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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국민 엄마라는
탤런트 김혜자 권사님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현제 남대문교회
권사님으로 계시는데요.

연예인들이 당당하게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본인은 당당하게
이렇게 고백한답니다.

김혜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성경에도 있잖아요.
네가 나를 모른척하면
나도 널 모른다고 하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우리는
‘난 어떤 사람을 존경해’라는
말은 잘 하면서
‘하나님을 좋아한다’는
말은 왜 꺼려 할까요?

저는 하나님이 없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어요”라고
 말했다. 

1941년 10월 25일
서울에서 출생한 김혜자 권사는
이화여자대학교 2학년 시절인
1961년 KBS 서울중앙방송
공채 1기 탤런트로 정식 데뷔하여
공채 1기로 시작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작품은
(전원일기) (사랑이 뭐길래)
(장미와 콩나물) (엄마가 뿔났다)
(눈이 부시게) 등으로
제2회 마닐라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동아연극상 여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88년 mbs 방송연기대상, 92년 방송대상,

2011년 영화《마더》로
미국 LA 영화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95년에는 최장수 전속 광고모델로
선정됐다.

1991년 월드비전
친선 홍보대사로 임명되었고,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신앙은 모태신앙으로
어렸을 때 다닌 교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방석에 앉아서
예배 보는 교회였어요.

그런데 만날
예배를 보고 나오면
좋은 신발이 없어지고
헌 신발이 있어요.

그러니까 청년부
어른들이 도둑을
잡아야 된다고 했어요.

신발 사이즈가 열 살
미만 애들 것이 없어지니
누군가가 와서 바꿔
신고 가겠지요.

 잡는다고 막 그러는데
전도사님이 이러셨어요.

 “놔둬라.
도둑질하다 하나님 만난다.
잡지 마라."라고 했어요.

 저는 그게
굉장히 어렸을 때인데도
평생 잊어지지가 않아요.

교회 문이 너무
굳게 닫혀 있잖아요.

그리고
이상한 사람
안 들이려 하고.
제 생각에는
그 전도사님처럼
도둑질하는 사람,
배고픈 사람 이런
사람들이 뭘 훔쳐 가려고
왔다가 뭘
얻어먹으려고 왔다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하나님을 너무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애인같이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 이거 몰라요.
해줘요.
내가 못 하잖아요.

이거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떼를 잘 쓰는 것 같아요.

 그 대신 제가
 할 일은 정말 최선을
다 해서 해요.

그다음에는
이제 나는 몰라요.
​ 그렇게 얘기하죠.

새 드라마를
시작할 때나
새 연극을 할 때는
‘저를 책임져 줘요.

 나는 못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해 줘야지
나는 못해요.’

김혜자 권사님의
담배를 끊게 된
고백입니다.

첫 임신 때
입덧을 없애려
담배를 접한 후
나도 모르게
30년 골초가 되었다.

​집에서나
방송국에서나
늘 내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오죽했으면 연예계
‘체인 스모커’를 뽑을 때
늘 1위를 차지하곤 했을까.

​나는 흡연가라기보다는
애연가였다.

담배를 물었다 하면
필터만 남을 때까지 피웠고
폐 속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이며
참 맛있게 피웠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담배만은 포기할 수 없어
교회에 갈 때마다
“하나님,
이것만은 좀 봐 주세요”라고
기도하곤 했다.

​그런 내게 ‘사건’이
일어난 것은 6년 전 이맘때였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담배부터 피워 물었는데
이제껏 피던 맛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 껐다가
다시 불을 붙이기를 거듭했지만
쓰고 역겨운 맛뿐이었다.

​그날 밤 미국에 사는 딸이
전화를 했기에
“고은아, 정말 이상하다.
​담배 맛이 싫어졌어”라고
말했더니

딸이 갑자기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며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하나님이
아름답게 지어 주신 몸을
담배 따위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이렇게 빨리 들어주실 줄 몰랐어.”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담배를 피워 온 엄마에게
차마 담배를 끊으라는
말은 못하고

무려 백일 동안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새벽 기도를 다녔다는
딸아이의 말을 듣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로 담배와의
길고 긴 인연이 끊겼다.

​다행히도
금단현상은 전혀 없었다.

​누가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워도 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금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의 힘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

김혜자 권사님의
기아 돕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
 

‘기아 아동 돕기’는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어요.

 드라마 끝나고
11년 전에 어디로
여행 가려고 할 때
월드비전 회장님이,
그때가 우리나라가
도움을 받기만 하다가
우리가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뀐 해예요.

