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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천국가신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이창완 전도사님이
18살 때 이제
세례를 받았어요.

우리로 말하면
침례를 받았는데
침례를 받을 때
문답을 하잖아요.

문답을 받을 때
정말 이창완 청년이
기도 많이 하고,
준비하고 나서
세례 문답을 합니다.

그런데 워낙
믿음이 좋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김창인 목사님이
세례 문답할 때,
보통 세례 문답할 때
‘예수님이 구세주
이심을 믿습니까?’
이런 문답하잖아요.

다른 거 안 묻고
이렇게 물었답니다.

“창완아, 너 성경
몇 번이나 읽었니?”

“아이, 목사님.
뭐 부끄럽게 자꾸
그런 걸 물어보세요?”

“세례 문답을
하는 질문이니까
대답을 해야 한다.
몇 번 읽었니?”

“부끄럽게
왜 물으세요?”
“글쎄, 몇 번
읽었냐니까?”

“예, 저 40번
읽었습니다.”

“야, 대단하구나.
너 나랑 목사 바꾸자.”
그게 세례문답 다예요.

1948년 12월.
이제 김창인 목사님이
월남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젊으신 목사님이시니까
이창완 전도사가
늘 “형님, 형님” 했는데,

“창완아,
네가 나보다
설교도 잘하고
영성이 깊으니까
내려가서 목회해라.”

“아닙니다. 형님,
형님은 결혼해서
가족이 있고
또 미리 월남한
사람들이
다 형님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지
나 이 전도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형님이 가십시오.”

일주일동안 서로
“자네가 가라.”
“어휴, 형님
목사님이 가십시오.”

밀고 당기다가
이제 김창인 목사님이
가족을 데리고
월남을 하시고
얼마 있지 않아서
공산당이 들어와서
“김창인 목사
어디 있느냐?”고
붙잡으러 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고
월남한 것을 알았어요.
가족이 싹
월남 한 것을 알고
“이 반동분자,
남쪽으로 도망갔구먼.”

하고
이창완 전도사를
대신 붙잡아서
경찰서로 끌고 갑니다.

경찰서로 끌고 가서
“이 악질분자니까
죽는 것도 고통
가운데 죽여야 된다”고.

그래서
추운 겨울,
북한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콧물 흘리면
콧물이 내리다가
얼어버리는

그렇게 추운 영하
30도가 되는
겨울에 경찰서 마당에
큰 독을 갖다가 놓고
벌거벗겨서 집어넣고
물을 부어서 얼려 죽였어요.

그런데
이 전도사님이
물이 얼어들어
올 때 찬송을 부릅니다.

성도들이 따라와서
같이 통곡하며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우리 이창완 전도사님이
천국 가시는데요. 

(찬송가 493장).
1.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점점 물이 얼어 가면서
목소리가 약해집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찬송을 부릅니다.

2. 내가 염려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점점, 점점
소리가 약해지면서
찬송 속에 조용히
천국을 가셨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성도들이 와서
그 독을 가져다가
양지 바른 곳에 가서
독을 깨서 얼음을 깨고
그 전도사님을 묻었습니다.

이것이
그 전도사님이
남긴 예수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분은 비록
그렇게 물에
얼어 순교했지만
그가 남긴 예수
사랑의 흔적이
지금까지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남길 예수 사랑의
흔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내 자랑을
하지 아니하고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닮아가고.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불쌍하고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에게
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다가
주님 앞에
가기 원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외길 인생 연극배우 박정자씨는
50년 동안 쉬지 않고 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시는데요.

동승 교회에 출석하면서
지금도 무대에 서기 전에는
떨리기에 기도로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1962년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이래 반세기 동안 그는
<따라지의 향연>, <파우스트>,
<위기의 여자>, <신의 아그네스>,
<19 그리고 80>등
 13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1963년 동아방송
성우 1기로 입사했으며
애니메이션 팬들에겐
인어 공주의 문어 마녀
우르 술라로 유명합니다.
 
2013년 현재,
한국 연극인 복지 재단 이사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 나눔 추진단 단장이다.

1950년 아홉 살 때 
부민관이라는 극장에서
연극하는 오빠의
 도시락을 나르며
 처음 무대를 본,
아홉 살 꼬마 박정자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하는데요.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의 조명 받는 것을
좋아하고 혼자 노래를
하곤 했답니다.

피난시절에
 제주도 천막교회에
나가서 무대가 서는 것을
좋아해서 성탄절 날
축하예배 때와 새벽송의
그때가 좋았답니다.

