합니다.
대학 졸업 때 추천제로 탤런트로 나가게 되었는데요.
그 당시에 특별한 탤런트를 모집해 보자고 하였고
숙대에서 모집하니 친구들의 추천으로 돈을 벌고 싶어서 시험을 보게 되었고
친구들이 화장을 해주어서 임신복 같은 옷을 입고 시험을 보러 갔답니다.
그리고 합격을 합니다.
추격자에 뽑히게 되었고 카메라 앞에 두려워서 우물 우물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직업이 아니지만 도와주세요" 정말 표정이 굳었지만 북한의 역할을 잘했다고 칭찬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계기가 있었답니다.
결혼하여 십일조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 드린 것은 그대로 응답하셨습니다.
결혼할 때에 70만 원 전세에서 시작을 하였지만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잠언 3장 9-10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 말씀처럼 응답하셔서 60평 아파트를 응답 주셨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왔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동료 연예인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됐고,
처음 연예인 교회가 생기고 고은아 집사님이 끌고 가서 같이 성경공부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연예인 교회를 다니지 않았기에 자주 가기가 힘들었고
탤런트 정재순 씨가 전화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여서 좋다고 했는데 그곳이 성경암송하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정재순 씨의 집에서 하는데 그래도 내가 수익이 더 많으니 우리 집에서 성경공부를 해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드디어 집에서 드리게 됩니다.
정영숙 권사님 집은 매주 붐비게 됐다. 성경공부를 위해 모인 동료 연예인들을 식사로 섬겼던 그녀의 섬김이 지금은 나라와 세계를 섬기는 일로 커져 갔다. 성경공부 모임은 98년 '한국TV연기자 기독신우회'를 조직화 하는 기초가 되었고, 기독신우회는 자체적인 예배와 성경공부 모임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웃과 교회를 돌보는 일로 자라갔다.
정 권사는 연기자 신우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연기자 신우회에서는 각종 좋은 일을 많이 한다. 교도소 방문, 군부대 방문도 한다. ‘건너가게 하소서’ ‘퀸 에스더’ ‘영문 밖의 길’ 등 성극(聖劇)에도 자주 참여한다. 연기를 통해 복음을 전한다는 보람과 하나님 앞에 모든 걸 바쳐야 한다는 믿음으로 임하고 있다. 또 나라를 위한 기도모임인 ‘에스더 모임’과 ‘땅 밟기 기도모임’ ‘사랑의 쌀 모임’도 계속하고 있답니다.
정영숙 권사님이 특히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기 시작한 것은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말씀 암송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좁혀가기 시작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강하게 영혼의 울림을 주셨답니다.
정영숙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그때 저의 영혼을 강하게 울렸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는 히브리서 4장 12절이었어요,"
연기자 생활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계속 주셨고
이런 소망을 들어주셔서 월드비전의 친선대사가 되어 소말리아의 선교를 가게 되었고
1997년 국내 최초로 대북지원 사업을 실시한 한민족복지재단의 홍보대사로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사실 정영숙 권사님의 고향이 평북 선천이랍니다.
어릴 때 외 할아버지가 사업을 하셨기에 집안이 넉넉했는데 어느 날 북쪽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아시고
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하셨고 그러다가 전쟁이 나서 이산가족이 되었답니다.
그런 실향민의 아픔을 가진 정 집사님은 북한을 향한 선교에 가슴이 뜨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48년이 다 돼가는 연예계 활동 외에 월드비전 친선대사, 한민족복지재단 홍보대사, 한기총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갱생보호공단 홍보대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