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리더 :: '가수' 태그의 글 목록

1990년 가요계에
데뷔하여
 '사랑일 뿐야', '입영열차 안에서',
'휴식 같은 친구' 등의 히트곡을
남겼으며

2015년에는
 JTBC ‘슈가맨',
2017년도에는
 MBC '복면가왕'에 출연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이제는
수입 자동차 딜러의
영업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대경대학 자동차 딜러학과
겸임교수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김민우 집사를 소개합니다.

1990년대 연달아
 히트곡을 내며
시상식마다 신인상을 휩쓸며
사랑을 받았으나

하지만
갑작스러운 군 입대 이후
컴백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에
밀리게 되었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녹음실을 만들었는데
불이 나서 모든 것을 잃었으며

IMF까지 와서 결국
새로운 수입차 딜러로
생활을 시작했답니다.
 
또 한 번의 큰 시련이
닥쳐 왔는데요.

2009년 결혼한
6세 연하의 부인이
희귀난치성 질환의 일종인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으로

한달만에
세상을 떠난 슬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인생을 접고
밑바닥까지 간
김민우를 있게 한
두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천국에
먼저 가신
기도하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아내의
믿음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답니다.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음악을 좋아하는
형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고등학교 방송부 친구인
가수 윤종신과 밴드부도
결성하면서 음악의
길로 시작하게 됩니다.

데뷔를 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지만
사실은 1990년 5월에 데뷔해서
1900년 8월에 입대를 했으므로

3개월 가수 생활한 모습을
30년 가까이 대중들이
잊지 않고 있답니다.

골든 글러브상을
받고 군대를 다녀와도
팬들이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하고 가게 된 것입니다.

군대를 제대 후
밤업소를 다니면서
돈을 모아서 녹음실을
투자해서 좋았는데

세입자분이 가스를
폭파시켜서
녹음실이 불이 나서
전 재산을 잃게 되었답니다.

김민우 집사의 배후에는
새벽 기도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날마다 기도하시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원래 집안이 유교 집안이며
절에 다니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사업 실패 후에
심장 협심증이 와서
집안이 어려움이 왔답니다.

그런데
이웃집의 전도로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시게 되었고

김민우 집사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다니게 되었답니다.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는
환경 속에서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김민우 집사는
 고등학교까지는
신앙생활을 했지만

20대 가수 생활 후에
사회에서 방황하게 되었고
녹음실이 불이 나고
가진 것을 다 잃게 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답니다.

이제 살 소망을 잃어버려
집에 있는 수면제를 먹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날 몸은
굳었는데 정신을 다시
돌아와서 밖에 나와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주님 저는 너무 갈급하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주님만이 아시오니
저의 길을 열어주십시요."
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어떤 일이고 좋다."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했답니다.

아는 후배가 전화가 와서
"수입차 사장님에게
형 이야기를 했더니
만나고 싶다고 했답니다."

다음날 아버지에게
이렇게 부탁했답니다.

"아버지
이제는 자동차 딜러를
시작하려고 하니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그런데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셨답니다.

1년간의 수습을 훈련을
통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또 한 번의
큰 시련이 오게 됩니다.

김민우 집사의 아내를
천국에 보내게 됩니다.

아내를 만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고객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아내는
교회 성가대와
다른 회사의 비서로
있었으며

2009년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구역장까지
할 정도로 헌신하는
아내였답니다.

어느 날 아내가
피부에 트러블이 생겼으며
병원에서도 원인불명이었고

큰 병원에서 골수 검사를
했는데
"혈구 탐식성 림프 증후군"
이라고 하였고
1주일 사이에 급속도로
전이되었답니다.

아버지가
 천국에 가실 때에
아내와 한 약속이
 있었는데요.

"우리 둘 중에 누가 먼저
주님 곁에 가더라도
딸 민정이에게는
믿음을 남겨주자"라고
했었답니다.

주일예배 때에
아내를 살려 달라고
그렇게 울었답니다.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일하실 때는
더 큰 사랑과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한달만에
아내가 주님 곁을
가게 되었는데

아내가 좋아하는 찬양이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늘 불렀고

꿈이 있었는데
교회 근처로 이사를 가서
세 식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자고 했었답니다.