연극 "위기의 여자"할 때에
내가 무엇하고 있는가
고민할 때에
고은정 선배께서
이쯤에서 교회 가자고 합니다.

처음에 온누리교회에
가게 되고 성가대에
가서 찬양을 하면서
행복하셨답니다.

박정자 씨가 무대에서
실수할 때가 있는데
왜냐하면 라이브로
하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러기에 항상
꿈을 꾸면 대사를
잃어버린 꿈을
꾼답니다.

배우는 아플 권리도
슬플 권리도 없다고
하는데요,

실수하는 순간
"오 하나님"
절체절명의 순간에
죽고 싶다고
할 정도이지만
무대에서 실수를 한답니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한답니다.

멀리서 오고
비싼 표를 사서 왔기에
오는 분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 저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답니다.

지금은 암기력이
떨어지기에 더욱
열심히 한답니다.

박정자씨는
"연극의 완성은
관객이 해준다."라는
신념이 있기에
무대에서의 관객과의
시선이 중요하답니다.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작품을
할때에 딸과 엄마가
관객으로 와서
무대에 감동해서
서로 손을 잡고 울 때에
감격을 했다고 합니다.

무대를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때에 있는데요.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야
나 아닌 다른 힘이야."

그럴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구나하고
깨닫게 된답니다.

그래서 박정자씨는
하나님은 무대에서
또 다른 힘을 주는
에너지라고 고백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요즘 가장
핫한 연예인으로
이영자씨를
떠올리는데요.

특히"전지적 참견 시점"을
통해서 이영자 먹방으로
전국에 먹방 지도를
그려달라고 할 정도인데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데뷔한지 27년 만에
여자 방송인으로는
최초로 kbs
연애 대상을 차지한
이영자 씨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본명 "이유미"이지만
웃기지 못할 것 같아서
이영자로 바꿀 정도로
사람을 웃기려는 사명으로
살아오다 보니

데뷔 27년 만에
처음으로 여자 방송인으로
KBS 예능 프로그램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볼 빨간 당신’으로 대상을
차지했습니다.

대상을 차지하고 나서
소감을  이렇게 밝혔는데요.

​ “먼저 끝까지
누가 뭐래도
나를 포기하기 않게
기둥이 돼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개그우먼이 되기까지
개그 콘테스트에
8번이나 도전했지만 
떨어졌고
수많은 오디션을 보면서도
 꿈을 잃지 않았답니다.

이영자씨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두가 나를 포기할 때
나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묵묵히 하다 보니
꿈의 자리에 와 있더라,
 
꿈을 포기하지 말라.
​나는 이 나이에도
 꿈을 꾼다.
​꿈을 멈추는 순간
나도 멈춘다"라고
 말합니다.

1991년에 MBC의
개그 콘테스트로 연예계에
데뷔하게 됩니다.

그 후로
MBC 오늘은 좋은 날,
SBS 기쁜 우리 토요일,
KBS 슈퍼 선데이 등에
출연해
"살아살아 내 살들아~",
"안 계시면 오라이~" 등의
유행어를 히트시키며
199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 개그맨으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연예계에
발을 들여 돈도 벌고,
​큰 인기를 누렸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답니다.

이영자씨의 고백입니다.
 “어린 나이에
유명세와 돈을 벌었고,
​내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인기가
떨어질까 늘 두려웠다.
​행복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웃겨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려서
​밤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고
미래를 알고 싶어
점집에 가서 점을
치곤했답니다.

이영자씨가
예수 믿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sbs 관현악단을
지냈던 김정택 장로님이
1997년 1년 동안 진행해온
"아이 러브 코미디"라는
녹화를 마친 뒤 송별회식을
위해 가려는데

이영자 씨가
 갑자기 이렇게
물어봅니다.

"단장님,
숨겨놓은 여자 있죠?"
"엥... 뭐라고요?"

"제가 1년 내내 지켜봤는데
어떻게 단장님은 항상
싱글벙글하세요?"

그 말을 당황스러웠지만
무슨 말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나야 뭐 할렐루야를
하니까 늘 웃죠
늘 다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잖아요,
영자 씨는
웃을 일 많지 않아요?"

그랬더니 영자 씨가
"저는 그렇지 않아요
밤에 잠을 잘 못 자요."

순발력과 재치를
가지고 인기를 누리는
이영자 씨가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노력을 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항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부모와 형제들의 생활을
거의 책임지고 있던 상황이기에
더욱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갈등과 고민으로 시달리고
있었던 겁니다.