 우리가 제일 먼저
돕는 나라가 에티오피아인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

다른 나라도
유명한 배우나 가수가
이런 데 참여하면 사람들이
그 얘기에 주목하고
좋은 결과가 나와서
애들을 도울 수 있다고 해서
시작한 거예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너무나 비참한, 가난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보고
여태까지 내가 죄인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제가 월드비전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내가
모태 교인인데도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정말 희미하게
하나님께 가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저에게 확실하게
일을 맡기신 것 같아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그런데 거기에 꼭
크리스천들이 와서
봉사를 해요.

에티오피아를 방문했던
 당시를 회상하던 김혜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보이는 광경
하나하나가
드라마 세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평 남짓한 공간에서
열댓 명이 생활하고
젊은이들은
에이즈와 굶주림에
희망이 없이 살아간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희망을 지닌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태어나지 말아야 할
존재들이었다"라며

 "현실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동반 취재를 했던 언론에서는
나를 굉장한 인물로
그려놓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생지옥 같은 그곳이 싫어
'다시는 가지 않겠다'라는
마음뿐이었다"고 전했다. 

다시는 아프리카에
 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한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한 젊은 여성의 편지였다.


 구로공단에서
받은 월급을 모았다며
김혜자 권사에게 편지와 함께
보낸 한 여성의 정성에
그녀는 다시
아프리카 대륙으로,
인도로, 굶어죽어가
는 아이들에게 찾아갔다. 

9.11테러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총칼을 들이댄
전쟁에서 계속되는,
배고픔과의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곳의 아이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오래 먹으면 실명하게 되는
독풀을 씹고 또 씹는다.

 하도 풀을 씹어서
입 주위는 퍼렇게
물까지 들었지만
생풀을 뜯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갈 뿐이라고 한다. 

김혜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라면
이들을 모른척해서는
안된다.

나도 처음에는
그곳이 싫고 무서웠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은
그들을 이렇게라도
돕는 것"이라며

"나는 먼지만도
못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쓰시기 위해
 유명한 여배우로
만드셨다고 생각한다.

그곳의 아이들이
나를 부르고 있다"라며
"이 아이들을
외면하지 말아달라.
아이들에게 날개 달린
천사가 되어 달라"라고
합니다.

김혜자 권사님에게도
고난이 찾아왔는데요.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야 한 한 것입니다.

김혜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이별이란
슬픈 거잖아요.
 병실에서
남편과 둘이 있을 때
자기가 암이라니까
우리 남편이 가만있더라고요.

‘그렇지,
나도 암에 걸릴 수 있지’
그러더군요. 모르겠어요.

죽으면
하나님에게 가는 건데
그런 게 많이
힘이 됐겠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면서 내가 죽으면
자기가 힘들어서 어떡하나
그랬어요.

그러고 한 달 반 만에
갔으니 너무나 꿈같이,
현실이 아닌 것 같이….
그래도 세례도 받고
성찬식도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했으니 그게
 큰 위로가 됐고요."

김혜자 권사님은
 하나님은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은 대해 말할 때
‘복 주시는 분’이란 이야기를
자주 하잖아요.

그런데, 그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해요.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해요”라고
고백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연극배우 출신에서
본격적으로
경찰 전문 배우로
 활동을 하다가

 이제는 따뜻하고
친근한 배우로
 우리들의 곁에 와 계시는
 강신일 장로님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동숭교회 장로님로
섬기고 계시는데요.

주요 작품은
[광부 화가들] [레드]
[공공의 적] [실미도]
[강철중] [7급 공무원]
[[태양의 후예] [미스터 션사인]
[비켜라 운명아]
연극과 영화 및 드라마
다수에 출현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하게 된
계기가 있었답니다.

강신일 장로의
고백입니다. 

원래 집안이 유교적인
집안이기에
고등학교를 가는데
한 곳을 가는 것을
반대했는데
그곳에 미션스쿨이었고
하나님은 그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학교에 다니면
교회에 출석하고 도장을
받아 올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리고 성경 시험에서는
100점을 맞기도 했답니다.

서울 오면서 교회는 잊고
있었고 친구도 없었는데
고등학교 친구가 전도를
하게 됩니다.
 

그 후로 동숭교회를
40년을 다니게 되었고
한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만나게 해 주신 분은
교회학교 고등부
선생님이셨고
지금은 선교사님으로
사역을 하고 계시답니다.

그 당시 전도했던
친구는 목사님이 되었답니다.

그럼 어떻게 배우로
시작했는지 알아볼까요.