김민우 집사가
주님 곁으로 먼저 간
아내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한혜남 집사
아직도 많이 생각이 나고
힘든데 지금 많이 좋아지고 있고

새집으로 이사를 해서
집에 딸을 도와주시는 분이
와서 돌아주기도 해

항상 하늘나라에서도
우리 아버지랑 같이
우리를 위해서 많이
좋은 기도해주고

나 지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우리 나중에
주님 나라에서 만나자."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캐나다에
처음 이민 와서 만난 분 중,
12년 전 내가 이곳에
콘서트 겸 왔을 때의
조하문을 기억하는 분을
만나 뵌 적이 있다.

그분은 내가 가수였을 때
나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다녔다고 하셨다.

난 그분에게 “집사님,
집사님이 생각하시는
​ 10년 전 조하문은
1997년 9월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조하문은
이름만 같을 뿐입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제야 비로소
얼굴 표정이 풀리셨다.

그분은 아마
옛날의 나를 기억하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되었나’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세월이 지날수록,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옛사람의 죽음을 분명하게
포함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주님을 만나고 난
나는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기 위해
그동안 알고 있던 분들을
많이 찾아 다녔다.

그 중에는 당시 내가 운영하던
사업장의 직원들도 있었다.

동일하게
용서를 구하는 과정에서
직원들 중에는
내 달라진 모습을 보고
교회에 출석하는 분이 생기기도 했다.

사업과 음악을 가진 채
만난 예수님은
결국 나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셨고
한참 동안 조용히
혼자 있게 하셨다.

그리고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게 하셨다.

계속되는 훈련 속에서
주의 도구로 만드신 것이다.

극장 사업 이후
내가 손대고 있던 사업을
그만 둔 것도 망해서가 아니라,
신학을 시작하고 보니
두 가지를 동시에
섬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 ’돈’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었고
그로 인해 스스로
폐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손을 잡고 동행하면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지난 9년간 나에게
문제된 것들이 있다면
가끔 그분보다
앞질러 가거나 나의 생각을
그분 생각이라고 우긴 경우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분은 내게 평안을 주셨다.

출처:조하문이 쓴
<내 아픔을 아시는 당신께>
​중에서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1982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뒤
가요계에 데뷔했으며

대표곡으로
"문밖에 있는 그대",
"장난감 병정",
"내일을 기다려" 등이 있는
라이브의 황제라고 불리는
가수 박강성 씨를 소개합니다.

요즘은 7080의 아이콘으로
불리기도 하죠

 그 당시에는
탁월한 가창력에 대한
찬사가 대단했지만
 대중적 인기로
연결되지 않았다.

화려하게 20대 초반에
데뷔했지만
슬럼프에 빠져들게 됩니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으며
알코올에 의지했답니다.

다른 친구 가수들은
"다른 가수들은 다 되는데
왜 너만 안 되니?"

그 말을 들으면 너무 힘들었답니다.

가슴속 슬픔, 외로움, 아픔,
절망감 등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이런 마음이 들었답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을까?"

주 2회 음주와
​하루에 4갑 정도의
담배를 피우면서
날마다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

이강성씨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여자가 있었는데
지금의 아내입니다.

박강성씨의
 노래가 너무 좋아
그의 무대를 쫓아다니다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분은 박강성씨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박강성씨를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신앙밖에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박강성 씨에게
 하나님을 제시했지만
예상대로 박강성씨는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다.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박강성씨에게
 여자는 물었습니다

“박강성 씨, 행복하세요?”

"지금까지 자기 방법대로
운전하며 살아왔는데도
불행하다면 한 번만
맡겨 보는 것 게 어때요?"

무덤덤한 박강성씨를 향해
한마디를 더 했다.

“하나님을 알면
행복해진답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

지금껏 살면서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답니다 .

자기와는
워낙 무관한 것이었다.

한데 하나님이
행복하게 해준다고 하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교회에 가게 됩니다.