장소를 식당으로 옮기고 나서
일부러 영자 씨 옆으로 가서
내가 웃을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해주게 되었고

그곳에 같이 있던 홍진경 씨와
조연출자, 코디 담당자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몇 주 후에
이영자 씨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다시
몇 주 후에는 아버지, 오빠
올케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답니다.

한참 잘 나가던
이영자씨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는데요.
다이어트 비디오 파동‘을
 겪으며
​이 사건은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이영자씨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무척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힘들 때마다
낙심하지 않도록
꼭 붙들어 주셨어요.”

집사 직분도 받았다.
​아버지, 오빠와 올케 등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했답니다.
   
이영자씨는
서울 충신교회
 연예인 선교회 회원으로
정기적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신앙상담도 주고받는답니다.

서울드림교회에도
 출석하고 있다.
 

충신교회 연예인 회원으로는
개그우먼, 박미선 송은이 김영철과
탤런트 김석훈, 한상진, 가수 황보가
함께 나누고 있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하나님이 제 매니저입니다

​"빨래 끝"을 외쳤던 세제 광고와
맥도날드 cf까지 TV 광고를
무려 60편과 지면 광고
기업 홍보물까지 무려
500여 편을 출연하며

숨은 광고계의 여왕으로
등극하였으며

드라마"넝쿨째 굴러 온 당신"의
배 PD 역을 비롯하여
"왕가네 식구들"에서는
수박의 친구역과

SBS의"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는
송선화역을 맡으며 ​
연기 활동을 통해

사랑받고 있는
탤런트 이지영 집사는
현제 평촌 목양교회를
섬기고 있는데요.

이지영집사는
22살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결혼 일 년 후 아들
현승이를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아이는 태어난 지
45일 만에
예방 접종을 하러 갔더니
애가 이상하다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뇌에 물이
차는 뇌수종이 있어
뇌압이 너무 높고,
거기에 암으로 보이는
 악성 종양까지 있다며

빨리 큰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큰 병원에 찾아갔더니,
살 가망이 희박하다며
포기하라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친정아버지께서
‘아이를 그렇게 보내면
안된다’고 하시면서
서울대병원에
가보자고 하셨다.

그랬더니 서울대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다 해봤다.

 얼마 후 서울대병원에서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다.

겨우 의사들에게
사정사정해서 검사를 받아보니
물은 금방 빼야 하고,

뇌종양은 있기는 하지만
악성은 아니라 사는 데는
큰 영향이 없다는 조금
더 희망적인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아이가 점점 자라 뇌종양 말고도
머리에 말랑말랑 한 것이
잡히기 시작했고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대접만 한 혹이 되었다.

병원에서조차
 뭔지 모르고 결국
방사선 치료까지 하게 되었고,
머리 부분이 무거워
돌이 지나도 걷지를 못해
항상 안고만 다녀야 했다.

이지영 집사의 고백입니다.

“너무 힘든 시간이었어요.

아이한테는 너무 미안하지만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많았어요.

나는 아이도
참 예뻐하고 결혼 생활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왜 이렇게 시련을
주셔서 힘들게 만드실까,

또 우리 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힘들고 아파야 하나
생각이 들었죠.”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워야 할 때,
수술 후유증으로
지적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아이의 생명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녀에게 손 내민 건
예수님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교회를 다시 찾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렸다.

이지영 집사는 원래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는데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주일만 되면 친구가
교회에 가자며 집에
찾아왔답니다.

귀찮기는 해도 친구를
그냥 보내는 것이
나쁜 짓인 것 같아,

 그렇게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중고 시절에는
학생 간부이면서,
성가대에서도 봉사를 했었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이 되었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 기업에 취직이 됩니다.

하지만 직장에 다니며
주일 성수를 못하게 되었고,
또 22살에 너무나
빠르게 결혼을 하게 된 것이지요.

믿지 않은 남편을 만나면서
더욱 교회 가는 것에
소홀해졌고
 엄청난 시련이
닥쳐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만 찾을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지영 집사의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살리려고
아이를 보낸 것 같아요.

저를 많이 사랑하셔서
그러셨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런데 아이가 아프면서
 자신이 그동안
주님을 떠나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됐다.

아픈 아이를 품에 안고
이지영 집사는 다시 기도하고
회개하면서 감사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지영 집사의  고백입니다.

"아이를 위해 기도하면서
내 마음속에 다시 감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저는 굉장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엄마였죠.