강신일 장로의
고백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소개로
동숭교회에 나왔는데 

그것을 계기로
연극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청년 때에 문학의 밤을
 참여하면서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자 하여
소외된 지역에 공연하면서
선교 극단 "증언"을 시작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대학은
전기공학과를
전공했지만

성경을 더욱 많이 봤기에
집안에서는 그러다가
신학과를 가면 어떻하나?
라고 걱정할 정도였답니다.

군대 있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연극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준비해 오다가

군대 제대 이후에 동숭교회
최종률 장로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연우무대"라는
극단을 소개해주신 것입니다.

이후 강신일 장로는
1986년부터 극단 ‘연우무대’에
들어가서 다수의 연극에
주인공으로 서게 됩니다.

그런데 2000년도에
함께 활동 연기자들이
방송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외로움을 느꼈지만
오직 연극으로 평생을
바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셋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오게 되니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여
"방송도 연기인데
도전해 보아야지"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마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2002년 영화
‘공공의 적’에 출연하면서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연극 20년 동안
하는 것보다 한 번의 영화가
대중의 인지도가 큰 것임을
기차 타고 가면서
알았다고 합니다.

그 후에
영화 ‘실미도’ ‘한반도’ 
 ‘강철중’
‘7급 공무원’ 등으로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영화배우로
자리를 잡고 나니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영화 관계자들과
술자리도 잦아지고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신앙생활을 멀리했다.

그는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또 한 번 철퇴를 내리셨다.

셋째가 8살이 되었을 때에
2007년에 간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두 달 후에 다시
검진을 받은 후에
수술을 받게 되었답니다.

수술 전까지는 가족을 위해
사는 것 같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연극이
너무 좋아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주위 사람들의 안타까움과
위로와 눈물을 통해
이 사람들을 위해
이제 기쁨을 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강신일 장로님의
고백입니다. ​

“승승장구하니
신앙에서 멀어지게 됐죠.
하나님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고
철퇴를 내리셨는데,
이것이 오히려 은혜였습니다.”

그때를 계기로
 처음 연극을 시작했을 때
자세와 하나님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를
다시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술, 담배를 끊으며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다고 합니다.

강신일 장로님의
연기의 기본을 성경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1968년 TBC 방송국의
공채 6기로 선발되어
반공 드라마 "추격자"를
시작으로 연기 48년의
중견 연기자로써

이후에 "야인시대"
"인어 아가씨"
"모래성"
"간첩 리철진"등
다수의 연기를 선보인
정영숙 권사는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데요.

48년이 다 돼가는
연예계 활동 외에
월드비전 친선대사,
한민족복지재단 홍보대사,
한기총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갱생보호공단 홍보대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 
  
정영숙 권사는
평북 선천이 고향이다.

할아버지가 장로였고
어머니는 권사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북한에서 지주고
믿는다는 이유로
숙청을 당해서
가족과 함께 3살 때
남한으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어릴 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성극과 성가대를
하였던 것들이 나중에
연기하는데 도움이 된것이
라고 하는데요.

그런데 중학교 졸업 때
큰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떨어지고
2차로 다시 넣어보니
숭의 여고 야간학교만
있어서 가기 싫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등록금이 없었는데
어머님이 가셔서
이곳은 미션스쿨이니
돈 없어도 받아달라고
학교 교장을 찾아가서
허락을 받기도 했답니다.

감사하게도 기독학교를
통해서 성가와 설교를
들으면서 기쁨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고

그 고난을 통해서
1차로 대학을 붙게 되면서
고난이 유익임을
고백합니다.

시편 119편 71편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래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1968년,
​아버지와의 오랜 씨름 끝에
​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지원하게 된 정영숙 권사님은
이화여자대학교
​진학을 원했던
​ 딸의 노력과 간절함은
​비싼 등록금으로 무마되고
​ 결국 그녀는 숙명여대에서
​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평범했던 그녀에게
​뜻밖의 일이 찾아왔는데,
바로 탤런트 모집 오디션이었다.

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 당당하게 배우로서의
​ 입지를 굳히게 된 그녀.
만약 이화여대를 택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정영숙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그 당시 이화여대는
​ 연기자 활동을 금했어요.

​입학 당시 제 뜻대로
​ 해주지 않은 아버지가
​ 왜 원망스럽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 대학 진학뿐 아니라
​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이뤄진 일이 없더라고요.

 제가 무지해서
​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 일마저도
​ 얼마 전에 깨닫고 이제야
​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 말을 전했어요."

화려할 것만
​같은 연기자 생활은
​ 오히려 그녀에게
​신앙 생활을 더욱 깊이
​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줬다.

대학교 2학년 때
봉사단체에서
섬김을 나누는데
어느 날 인도자가 같이
돌아가면서 기도하자고 하니

창피해서 나가지 않았고
나중에 후회를 합니다.