전화를 걸어서 그 자매에게
교회를 어디로 가면 좋겠는가를
물어서 가게 됩니다.

두 달을 다녀봤지만 너무 힘들고
역시 자기와는 딴 세상이었답니다.

그때 그 여성팬인 자매가
"오빠는 금식 기도원을 가야
할 것 같네요."라고 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3일 금식을 작정하고
경기도 청평의
기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처음 갈 때는 주여 삼창과
방언을 하는데 이상했지만
그분들의 표정을 보니
달랐답니다.

마지막 날 내면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느껴진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사실 기도도 할 줄 모르고
하니 "죄송한데요
하나님 계시면 보여주세요."

 3일이 지난 후에
마지막에 금식하면서
지쳐있고 옷 하나를
3일까지 입기도 했답니다.

금식 기도원에서 목사님이
방에 오셨는데 응답받으셨냐고
하는데 너무 화가 나서
이렇게 목사님께 질문했답니다.

"왜 하나님은 차별을 하시나요
저에게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네요."

그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분명히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하신 말씀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있었답니다.

"주께 맡겨라"

3일 동안 계속적인
말씀이었답니다.

그래서 맡아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시는데
그때 목사님의 음성을 통해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내가 널 사랑한다.”
목놓아 울었습니다.

아직까지 혼자서
너무 힘들고 외로웠는데
주님이 사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때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30년 넘게
차곡차곡쟁여놓은
설움과 아픔을 한 번에 털어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
이강성씨의 생활은
 180도 바뀌었다.

그리고 영상으로 보여주시는데
어두운 터널 끝에서 자신이
서있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이제 나의 삶이 시작되는구나"
"혹시 저를 구원해 주셨다면
저를 좀 써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들려오게 되고

이제는 그 자매와
대화가 통하게 되었고
 98년 자신에게 하나님을
알려준 여자와 결혼하게 됩니다.

은혜받았던 기도원으로
이사를 가서 그 밑에서
카페를 운영하면서

매일 기도원에 출퇴근하며
기도하면서 2년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박강성씨를
찾게 됩니다.

미사리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노래하다가
문득 이런 물음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너는 왜 노래하니
네가 지금까지 너를 위해서
노래했을 때 행복했니?"

그 말씀을 듣고 보니
행복하지는 못한 것이지요.

그때 또 하신 말씀이
"이젠 나를 위해 노래를
해야 하지 않겠니?"

사실 그때는 거부 반응이
오게 됩니다.

이제 좀 가수로써 뜨려고
하는데 어떻게 복음가수가
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30년 만에 노래하는 관중을
쳐다보는데
다시 이런 말씀을 주신 것이지요.

"너는 나를 만나서
행복하지만
저들은 나를 몰라서
 불쌍하고 힘들어한단다"

이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무대에서 노래하는데
목숨을 내걸고 하게 되었답니다.

노래를 하면서 듣는 이들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가수 김건모와 함께 춤을 추던
핑계 걸로 콜라의 멤버로
활동했던 김송 씨는

화려한 춤꾼이자 가수인
그녀가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수 강원래와 결혼을
합니다.

원래의 꿈이 현모양처였기에
당연히 남편 닮은 예쁜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자
했답니다.

결혼을 하면 불행은
끝나고 행복이 시작이
될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화려한 인생을
지내던 남편 강원래 씨의
사고로 인생에 먹구름이
오게 되는데요.

결혼 후 3개월이 지난
2000년 12월 9일 날
어머님께 용돈 드리러
강원래 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불법 유턴하던 차에
부딪치게 되어서
전신마비가 오게 됩니다.

이제 주위 분들이 이젠
너의 인생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하물며 클론의 구준협씨
까지도 새 인생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을
믿기 전이기에 자신이
다 할수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현실의
무게는 힘들었답니다.

남들은 그런 남편을 돌보아주는
아내를 날개 없는 천사라고 하지만
그녀는 날마다 남편을 원망하며
싸웠다고 합니다.

“밖에다 대고는
‘저희 잘 살고 있다’고 웃었지만
안은 매일 전쟁이었어요.”

