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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부갓네살 왕은
엄청난 규모의
금 신상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에게 강제로 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 문제로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고발을 당한다
(단 3:12).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것이
왕의 분노를 자아냈고,
결국 잡혀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지고 말았다.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단 3:20,21)

이 부분을 묵상하는데,
특히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라는 구절에
정말 중요한 영적 원리와 포인트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문을 통해 깨달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경험해야 할 변화는 무엇일까?

우리가 만들어놓은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고정관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잘 변하지 않는 굳은 생각 또는
지나치게 당연한 것처럼
알려진 생각”인데,
신앙생활 하는 우리에게도
신앙적인 고정관념들이 많다.

요한복음 11장의
마르다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마르다의 오빠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죽은 지 벌써 나흘이
되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죽은 오빠를 살려주겠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 11:39)

여기에서 마르다가 가진
고정관념, 즉 마르다가 가지고 있던
‘지나치게 당연한 것처럼
알려진 생각’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오빠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셔서
오빠의 병을 고쳐주셔야 한다,

죽으면 끝이다’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고정관념에 따라
설정된 데드라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오빠가 죽어버렸다.

이 고정관념이
너무 크다 보니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죽은 오빠를
살려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소용없는 일 하지 마세요.

우리 오빠가 죽은 지 벌써
나흘이나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이 마르다가
가진 고정관념이었다.

다니엘서 3장의 본문을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과 그 결과로
그들이 정해놓은
데드라인이 무엇이었는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는
처할지언정 던져지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는 그들이
기적적으로 건져지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이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그 세 사람은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고 말았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절대, 더 이상 희망 없음’의
상태 아닌가?

그런데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런 인간적인 고정관념,
즉 인간의 개념으로 정해놓은 데드라인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인간적인
최악의 절망의 지점,
그 마지막 데드라인인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떨어지는 그 상황에서부터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혹시 본문을 오해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일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생길 때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겠다는
기능적인 면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 잘 믿으면
풀무불에 들어가도 죽지 않는다’는
식의 기능적인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원리’를 깨우쳐주시기
위함에 있다.

본문에서
발견되는 삶의 원리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바벨론 같은
악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다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빠졌던 것 같은 좌절과 고난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

그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라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할 때
우리의 한계 때문에 생겨버린 고정관념,
즉 ‘이제 다 끝났다, 완전한 절망이다,

오빠는
벌써 죽었다’ 같은
생각들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
데드라인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한계를 긋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

믿음을 지키다가
경험하는 고난은
오히려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가 가장 중요하다.

다니엘서를 더 읽어보면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떨어졌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이 고난으로 인해 오히려
느부갓네살 왕의 인정을 받으며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위험한 불 근처에도
가지 않게 해주시고,
홍수 같은 위험도
다 막아주신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위험한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불 가운데로 지날 때도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주님의 임재가 형통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다니엘서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깨어짐으로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도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정말 우리 삶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출처:이찬수 목사의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것"중에서
[규장 출판사]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

만약 기도 없이도
진정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주님은
기도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님의 모범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시대든지
간에 교회를 지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은
기도 사역에 철저했다.

성경이
증거하는 바에 따르면,
교회의 지도자들은
탁월한 기도의 모범을
보인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있었고,
반대로
부족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기도의 능력으로
교회를 이끌었다.

그들이 교회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역에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고
대신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물러나시게 하고,

인간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일을 위해
기도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기도를 위해 일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

기도를 얼마나
세게 하느냐에 따라
일의 가치가 결정된다.

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이
침체에 빠질 뿐만 아니라,
일 자체도 망쳐버린다.

기도 없이는
어떤 일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도가 없는 일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
내미는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해
‘가장 좋은 것’을 포기한다면,

결국에는 ‘좋은 것’과
‘가장 좋은 것’을
모두 잃게 된다.

사탄의
교활한 간계에 넘어가
기도 시간을 줄이고
일하는 시간을 늘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 일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기도를 포기하거나
기도 시간을
줄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리가 너무 바빠서
더 이상 기도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너무나 손쉽게 무장해제를
당한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역자는 사역자가 아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역자는
애당초 자기의 사명을
잘못 알았거나,
아니면
그를 사역자로
부르신 하나님께
실망과 슬픔을
안겨드리는 것이다.

누군가
적절히 표현했듯이
“기도 골방에서
쟁기질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추수하지 못한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누가복음 5:16)

출처:E. M. 바운즈의
"기도의 불병거"중에서
[규장 출판사]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호주 힐송 교회의
브라이언 휴스턴 목사가
굵은 영국식 억양으로 이렇게 외쳤다.

"The best has not come yet!"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대형 강당에 참석한 청중이
그를 따라 외쳤다.

  "The best has not come yet!"

몸이 오싹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나도 외쳤다.

마음속으로는 '더 좋은 것,
아니 최고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를 되뇌었다.

2006년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
컨벤션션터에서 열렸던
아주사 거리 부흥
100주년 대회에서의 일이다.

대회 기간 동안
수많은 집회에 참석했지만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각인된 문장은 오직 하나,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다.

  더 좋은 것은
분명 빛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찬란히 빛나는 것들은
언제나 앞에,
미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토크빌이 말한 것처럼
인생의 최종 목표는
인생 저 너머에 있다.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이름 뜻은 '기쁨'이다.