지금도 많이
부족하고 철도 없지만
아이를 통해서
많이 성숙해지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하나님께서는 현승이에게
특별한 재능을 주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청음 능력인데요.

어떤 드라마나 한번 들은
찬송가를 피아노나 하모니카로
곧바로 연주를 한 것입니다.

이지영 집사의 고백입니다.

“아들의 재능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데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늘 이렇게 기도해요.

아들 현승이의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많이
증거할 수 있게 해달라고요."

비록 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현승이는
누구보다 밝게 자라주었고,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아이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지영 집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아들을 선물로 주심에
감사하게 됩니다.

현승이를 통해서
믿지 않는 남편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현승이의 나이가
24살이 되었고
1년 동안 기도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했는데

하나님께서 현승이에게
특별한 선물인
"음악적인 달란트"를 쓰시고자
나사렛 대학교 특별 전형에
1명을 뽑는데 당당히
합격을 합니다.

현승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그녀는 또 한 번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아들을 돌보느라
정신없이 살아오던 이지영 집사에게
하나님의 숨겨놓은 선물이
예비되었는데요.

​22살에 결혼한 지
두 달만에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또 현승이로 인해

너무 힘들어 점점 미래에
대한 꿈이 점점 사그라지던 때,

모 백화점 전속
주부모델 선발이 있었다.

친정어머니께서
상품권도 주니
사진이나 내보자고 권유해서
응모하게 되었고,
2등에 당선되었다.

 백화점 모델에
덜컥 합격하면서,
모델 활동 및
제약회사 광고에 출연하며
예상치 못 했던 방송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 역시 상상 못한 일이었다.

이지영 집사의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매니저 없냐고
물으면 저는 말해요.

하나님이
제 매니저시라고요.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예전에는
드라마에 캐스팅되고 싶어서
제가 사람들 만나고
기대하기도 했는데
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죠.

결국에는
쓰시는 것도 하나님이시고
캐스팅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저의 모든 것,
생활이나 방송 활동하는 것,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나의 매니저가
바로 하나님이시죠.”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딸아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

1980년대에 인기 개그우먼
이현주집사는 현제
사랑나무교회를 출석하고
계시는데요.

1987년 제1회
개그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아서

그해에 "청춘 만만세"로
신인상을 받고
"일요일 일요일 밤에"
에서 "참깨 부인"으로
우수상을 받았고

CTS "열전 씽 할렐루야"에서
MC로 활동을 했습니다

이현주집사님의
집안은
철저하게 불공을
드리는 가정환경에서
자랐기에

 “단지 1년에
몇 번 교회에 가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때는 단지
‘석훈’이라는
남자친구 보러 갔어요.

교회에서 주는
간식 먹으러 갔던 게
주된 이유였죠.”

이후 남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던 이 현주집사는
영어선생님을 하고
있는데

후배의 권유로
mbc 제1회
전국 대학생 개그 콘테스트에
대상으로 입상했다.

장난삼아 본 시험에
 합격한 그날 이후로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고
촬영이 쇄도했다.

“처음에는 인기 때문에
마냥 행복하고 좋을 것만 같았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아요.

연예인의 삶이 그래요.
인기는 영원하지 않거든요. ”라며
연예계의 실상에 대해 설명했다.

공허하고 불안했던
하나님 없는 삶
쉽게 번 돈은
쉽게 빠져나갔고

우울증과 정서불안에
시달리던 그때를 생각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영혼은 늘 공허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게 됐다.

이어 “사람을 웃기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정작 저는 웃을 수 없었어요.”
라고 말하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집에 돈을 세는 기계가
있었을 만큼 부와 인기를
누렸고

하루에 술값이 1000만 원을
쓸 때도 있었답니다.

특히 선배들의 질투와
언어폭력과 구타는
그녀로써는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로 남았고
이것을 술로 풀었다네요. ​

그러던 이 현주집사는
 코미디 전망대에 출연할
당시인 1993년
‘4중 충돌사고’로 머리를 다쳤다.

치과치료 이후
마취가 덜 풀린 혀로
 우연히 먹은 과자는
 유명인으로 살던
이 집사의 인생을 바꿨다.

잘려 피가 흐르는
혀를 7바늘 꿰맸고,
장애 5급 판정을 받았으며

초상집에서
귀신을 보기도 하면서
환청, 환각, 분노 들로
2년간 피폐된 삶을 살았다.

“무당을 찾았가서
큰 절에서 굿을 했는데
맞기만 엄청 맞고
몸은 오 겹으로 불어나
‘물에 빠진 시체’같이 되었죠” 

그때에 무당이 하는 말
"당신은 30살로 단명할것"
이라고 했습니다.