 남편의 간병을
감당하기는 했지만
입으로는 심한 욕설,
심지어 장애인을
비하하는 욕도 서슴지
않았답니다.

“너는 바람피워
천벌받았지만
나는 왜 네 똥 치우며
살아야 해!”라는
말은 일과였답니다.

저녁이면 화장하고
남편에게 당당하게
“나 클럽 가”라며 나가
밤새 춤추기도 했답니다.

 새벽에 돌아와
남편의 자는 모습을 보면
미칠 듯한 마음에
통곡을 했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원망이 되었답니다.

세간의 이목이
두려워 이혼할 수도
없었고

그러는 동안 위에
궤양이 18개나 생겼고
인터넷 게임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전도를 하면
싫다고 했답니다.

이혼하고 해외로
나갈 생각만 했답니다.

그런
고난과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호주에서 재혼해
사시던 어머니를 만나러
김 씨를 비롯한
4남매가 여행을 간 그날
어머니가 병원에서
뇌종양 판정을 받게 됩니다.

가족들이
 망연자실해 있는 사이
호주인인 새아버지가
수소문해 한인 목사를
불렀답니다.

그를 본
어머니는 처음에는
“누가 부르라고 했어!”라고
악을 쓰며 거부했지만
 10분도 지나지 않아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엎드려 통곡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회개 기도와 감사 기도를
하면서 어머니께서
우시는 것입니다.

김송 씨의 고백입니다.

“어머니는 본래
독실한 크리스천이셨어요.
구역장에 전도왕이셨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성경 읽고 찬송하고
방언으로 기도하던
어머니 생각이 날
정도였어요.”

그런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결혼 생활이
 결국 실패로 끝나자

“남을 위해 해준 기도는
모두 응답받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라며
타종교로 개종해 버렸답니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전도하는 사람에게
소금을 뿌릴 정도로
교회를 증오했던
김 씨인지라 어머니의
회심에 충격이 컸는데요.

어머니는 결국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매일 눈물을 흘리며
감사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께 전화를 해서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김송의 고백입니다.

“가장 놀라웠던 건
아버지와 새어머니,
고모들과 결코
화해하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거짓말처럼 관계가
회복됐다는 거예요.

그 과정을 옆에서 보니
저절로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구나’
하는 말이 나왔어요.” 

김송 씨가 성장기에
입은 상처가 치유가
되어가기 시작했으며

아버지와 새어머니
고모의 관계가 회복되고
서울 대치동에 있는
우리들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김송의 고백입니다.

“그전까지는
제가 죄인인 줄 몰랐어요.
‘나처럼 착한
사람이 어디 있어’ 했죠.

죄를 깨닫고 보니
남편과의 모든
싸움의 원인이 저였어요.

그 후
집안에 전쟁이 그쳤죠.

내 불행의 원흉이었던
남편이 이제는 한없이 고마워요.

나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 수고해 준 사람이니까요.” 

김송 씨는 친구 언니가
고등학교 때에 전도를 하려고
했는데 거부했었답니다.

나중에 다시 그 언니가 전도를
해서 우리들 교회에 가게 되었답니다.

처음 교회를 가기 전에는
자신이 피해자이고
남편과 시어머니가 미웠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죄인이고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데
예수님을 핍박한 바울이었는데
이제는 남편을 우상으로
여긴 나 때문인 것을 깨 닫았답니다.

그리고 드디어
불가능하다는 김송 씨 가정에
8번의 시험관의 시도 끝에
자녀를 허락하셨답니다.

인공수정에 7번의 실패를
하고 포기를 했는데

포기한지 5년 만에 남편이
다시 시도를 해보자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날 김송 씨가
읽고 있던 성경 말씀이
있었답니다.

에스겔 36장 12절의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라는
말씀을 묵상했다는 데요.

김송 씨는
그 말씀을 통해서
"다시는 유산되지
않게 한다는 말씀으로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결혼 10주년 되는 날
병원에서 시험관 아기
1차 피검사 성공했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답니다.

이젠 아들을 위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데요.

아이가 살면서 마주치게 될
힘든 일 괴로운 일도
하나님에게 의지하며
감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답니다.