대학 졸업 때 추천제로
탤런트로 나가게 되었는데요.

그 당시에 특별한 탤런트를
모집해 보자고 하였고

숙대에서 모집하니
친구들의 추천으로
돈을 벌고 싶어서
시험을 보게 되었고

친구들이 화장을 해주어서
임신복 같은 옷을 입고
시험을 보러 갔답니다.

그리고 합격을 합니다.

추격자에 뽑히게 되었고
카메라 앞에 두려워서
우물 우물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직업이
아니지만 도와주세요"
정말 표정이 굳었지만
북한의 역할을 잘했다고
칭찬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계기가 있었답니다.

결혼하여 십일조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 드린 것은
그대로 응답하셨습니다.

결혼할 때에 70만 원
전세에서 시작을 하였지만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잠언 3장 9-10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 말씀처럼 응답하셔서
60평 아파트를
 응답 주셨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왔지만
​성경을 제대로
​ 읽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동료 연예인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됐고,

처음 연예인 교회가 생기고
고은아 집사님이 끌고 가서
같이 성경공부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연예인 교회를 다니지
않았기에 자주 가기가 힘들었고

탤런트 정재순 씨가 전화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여서
좋다고 했는데 그곳이
성경암송하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정재순 씨의
집에서 하는데
그래도 내가 수익이
더 많으니 우리 집에서
성경공부를 해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드디어 집에서
드리게 됩니다.

정영숙 권사님 집은
​ 매주 붐비게 됐다.

​성경공부를 위해 모인
​ 동료 연예인들을 식사로
​섬겼던 그녀의 섬김이
​지금은 나라와 세계를
​섬기는 일로 커져 갔다.

성경공부 모임은
98년 '한국TV연기자
​기독신우회'를
​조직화 하는 기초가 되었고,

기독신우회는
​자체적인 예배와
​성경공부 모임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웃과 교회를
​ 돌보는 일로 자라갔다.

정 권사는
연기자 신우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연기자 신우회에서는
각종 좋은 일을 많이 한다.

교도소 방문,
군부대 방문도 한다.

‘건너가게 하소서’ ‘퀸 에스더’
‘영문 밖의 길’ 등 성극(聖劇)에도
자주 참여한다.

연기를 통해
복음을 전한다는 보람과
하나님 앞에 모든 걸 바쳐야
한다는 믿음으로 임하고 있다.

또 나라를 위한
기도모임인 ‘에스더 모임’과
‘땅 밟기 기도모임’
 ‘사랑의 쌀 모임’도 계속하고
있답니다.

정영숙 권사님이 특히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기 시작한 것은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말씀 암송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좁혀가기 시작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강하게 영혼의 울림을
주셨답니다.

정영숙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그때 저의 영혼을
강하게 울렸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는
히브리서 4장 12절이었어요,"

​연기자 생활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계속
주셨고

이런 소망을 들어주셔서
월드비전의 친선대사가
되어 소말리아의 선교를
가게 되었고

1997년 국내 최초로
 대북지원 사업을
실시한 한민족복지재단의
홍보대사로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사실 정영숙 권사님의
고향이 평북 선천이랍니다.

어릴 때 외 할아버지가 사업을
하셨기에 집안이 넉넉했는데
어느 날 북쪽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아시고

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하셨고
그러다가 전쟁이 나서
이산가족이 되었답니다.

그런 실향민의 아픔을
가진 정 집사님은
북한을 향한 선교에
가슴이 뜨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48년이 다 돼가는
연예계 활동 외에
월드비전 친선대사,
한민족복지재단 홍보대사,
한기총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갱생보호공단 홍보대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MBC 드라마
 "고개 숙인 남자"로 데뷔하여
"옛날의 금잔디"
"풍문으로 들었소"등
다수의 드라마와
​광고를 출연하였고

2010년 SBS 드라마
 "이웃집 웬수"로
연속극 부문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유호정씨를 소개합니다.

1995년 동료 연기자
이재룡씨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답니다.

이전에도
교회를 몇 번 갔지만
어머니 소천하시고
누군가에 의지하고파서
교회에 다니게 됩니다.

어릴 때에 어머님이
점과 굿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싫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교회에
나가게 하시고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을
영접하셨답니다.

본격적으로 성경공부와
신앙의 깊이가 생긴 또
다른 계기가 있었답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신애라, 오연수, 최지우 씨 등과
성경공부를 할까?라고
하는 마음이 있기까지
친구들의 기도가 있었답니다.

2005년 하용조 목사님과의
새 신자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고
즐겁게 성경공부를 하였답니다.

지금은 1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답니다.