날마다 하루에 처방약을
30~40알을 먹어야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답니다.

누군가 귓가에 이런 말을
들려옵니다.

"버러지보다도 못한
너는 죽어야해"
라는 말에
유서를 써 내려갔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바라본
창밖을 보다가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2년 뒤인 94년
“운명을 바꾸는 신이 있다면
한 번만 살려달라"라고
울부짖던 이 집사의 눈에
보인 것은
창밖의 교회 십자가였다.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집 근처에 있는 교회였지만
이현주 씨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차피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교회를 찾았다.

"이제야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현주 씨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현주씨를 고칠 의사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

교회에서 만난
목사님 말씀에 의지해
매일매일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응답이 없다고 느껴졌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기도원을 찾아도 변화가 없자
다시 한번 좌절감이 밀려왔다.

이제는 정말 답이
없다고 느껴졌다.

마지막 식사
대접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시내에서 돌아오던 중
하나님께서는
택시기사를 통해
이현주씨를 붙드셨다.

그를 알아본 택시기사가
​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나와 볼 것을 권했다.

어차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교회를 찾았다.

"하나님이 계신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

교회 십자가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살아계시다면
오늘 증거를 보여주세요.

살리던지 죽이시던지
오늘 여기서 끝내주세요.

살려주시면 남은 삶을
하나님 위해 살겠습니다."

예배 후 목사님 사택에서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던 중
은혜와 몸이 마구 뜨거워졌다.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었던 기억부터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회개와 눈물로
하나님은 만난 이현주씨는
오랜 정신과 육체의
고통에서도 해방되었다.

1995년 4월 9일,
무당이 단명으로
​죽을 것이라던 30살에
그렇게 이현주씨의
옛사람은 죽고
새 생명을 얻었다.

마치 말라기 4장 2절의
말씀이 실현된 것과 같았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이현주씨는 그렇게
기뻐 뒤며 미친 사람처럼
치유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다녔다.

교회 앞 시장부터
방송까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하던
그에게 두 번째
죽을 고비가 찾아왔다.

세상 유혹에 넘어가
은혜를 잊어갈 즈음
이전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

피를 토하는 상황에서
이현주씨는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금식과 회개와
기도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이 임했다.

"딸아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을 때
내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나를 뜻을 헤아리고 경외하고
소명을 감당하기 바란다"

이후 이현주집사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 현주집사는
“죽을 수밖에 없던 자를
사역자로 불러주신 은혜에
오직 감사뿐이다.”며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평생 전하며 살겠다.”
 라고 고백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1990년 가요계에
데뷔하여
 '사랑일 뿐야', '입영열차 안에서',
'휴식 같은 친구' 등의 히트곡을
남겼으며

2015년에는
 JTBC ‘슈가맨',
2017년도에는
 MBC '복면가왕'에 출연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이제는
수입 자동차 딜러의
영업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대경대학 자동차 딜러학과
겸임교수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김민우 집사를 소개합니다.

1990년대 연달아
 히트곡을 내며
시상식마다 신인상을 휩쓸며
사랑을 받았으나

하지만
갑작스러운 군 입대 이후
컴백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에
밀리게 되었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녹음실을 만들었는데
불이 나서 모든 것을 잃었으며

IMF까지 와서 결국
새로운 수입차 딜러로
생활을 시작했답니다.
 
또 한 번의 큰 시련이
닥쳐 왔는데요.

2009년 결혼한
6세 연하의 부인이
희귀난치성 질환의 일종인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으로

한달만에
세상을 떠난 슬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인생을 접고
밑바닥까지 간
김민우를 있게 한
두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천국에
먼저 가신
기도하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아내의
믿음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답니다.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음악을 좋아하는
형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고등학교 방송부 친구인
가수 윤종신과 밴드부도
결성하면서 음악의
길로 시작하게 됩니다.

데뷔를 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지만
사실은 1990년 5월에 데뷔해서
1900년 8월에 입대를 했으므로

3개월 가수 생활한 모습을
30년 가까이 대중들이
잊지 않고 있답니다.

골든 글러브상을
받고 군대를 다녀와도
팬들이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하고 가게 된 것입니다.

군대를 제대 후
밤업소를 다니면서
돈을 모아서 녹음실을
투자해서 좋았는데

세입자분이 가스를
폭파시켜서
녹음실이 불이 나서
전 재산을 잃게 되었답니다.