한나의 이름 뜻은
'풍성한 은혜'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삶은 이름과
정반대로 슬픔과
한탄의 나날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삶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결국 나오미와
한나의 삶에
더 좋은 것들이 찾아왔다.

  지금 모든 것이
버렸다고 자탄하는가?

내게는 다시 사랑할 힘이
없다고 울부짖고 있는가?

재기의
기회마저 사라졌다며
절망하고 있는가?

그래서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지려 하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찬란히 빛나는 것은
앞에 있다.

그 빛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이태형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생명의 말씀]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인생은 큰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야구 경기에
빗대어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마지막 회가
끝날 때까지
절대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야구 경기의 묘미는
마지막 9회 말에 있습니다.

9회 말 마지막 순간까지
경기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신비로운 역전승을
종종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신화적인 야구 선수였던
요기베라는 "다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전승의 은혜란
고통으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최후에 웃는 자가 최후 승리자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도우시면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역전될 수 있습니다.

현실이 막막하더라도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우선 생각을 바꾸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역전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십시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을 변화시키십시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홈런을 날릴 수 있도록
자신을 성장시키십시오.

아직 홈런을
날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야구 경기는
9회 말로 끝나지만
인생이란 게임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마지막은 축복입니다.

역전승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최종 정착지는 천국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항상 아름다운 결론을
맺도록 도와주십니다.

출처:강준민목사
인생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하나님은 낙심하고
지쳐 쓰러진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아십니다.

공허감과 무력감으로
탈진하고
비전을 상실했다면
잠시 물러나
쉼을 누리는 것도 좋습니다.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너무 부끄러워 마십시오.

저도 힘이 듭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싸움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자신을 대견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잘 견뎌내십시오.

견딤이 있어야
쓰임이 있습니다.

출처:강준민 목사의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중에서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충전’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있는 기도를 하려면
기도생활을 멈추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고 있어야 한다.

기도가 멈추면
문제해결이 안 되고,
능력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의 능력도
멈추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기도를 멈추는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기도했다.

기도를 하는데
기도응답이 지연되고 일이 꼬일 때,
우리는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기도 한다.

이때 필요한 가장 큰 지혜는
​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한 후에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 의미는 내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합당한 그 때에 주시겠지”하는
믿음이 신앙의 발로다.

기도응답을
120년간 기다렸던 노아는
믿음으로 기도한 후에
응답을 잊고 방주를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국 노아의 방주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기도는 우리가
쓰러져 죽을 것 같아도
다시 일으켜주는 힘이 있다.

비록 지금은 기도해도
별로 진척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하나님은 당신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시기 위해
지금도 움직이고 계신다.  

출처:황은우의
"그대는 생각보다 멋지다"중에서
[터치북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신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영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공의를 펼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신 무엇보다
기분 좋은 이유는

당신을
너무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불면 행여 날아갈세라

당신을 애지중지 아끼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을 잊어도
하나님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갑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 안에 당신의 사진을 넣고
다니실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바닷가의 모래보다 많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온통
당신 생각 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냉장고가 있다면,
거기에 당신의 사진을 붙여
놓으실 것입니다.

그분께 지갑이 있다면,
그 안에 당신의 사진을
넣고 다니실 것입니다.

매년 봄마다
당신을 위해 꽃을 피우시고,
아침마다 해를 선물하십니다.

당신이 얘기하고 싶을 때면
그분은 언제든지 들으십니다.

그분은 이 우주
어느 곳에라도 계실 수 있지만,
굳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지금
그분은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하신다는 것을.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6,15)

출처:맥스 루케이도목사의
"곤고한 날의 은혜"중에서
[좋은씨앗]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괜찮아!

풍경이 있는 묵상 2022. 10. 27. 18:05

일본에
‘밤의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미즈타니 오사무라는
교사가 있었다.

그는 약물에
중독되거나
폭력 조직에 가담한
비행 청소년
5,000명가량을
찾아다니며
수렁에서 건져 냈다.

그의 저서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저, 도둑질한 적이
있어요.”
“괜찮아!”

“며칠 동안
학교에 안 가고 집에만
처박혀 있었어요.”
“괜찮아!”

“저, 본드를
마신 적이 있어요.”
“괜찮아!”

“…저, 죽어버리고
싶어요.”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어제까지의 일들은
전부 괜찮아.

하지만 절대로
목숨을 버리면
안 된다.”

그의
“괜찮아!”라는
짧은 말에는
용서와 이해,
사랑과 기대가
담겨 있었다.

아이들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켜봐 주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버리는 것만은
절대 못하게 했다.

그를 통해
용기를 얻은
아이들은
사회의 편견을 이겨 내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지난 시간의 잘못은
흘러간 흔적이 되었고
새 삶의 싹을
틔울 수 있었다.

하나님은
어떤 선생님이나 위인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신다.

세상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잘못까지도
품어 주신다.

그러나 오직
그분의 곁을 떠나는 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하신다.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분께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괜찮아!”라고 말씀하시며
그 품에 안아 주실 것이다.

출처:김학중 목사의
"좋은 사람 좋은 사랑"중에서
[넥서스 CROSS 출판사]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