유호정의 어릴때
성격은 소극적이고
조용한 아이였답니다.

집안은 어릴 때에
초등학교 때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를
마음속에 모르고
살았답니다.

대신 어머니가
아버지 대신에 엄하게
길렀고 한 번도 칭찬이
없었고 늘 불만이었답니다.

늘 셋방에 살았지만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고 학교 졸업하고
집을 사고 싶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오래전에
하나님이 부르셨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원래의 미래의 꿈은
소박하게 어린이 교사와
가정을 이루는 것이
꿈이었답니다.

어릴 때 아르바이트로
CF로 길거리 캐스팅으로
돈을 벌게 되면서
시작하게 되었고
연기자가 되었답니다.

처음에 캐스팅되어 갔는데
TV에서만 보면
대선배인 최불암, 최민수 씨 등을
보면서 대본을 쥐고 있는
손이 떨었다고 하네요.

TV는 공채가 아닌
특채로 왔기에 시기와
질투가 많아서 어려움이
있었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그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남편 이재룡을 만나게 되면서
청춘 드라마로 캐스팅되었답니다.

처음에 교회를 간다고 하니
남편이 화가 났었다고 합니다.

새벽 기도를 갈려고 해도
막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남편이 교회를
데려다주기도 한답니다.

유호정 씨는 연기와
가정 중에 우선순위를
가정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연기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꾸 화도 내고
짜증을 낼 때가 많게 되고

연기 중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무당이나 그런 연기에는
거절할 때가 많게 된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통해
거절할 수 있는 자유함을
주셔서 욕심을 내지 않고
신앙에 맞는 역할을
하려고 한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아버지는
연극배우 추송웅이고
작은오빠 역시
배우인 추상록이며,
남편은
뮤지컬 배우인 이석준인
연예인 집안의
 배우이자
이제는 영화감독인
추상미 감독을 소개합니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의 고아 1,500명이
 비밀리에 폴란드로 보내졌고

 폴란드 선생님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었고,
아이들도 선생님을
‘마마’, ‘파파’라 부르며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8년 후,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송환 명령을 받게 되었고

2018년, 아이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지금까지도
폴란드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영화를 가지고
다시 감독으로 돌아온
추상미 감독을
소개합니다.

추상미 감독은
고등학교까지는
성당에 다녔고

대학교 전기에 떨어지면서
그때 마침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다니시던 엄마가 하는 말
"네가 후기 시험이라도 붙으려 먼
교회에 다녀야 해"
라고 하면서 철야예배에 다니게
되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의 터치로
방언과 감동으로 평안함으로
후기 시험을 통해
대학교 합격하여서
1학년 때는 ccc에 활동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국문과이다 보니
어려가지 학문과 철학을 접하면서
세상의 학문 철학들의 매력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젠 성경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았고
교회를 다니지 않고
연예인이 되면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2003년까지 방황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부르시게 됩니다.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2003년도에
생활의 발견에서
주연으로써 잘 나가게 되었고
이젠 잘 될 것 같다고 주위에서
말했는데

그 이후로
섭외가 뚝 끊기게 되면서
어머니, 오빠와 홍대 앞에
소극장을 지으면서 재정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오빠의 사업의 실패와
보증으로 가정의 어려움과
신앙도 튼튼하지 못했기에
서로 가족 간의 갈등까지
오게 되었답니다.

그 당시 친구 따라서
 온누리교회에 다니는데
문제의 해결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릴 때의 상처까지
치유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후로 5년간
성경공부를 하면서
당시 목사님이 인도하면서
성경 속의 인물들이 전부 상처를
통해서 쓰임 받게 되는 과정을
알게 되었답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연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남편까지
준비해 놓으셨답니다.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지만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와
갈등으로 공황장애가
오게 되어서
새로운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오래전부터
꿈꿔온 영화 연출,
창작을 위해 대학원
진학을 합니다.

그런데
아이 출산 후에 산후 우울증을
겪게 되면서 자신이 잊혀지는
모습과 남편은 일이
바빠서 늦게 들어오게 되었고
서로 관계의 어려움과 육아의
힘든 상황까지 왔답니다.

어느 누구도 우울증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어릴 때 가정의 상처와
부모님들의 갈등으로
가정에서 채우려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기대가 결혼의 갈등으로
상처가 우상이 되었음을
하나님이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
주위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분리 시키시며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신을 환상을
보게 되었답니다.

어느 날 소파에
눈을 감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지친 나를 안아서
십자가로 겹쳐서
못 박히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2시간 이상을 울었답니다.