김민우 집사의 배후에는
새벽 기도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날마다 기도하시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원래 집안이 유교 집안이며
절에 다니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사업 실패 후에
심장 협심증이 와서
집안이 어려움이 왔답니다.

그런데
이웃집의 전도로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시게 되었고

김민우 집사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다니게 되었답니다.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는
환경 속에서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김민우 집사는
 고등학교까지는
신앙생활을 했지만

20대 가수 생활 후에
사회에서 방황하게 되었고
녹음실이 불이 나고
가진 것을 다 잃게 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답니다.

이제 살 소망을 잃어버려
집에 있는 수면제를 먹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날 몸은
굳었는데 정신을 다시
돌아와서 밖에 나와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주님 저는 너무 갈급하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주님만이 아시오니
저의 길을 열어주십시요."
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어떤 일이고 좋다."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했답니다.

아는 후배가 전화가 와서
"수입차 사장님에게
형 이야기를 했더니
만나고 싶다고 했답니다."

다음날 아버지에게
이렇게 부탁했답니다.

"아버지
이제는 자동차 딜러를
시작하려고 하니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그런데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셨답니다.

1년간의 수습을 훈련을
통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또 한 번의
큰 시련이 오게 됩니다.

김민우 집사의 아내를
천국에 보내게 됩니다.

아내를 만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고객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아내는
교회 성가대와
다른 회사의 비서로
있었으며

2009년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구역장까지
할 정도로 헌신하는
아내였답니다.

어느 날 아내가
피부에 트러블이 생겼으며
병원에서도 원인불명이었고

큰 병원에서 골수 검사를
했는데
"혈구 탐식성 림프 증후군"
이라고 하였고
1주일 사이에 급속도로
전이되었답니다.

아버지가
 천국에 가실 때에
아내와 한 약속이
 있었는데요.

"우리 둘 중에 누가 먼저
주님 곁에 가더라도
딸 민정이에게는
믿음을 남겨주자"라고
했었답니다.

주일예배 때에
아내를 살려 달라고
그렇게 울었답니다.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일하실 때는
더 큰 사랑과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한달만에
아내가 주님 곁을
가게 되었는데

아내가 좋아하는 찬양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늘 불렀고

꿈이 있었는데
교회 근처로 이사를 가서
세 식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자고 했었답니다.

김민우 집사가
주님 곁으로 먼저 간
아내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한혜남 집사
아직도 많이 생각이 나고
힘든데 지금 많이 좋아지고 있고

새집으로 이사를 해서
집에 딸을 도와주시는 분이
와서 돌아주기도 해

항상 하늘나라에서도
우리 아버지랑 같이
우리를 위해서 많이
좋은 기도해주고

나 지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우리 나중에
주님 나라에서 만나자."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왜 다리를 하루도 잊을 수 없을까?​

2017년
대한민국 기독교미술 대전에서
"하늘에서 내려와..."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받으신 장동호교수님을
소개합니다.

전주 교대 미술교육학과 교수이며
대학생 성경 읽기 선교회(UBF)
전주지부 책임간사를 맡으며
전북대와 전주교육대를 중심으로
캠퍼스 선교하기도 한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한쪽에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서
늘 마음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열등감과 트라우마를 갖고 살았습니다.

5살 때 처음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한 번도 한쪽 다리를 잊은 적이
없었고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왜 다리를 하루도 잊을 수 없을까?"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자기 다리만 보는 것 같아가지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고.
그러한 절망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한 번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서
개구리가 우는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신이 계시다면
왜 날 이렇게 불공평하게 만드셨는가!
 그런 신은 신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신은 믿지 않을 것이며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술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어머님이 아들이 밥을 굶지 않는
직업을 위해서 재단사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럼 미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하였고

고등학교 선생님을 찾아가서
미술을 시켜달라고 하니
선생님이 감동을 받고
하게 되었답니다.

자기가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절에 가서 백팔 배를 했는데,
아! 절의 보살이 자기한테
 이렇게 말해주는 거예요.

 “네 다리는
조상들의 업보의 결과이다.
너는 그 저주를 받아서
다리가 불편한 것이다.”
더 큰 상처를 받아버렸어요.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불구가 된 것에 대해서
답을 찾아보려고 철학에 빠져보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봤지만
마음에 상처와 절망만 깊어졌습니다.

밤새 술을 마시며
잠까지 설치다가 보니
결국 폐렴까지 다가와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됩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서 미술을
가르치는 화실을 차리게 됩니다.