이전에는 몸이 불편한
남편과 평생을
어떻게 살지라며
원망했지만

"지금은 남편이
저의 십자가입니다"
라고 고백한답니다

친한 언니인 가수
박미경 씨도 김송 씨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데요.

김송 씨의 고백입니다.

"언니가
몇 번 교회 얘길 꺼냈었는데
선뜻 권유를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믿음은 강제가
아니고 선물이니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거죠.

결국 하나님이
미경 언니를 인도해 주셨어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용서한 사람들을 언니에게 얘기하며
우리는 서로 안고 한참을 울었어요."

김송 씨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욥기서 23장 10절 말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아시나요" "슬픈 영혼식"
"너의 곁으로"등
발라드의 황태자로
불리는 조성모 씨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조성모 집사님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니
감사할 뿐이네요.

조성모 집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크리스천이라고 고백하는 게
왜 힘든 일일까?"

"오히려 자부심을 가지고
들어내야지 순간적으로
머뭇거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먼저
 조성모 집사님의
20주년을 맞이하여
활동했던 모습을 잠깐 나누고
신앙고백을 나누도록 할게요.

1998년 9월에 
조성모의 데뷔 앨범을
발매했지만
공식 데뷔 무대는
하지 않고
뮤직 비디오"To Heaven"을
광고하면서
인기를 누리게
되었는데요.

사람들이
얼굴 없는 가수로
방송에 출연을 하지
않으니
 목소리에 비해
 얼굴이 딸리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가졌지만

하지만 한 달 뒤
이소라의 프러포즈에
출연하면서
외모까지 받쳐준다는 것이
알려졌고,
 풋풋한 얼굴과 목소리를
무기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그 해
최고의 신인가수가
됩니다.

1999년 9월 9일
 발매된 정규 2집 앨범
 타이틀곡은 슬픈 영혼식은
  총 판매량 2,047,152장으로,
그 해 KBS, MBC, 서울가요대상,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현제 조성모 집사님이
교회에서 찬양 감독으로
하나님께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찬양인도하면서
이렇게 고백한답니다.

"저는 오늘 그리스도의 편지로
온 조성모입니다"라고
시작한답니다.

"하나님께서
많이 사랑한답니다."

그럼 많은 성도님들이
감동하시며
기뻐한다고 합니다.

20주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만 받으려고만 했지
드릴 기회가 없었기에
"Thanksgiving"이라는
이름으로 CCM 클래식
앨범을 발표했답니다.

조성모 집사님은 처음부터
가수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작가가 꿈이었지만 이것으로는
먹고살기 힘들 것 같아서
가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에서 수학여행에서
장기자랑을 하면서 노래를 하는데
인기스타로 떠오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인도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조성모 집사님이
 처음
예수 믿게 된 계기가
있었답니다.

원래 불교 집안이었기에
​주위에 어느 누구도
교회와 예수님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전국에서 1등을
한다는 친구가 전학을
오게 됩니다.

그런데 목사님 아들이었고
그 친구가 전도를 하게 됩니다.

조성모 집사님이 학교 끝나고는
그 친구에게 "나와 오락실 가지고
하니까"
그 친구가 하는 말
"네가 주일날 교회에 온다면
같이 오락실 갈게"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게 되었고
사람들이 반갑게 환영해주고
따뜻하게 맞아주고 교회 선생님이
떡볶이도 사주고 좋았답니다.

목사님 아들
친구가 테이프를
선물해주었고 찬양사역자
송정미사모의
찬양이었답니다.

찬양을 처음으로 들으며
눈물을 흘리게 되었고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
들으면서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결국 찬양을 품고
가수까지 가게 됩니다.

가수로써 정상까지 갔지만
예배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이
가장 힘들었답니다.

4년 동안 한 번도 쉴 수가 없었기에
영혼의 힘을 얻을 곳이 없었고
슬럼프가 오게 되었습니다.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답니다.

다시 예배를 회복하게 된
시기가 3집 앨범
"아시나요"활동 당시에
 
차에 타고 있는 불안정한
조성모 집사를 발견한
친척 형이 무조건 예배 자리로
데리고 가고자 했답니다.