1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산후 우울증으로
매일 아이가 죽는 악몽을
꾸던 시기였답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린 것에 것을
반복적으로 아이에게
느껴지게 되었는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가져가셨답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창문에
뛰어내리고 싶은 상황 속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서

"하나님 어떡하죠?"

하나님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
"괜찮다, 내가
너를 다시 세울 것이고
내가 너의 남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왜 죽음을 생각하느냐"

"내가 너를 정결한 신부로
다시 세울 것이다"

그 순간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이제 어떤 문제가 와도
주님만 바라보면 되는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6개월은 날마다
"마라 나타"
주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고백만 나오더랍니다.

그때부터 이런 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을 텐데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고"

이제 궁금해지기
시작해서
본격적인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너를 하나님 나라의
예술가로 세우고 싶다"라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즌별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 메시지를 작품으로
만들라는 소명을 주셨답니다.

소명을 주신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작품을 만들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인생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막연했는데
그때 하나님께 또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저에게
 장편 영화의 소재를 주세요"

일주일을 야곱처럼
간절한 기도를 한지
일주일 후에 친한 후배가
일하는 출판사에
놀려가게 되었답니다.

그곳에 출판사에 사장님이
무슨 영화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보시길래

아이들이 나오는
성장영화에 관심이
있다고 했더니
그럼 북한 아이들,
한국 전쟁영화 아이들
소재가 있다고
하면서 넘겨주시는데

집에 와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확신이 필요했답니다.

자료를 넘기면서
북한의 아이들이
폴란드에 입양을 왔다가
북한의 천리마 운동이라는
조국 재건운동을
하면서

청소년 아이들을 다시
 북송을 시키면서
아이들은 두 번 부모를
잃게 됩니다.

그 당시 폴란드 선생님들이
쓴 일지에서 발견한
"주여!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우리로부터 아이들을
떼어 놓으십니까?"

이 글을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신앙 깊은 폴란드 교사들에 의해
양육되었던 전쟁고아들인 것이죠.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저 예산 다큐멘터리 영화이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답니다.

추상미 감독을 먼저
훈련과 과정을 통해
"먼저 예배자가 되어라"라고
하시면서 준비하게 합니다.

2018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
개봉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침 부산 영화제가
잃어버린 가족의 주제와
일치되게 하셨답니다.

추상미 감독도 자신의
어릴 때의 아빠를 잃었던
상처를 통해서 이 작품을
발견하였는데

폴란드 선생님들도 전쟁을
통한 상처를 통해서
이 아이들을 품게 되었답니다.

추상미 감독이 직접 가서
인터뷰를 하는데
지금도 살아계신 90살 된
폴란드 선생님이 하는 말

"우리가
기차역에 내린
까만 머리 까만 눈의
한국 고아들을
보았을 때
내 유년시절의 모습이 보여
그 아이들에게는
엄마 아빠가 필요하다"

그래서 자신들이
엄마 아빠가 되었답니다.

추상미 감독은
"우리들도 살아온 상처를 가지고
북한의 아픈 민족을 품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원해요"
라고 고백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가수 이지훈을
소개하려면 너무 다방면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서
겸손하면서도열심이 하는
예수님을 믿는 청년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수이면서 드라마와
뮤지컬 그리고
이번에 복면가왕에 나와서
김장군으로 놀라운 노래 실력을
드러내는 실력자가
확실한것 같네요.

모태 신앙이기도 하는데
 방언도 초등학교
4학년 때 받았고
어렸을 때부터 뜨겁게
하나님을 믿었답니다.

1996년에 발라드가수로
18살때부터 데뷔해서
부,명예,인기등
 많은것을 얻었습니다.

인기를 얻다보니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세상은 냉정했고
내인기는 시들게 되고
좌절하면서 방황하고
방탕하고 술로 보내고
어둠의 시기를 지나게 됩니다.

귀공자 같은 스타일에
여심을 자극하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자신이 너무 자만하다가
큰 시련이 오면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는데요.

3집 앨범 때 어깨를 다쳐서
 군대 면제 판정을
받았는데 곱지 않는 시선으로
힘들었는데 폭력과 사기 사건에도
몰리면서 거의 절망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계속 연예계
생활을 해야 하나 많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고통의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기도하라는 말씀이시구나!"

그에게 고난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되었고
깊은 교제와 기도모임으로
더욱 굳건한 믿음을
회복하게 됩니다.

 결혼한 누나가
손을 내밀어 주어서
누나가 다니는 교회로
옮기게 되면서
기도가 회복되게 됩니다.

이 생활을 2년동안 하면서
내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니
세상과의 관계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빨리 응답이 없지만
감사가 되고
드라마와 뮤지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마음속에서
무조건 형통한 것이 잘된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것이
축복이구나라고 깨닭고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지훈씨는 이런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다 예비해 놓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지 못하시니
 주시지 못하신답니다."