 늘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던 26살 때에 한 친구가
전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친구가 날마다 오면
하는 말이 "이 죄인"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26년을 살면서 헛된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에 펑펑 울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 위해 사는가?
늘 죽을 생각만 합니다.

막상 죽으려고 하니
어머니가 생각이 나서
죽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친구를 보면서
"왜 저 친구는 하나님을
믿을까?"궁금해서
친구에게 먼저 교회에 가고
싶다고 했답니다.

막상 교회에 버스 타고 가는데
너무 마음이 무거웠고
목사님이 성경공부를
시작하자고 해서 하는데
두 달 만에 수련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누가복음 23:34말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죄인입니다"
우상숭배했던 것에 대한
회개가 나오게 됩니다.

아직까지 본인은 스님이
말한 조상의 저주를 받아서
이렇게 사는 줄로 알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저주 운명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구나"
믿게 되었답니다.

처음으로 자유를 얻게 되었고
하루를 아픈 다리를 잊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끝나고 나오는데 하늘을 보면서
"왜 하늘이 이렇게 아름답지"
비로써 알게 되었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의 피를 너무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쓰러질 정도였고
한 집안에 두 종교를 믿으면
안된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제 장 교수가
결심을 하고 화실에 늘
밥을 해 오시는 어머니께
이제부터는 혼자 알아서 먹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자립하겠다고
선포했답니다.

어머님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시니
"나는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확실하게 믿는다"라고
고백을 하니

어머님이 그럼 이제부터는
"네가 믿는 예수님을 나도 믿겠다"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답니다.

함께 교회를 다니는 친구가
UBF 수양회에 가자고 권해서
마지못해서 따라갔는데
그곳에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맹인에게 인과응보를 주님께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3절에 나옵니다.

"그가 맹인 된 것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구나"
그러면서 장 교수의 열등감이
씻겨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운명, 슬픔, 어두움이 떠나가게 되고
자신의 삶의 모습에 감사하게 됩니다.

죄와 열등감에서 해방되면서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드리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장 교수님의 고백입니다.

" 제 몸이 불편한 것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얻었습니다." 
 
 장 교수가 주님의 은혜에
너무 감격하여 통곡하고 울고 나서
 “나 이제 주님의 영광 위해 살리라."라는
결심으로 일본에 유학을 갑니다.

13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전주 교대 미술교육학과
교수가 되었고

전주 지역에 있는
많은 대학생들을 말씀을 통해서
교육하고 제자훈련하고
또 전도하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2017년
대한민국 기독교미술 대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하늘에서 내려와’란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수상 소감입니다.

 “3개월 동안
대여섯 시간을 내리 서서
나무를 파내며 작업하다 보니
손목 발목은 물론 몸 전체가
더 망가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
멈출 수 없었습니다.

모든 인생이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제 모습으로,
또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1968년 TBC 방송국의
공채 6기로 선발되어
반공 드라마 "추격자"를
시작으로 연기 48년의
중견 연기자로써

이후에 "야인시대"
"인어 아가씨"
"모래성"
"간첩 리철진"등
다수의 연기를 선보인
정영숙 권사는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데요.

48년이 다 돼가는
연예계 활동 외에
월드비전 친선대사,
한민족복지재단 홍보대사,
한기총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갱생보호공단 홍보대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 
  
정영숙 권사는
평북 선천이 고향이다.

할아버지가 장로였고
어머니는 권사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북한에서 지주고
믿는다는 이유로
숙청을 당해서
가족과 함께 3살 때
남한으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어릴 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성극과 성가대를
하였던 것들이 나중에
연기하는데 도움이 된것이
라고 하는데요.

그런데 중학교 졸업 때
큰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떨어지고
2차로 다시 넣어보니
숭의 여고 야간학교만
있어서 가기 싫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등록금이 없었는데
어머님이 가셔서
이곳은 미션스쿨이니
돈 없어도 받아달라고
학교 교장을 찾아가서
허락을 받기도 했답니다.

감사하게도 기독학교를
통해서 성가와 설교를
들으면서 기쁨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고

그 고난을 통해서
1차로 대학을 붙게 되면서
고난이 유익임을
고백합니다.

시편 119편 71편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래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1968년,
​아버지와의 오랜 씨름 끝에
​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지원하게 된 정영숙 권사님은
이화여자대학교
​진학을 원했던
​ 딸의 노력과 간절함은
​비싼 등록금으로 무마되고
​ 결국 그녀는 숙명여대에서
​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평범했던 그녀에게
​뜻밖의 일이 찾아왔는데,
바로 탤런트 모집 오디션이었다.