​신앙적으로
한층 성숙해진 그는
 ‘연예인 전도사’답게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전도’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내놓았다.

“불신자를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가
잠시 신앙을 멀리한 이들,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상처를 안고
쓰러져가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저는 그들을 먼저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옆에서
성령을 체험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함께
나누는 게 전도의 열매입니다.”

이런 소신을
가진 이지훈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가수
이수영에게 신앙을
되찾아주었다.

방송활동을 하면서
교회를 한두번 빠지기
시작한 이수영이
신앙상담을 해왔고
함께 금요철야예배에
기도모임에서 함께 하기도
했답니다.

지금 자라는 다음세대에게
자신은 꿈이 없이 살아온것
같다는 데요.

"가장 중요한 것은
멘토가 중요한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섬기는
목사님이 저의 멘토가 되십니다."

대화단절과 맞벌이 하면서
자녀들이 홀로
있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영혼한 멘토는
예수님이시지만
그가 어려울때
누님을 통해서 담임목사님을
만나게 되고 이젠 주위사람들을
전도하고 섬기는 멘토가 된것처럼

우리들도 내주위의
멘토가 되어서 참 섬기는
전도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축복의 사람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안녕 프란체스카,"
"넌 어느 별에서 왔니,"
"샐러리맨 초한지,"와

​영화 '두 얼굴의 여친',
 '적과의 동침'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 있는 배우 정려원을 소개합니다.

2000년 샤크라의 멤버로
데뷔해서 2004년 탈퇴를 한
가수 출신입니다.

호주에서 자라면서
별로 말이 없는 아이였지만
좋아하는 과목에는
올인하는 스타일이었고

모험심이 강해서
열세 살 때부터 한국으로
오기 전인 열아홉까지
도서관,약국,서점
옷 가게, 마트는
그 나이에 하는 아르바이트는
다 해본 것 같다고 합니다.

원래의 꿈은 약사와
통역사였다는데요.

그런데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달랐다고 합니다.

​호주의 그리피스 대학교에
다니던 중에 고려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서
가수로 데뷔를 했답니다.

부모님조차도 TV를
통해서 데뷔를 알았다네요.

그런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민을 갔다가 가수로
데뷔를 했기에
국적은 오스트레일리아
(호주)랍니다.

   무명의 배우
​지망생 정려원은

2004년 1동안 수차례
오디션을 봤지만
​ 계속되는 오디션 낙방에
​방황하기 시작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의 일상이 지겨워지고,
미래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 사로잡혀 주님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정려원의 고백입니다.

​ "우리 엄마가 20여 년 동안
​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기도하며
​울며 매달리던
​주님이 정말 계시다면
​ 나한테도 한 번 나타나 봐라,
 그리고 내 귀에
​ 들리게 말해 봐라"며
​ 울며 소리쳤답니다.

악에 받쳐 지쳐 있는 그녀가
​발견한 것은 먼지가 수북이
​ 쌓인 엄마의 성경책이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 행하게 하시나니
​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2:13)"

마치 그녀의 상황을 두고
​ 하는 말씀인 것 같았답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하나님께 올린
하소연의 기도에 응답이
말씀으로
"원망과 시비가 없이하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네요.

 현실은
​ 달라지지 않았고,
​또 다른 원망과 두려움이
​밀려왔다는데요.

시간이 흐르면서 정려원은
​ 이 구절의 의미를
​ 삶 속에서 조금씩 알게
되었답니다.

그 성경 구절을 이해하기 까지는
꼬박 1년 반이 걸렸답니다.

정려원을 변화시킨 것은
어머니가 놓고 가신
성경책이었지만

그의 삶을 살아오면서
어머니의 신앙의 유산을
잊을 수가 없다는데요.

어머니는 성경인물의 노아 같은
분이었답니다.

20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기도하며 울며
 하나님께 매달리셨답니다.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위의 핍박이 있었지만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셨다는데요.

어머니께서 집안의
영적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신
파워풀한 기도의
파이터였답니다.

정려원의 고백입니다.

"어렸을 때 호주로 이민 가면서
엄마는 매일 아침마다
오빠와 내게 영어로 잠언서
한 장을 쓰게 했었습니다,"

그때는 영어도 잘 모르고
성경 자체가 너무 어려워서
매일 투덜댔지만

고등학교까지 이어진
그때의 말씀을 통한
훈련에 지금은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하나님을 살아계신 주인으로
모시기보다는 그냥 아이콘
정도로 생각을 했고

교회는 늘 다녔으며
수련회, 주일학교 보조교사,
예배 때는 반주도 했지만
호주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로 밖에
보이지 않았었답니다.