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 당당하게 배우로서의
​ 입지를 굳히게 된 그녀.
만약 이화여대를 택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정영숙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그 당시 이화여대는
​ 연기자 활동을 금했어요.

​입학 당시 제 뜻대로
​ 해주지 않은 아버지가
​ 왜 원망스럽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 대학 진학뿐 아니라
​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이뤄진 일이 없더라고요.

 제가 무지해서
​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 일마저도
​ 얼마 전에 깨닫고 이제야
​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 말을 전했어요."

화려할 것만
​같은 연기자 생활은
​ 오히려 그녀에게
​신앙 생활을 더욱 깊이
​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줬다.

대학교 2학년 때
봉사단체에서
섬김을 나누는데
어느 날 인도자가 같이
돌아가면서 기도하자고 하니

창피해서 나가지 않았고
나중에 후회를 합니다.

대학 졸업 때 추천제로
탤런트로 나가게 되었는데요.

그 당시에 특별한 탤런트를
모집해 보자고 하였고

숙대에서 모집하니
친구들의 추천으로
돈을 벌고 싶어서
시험을 보게 되었고

친구들이 화장을 해주어서
임신복 같은 옷을 입고
시험을 보러 갔답니다.

그리고 합격을 합니다.

추격자에 뽑히게 되었고
카메라 앞에 두려워서
우물 우물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직업이
아니지만 도와주세요"
정말 표정이 굳었지만
북한의 역할을 잘했다고
칭찬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계기가 있었답니다.

결혼하여 십일조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 드린 것은
그대로 응답하셨습니다.

결혼할 때에 70만 원
전세에서 시작을 하였지만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잠언 3장 9-10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 말씀처럼 응답하셔서
60평 아파트를
 응답 주셨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왔지만
​성경을 제대로
​ 읽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동료 연예인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됐고,

처음 연예인 교회가 생기고
고은아 집사님이 끌고 가서
같이 성경공부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연예인 교회를 다니지
않았기에 자주 가기가 힘들었고

탤런트 정재순 씨가 전화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여서
좋다고 했는데 그곳이
성경암송하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정재순 씨의
집에서 하는데
그래도 내가 수익이
더 많으니 우리 집에서
성경공부를 해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드디어 집에서
드리게 됩니다.

정영숙 권사님 집은
​ 매주 붐비게 됐다.

​성경공부를 위해 모인
​ 동료 연예인들을 식사로
​섬겼던 그녀의 섬김이
​지금은 나라와 세계를
​섬기는 일로 커져 갔다.

성경공부 모임은
98년 '한국TV연기자
​기독신우회'를
​조직화 하는 기초가 되었고,

기독신우회는
​자체적인 예배와
​성경공부 모임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웃과 교회를
​ 돌보는 일로 자라갔다.

정 권사는
연기자 신우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연기자 신우회에서는
각종 좋은 일을 많이 한다.

교도소 방문,
군부대 방문도 한다.

‘건너가게 하소서’ ‘퀸 에스더’
‘영문 밖의 길’ 등 성극(聖劇)에도
자주 참여한다.

연기를 통해
복음을 전한다는 보람과
하나님 앞에 모든 걸 바쳐야
한다는 믿음으로 임하고 있다.

또 나라를 위한
기도모임인 ‘에스더 모임’과
‘땅 밟기 기도모임’
 ‘사랑의 쌀 모임’도 계속하고
있답니다.

정영숙 권사님이 특히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기 시작한 것은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말씀 암송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좁혀가기 시작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강하게 영혼의 울림을
주셨답니다.

정영숙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그때 저의 영혼을
강하게 울렸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는
히브리서 4장 12절이었어요,"

​연기자 생활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계속
주셨고

이런 소망을 들어주셔서
월드비전의 친선대사가
되어 소말리아의 선교를
가게 되었고

1997년 국내 최초로
 대북지원 사업을
실시한 한민족복지재단의
홍보대사로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사실 정영숙 권사님의
고향이 평북 선천이랍니다.

어릴 때 외 할아버지가 사업을
하셨기에 집안이 넉넉했는데
어느 날 북쪽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아시고

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하셨고
그러다가 전쟁이 나서
이산가족이 되었답니다.

그런 실향민의 아픔을
가진 정 집사님은
북한을 향한 선교에
가슴이 뜨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48년이 다 돼가는
연예계 활동 외에
월드비전 친선대사,
한민족복지재단 홍보대사,
한기총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갱생보호공단 홍보대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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