정려원은 인격적을
주님을 만나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연기를 하면서 일이 잘 풀렸지만
어느 날부터 작품이 들어와서
하기 싫어지게 됩니다.

쇼핑을 해도 싫고
잠도 안 오고 사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네가 교회를 안 가도
잠을 못 잘 거다"

예배시간 7분 전인데
이렇게 기도를 했답니다.

"교회에 7분 안에 가면
계속 다닐게요,"

평소에 새벽에 가도
15분이 넘게 걸리는데
놀라운 것은 신호가
한 번도 안 걸리고
6분 안에 도착을
한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가니
찬양을 시작했고
나에게 성공도
 무의미했지만
진정한 삶이 예배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친구들조차 싫어서
잠수를 탔는데 소이 씨를
찾아갔답니다.

소이 씨가 나를 위해
기도를 방언으로 해주는데
천사같이 예쁘게 느껴지게
되었고

나도 저렇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서
미친 듯이 기도를 했답니다.

그날 저녁에 방언으로
기도를 하게 되고
이제는 주님 없이는
살수 없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답니다.

정려원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제 주위 사람들을
​ 변화시켜 주세요.
​이 나라를 바꿔 주세요"라며
​기도했다.

​하지만 주님은
​ "너 먼저 바뀌어야 하지 않겠니?"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모든 시작은
​ '나'부터 시작돼야 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라는
​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전에는 유명하고 돈 많은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답니다.

정려원의 고백입니다.

"나보다
​더 기도 많이 하는 사람,
​나보다 말씀
​더 많이 읽는 사람,
​나보다 더
​주님 일 열심히 하는
​ 사람들이 부러워요."  

촬영이 불규칙하게
하다 보면 이렇게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주님 고파,"
"이제 말씀 먹어줘야 하는데,"
하면서 인터넷으로라도
예배를 드린답니다.

   정려원은 이제 시선을
바꾸었을 뿐인데 주님의
사랑에 감사를 합니다.

정려원의 고백입니다.
​ 
"주님 감사합니다.
​인생이란 바닷속에 빠져
​목적도, 방향도 잃은 채
​ 아무 의식이나 의욕 없이
​마냥 허우적거리던
​저를 건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이
​ 저를 건져 주셨다는
​ 이유 하나만으로 저는
​ 정말 많이 변했어요.

​주님이
​ 저에게 주신 선물을
​ 제 자신만을 위해 쓰지 않고,
이 세계를 향해
​온전히 사용하게 해 주세요." 

정려원이 직접 그린 그림과
쓴 글을 통하여
"정려원의 스케치북"을
발표했는데요.

그 속에는 하나님을 떠나
예수를 종교 아이콘으로 생각하던
정려원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믿음을 갖기까지의 스토리를
담았다고 하네요.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탤런트 김혜자 씨의
 간증 글이다.

첫 임신 때 입덧을 없애려
담배를 접한 후 나도 모르게
30년 골초가 되었다.

​집에서나 방송국에서나
늘 내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오죽했으면 연예계
‘체인 스모커’를 뽑을 때
늘 1위를 차지하곤 했을까.

​나는 흡연가라기 보다는
애연가였다.

담배를 물었다 하면
필터만 남을 때까지 피웠고
폐 속 깊숙히 연기를 빨아들이며
참 맛있게 피웠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담배만은 포기할 수 없어
교회에 갈 때마다
“하나님,
이것만은 좀 봐 주세요”라고
기도하곤 했다.

​그런 내게 ‘사건’이
일어난 것은 6년 전 이맘때였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담배부터 피워 물었는데
이제껏 피던 맛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 껐다가
다시 불을 붙이기를 거듭했지만
쓰고 역겨운 맛뿐이었다.

​그날 밤 미국에 사는 딸이
전화를 했기에
“고은아, 정말 이상하다.
​담배 맛이 싫어졌어”라고
말했더니

딸이 갑자기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며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하나님이
아름답게 지어 주신 몸을
담배 따위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이렇게 빨리 들어주실 줄 몰랐어.”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담배를 피워 온 엄마에게
차마 담배를 끊으라는
말은 못하고

무려 백일 동안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새벽 기도를 다녔다는
딸아이의 말을 듣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로 담배와의
길고 긴 인연이 끊겼다.

​다행히도
금단현상은 전혀 없었다.

​누가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워도 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금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의 힘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가족의 관심과
사랑보다 더 큰 힘은 없다.

 출처: 염동권이 쓴
<영이 가난해질 때까지> 중에서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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