그 후로 무조건 예배를
가게 되었답니다.

조성모 집사님의
아들이 아플 때에
"내가 아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예수님이 왜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가를
깨닫게 되었답니다.

조성모 집사님은 이렇게
기도한답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는 곳에
가기 원합니다."라고
고백한답니다.

지금 현제 출석하고 있는
교회는 "가시나무"원곡을
부르는 가수 하덕규 목사님의
권유로 핑클 이진, 배우 조인성이
속해있는 ♡♡교회에
다닌다고 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가수 이지훈을
소개하려면 너무 다방면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서
겸손하면서도열심이 하는
예수님을 믿는 청년이라고
말하고 싶다.

가수이면서 드라마와
뮤지컬 그리고
이번에 복면가왕에 나와서
김장군으로 놀라운 노래 실력을
드러내는 실력자가
확실한것 같네요.

모태 신앙이기도 하는데
 방언도 초등학교
4학년 때 받았고
어렸을 때부터 뜨겁게
하나님을 믿었답니다.

1996년에 발라드가수로
18살때부터 데뷔해서
부,명예,인기등
 많은것을 얻었습니다.

인기를 얻다보니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세상은 냉정했고
내인기는 시들게 되고
좌절하면서 방황하고
방탕하고 술로 보내고
어둠의 시기를 지나게 됩니다.

귀공자 같은 스타일에
여심을 자극하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자신이 너무 자만하다가
큰 시련이 오면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는데요.

3집 앨범 때 어깨를 다쳐서
 군대 면제 판정을
받았는데 곱지 않는 시선으로
힘들었는데 폭력과 사기 사건에도
몰리면서 거의 절망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계속 연예계
생활을 해야 하나 많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고통의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기도하라는 말씀이시구나!"

그에게 고난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되었고
깊은 교제와 기도모임으로
더욱 굳건한 믿음을
회복하게 됩니다.

 결혼한 누나가
손을 내밀어 주어서
누나가 다니는 교회로
옮기게 되면서
기도가 회복되게 됩니다.

이 생활을 2년동안 하면서
내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니
세상과의 관계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빨리 응답이 없지만
감사가 되고
드라마와 뮤지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마음속에서
무조건 형통한 것이 잘된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것이
축복이구나라고 깨닭고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지훈씨는 이런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다 예비해 놓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지 못하시니
 주시지 못하신답니다."


​신앙적으로
한층 성숙해진 그는
 ‘연예인 전도사’답게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전도’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내놓았다.

“불신자를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가
잠시 신앙을 멀리한 이들,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상처를 안고
쓰러져가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저는 그들을 먼저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옆에서
성령을 체험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함께
나누는 게 전도의 열매입니다.”

이런 소신을
가진 이지훈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가수
이수영에게 신앙을
되찾아주었다.

방송활동을 하면서
교회를 한두번 빠지기
시작한 이수영이
신앙상담을 해왔고
함께 금요철야예배에
기도모임에서 함께 하기도
했답니다.

지금 자라는 다음세대에게
자신은 꿈이 없이 살아온것
같다는 데요.

"가장 중요한 것은
멘토가 중요한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섬기는
목사님이 저의 멘토가 되십니다."

대화단절과 맞벌이 하면서
자녀들이 홀로
있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영혼한 멘토는
예수님이시지만
그가 어려울때
누님을 통해서 담임목사님을
만나게 되고 이젠 주위사람들을
전도하고 섬기는 멘토가 된것처럼

우리들도 내주위의
멘토가 되어서 참 섬기는
전도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축복의 사람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가수 알리
(​본명 조용진 )는

​2003년 리쌍 3집의 수록곡
<내가 웃는 게 아니야> 등의
곡의 피처링에 참여하면서
데뷔했다.

불후의 명곡에서
단독으로 열 번의 우승과
최고 동점까지 한
숨겨진 실력자라고
알려져 있답니다.

알리의 아버지는
문화일보 산하의 IT 전문
신문인 디지털 타임스의
대표이사 사장인
조명식씨이며

2012년 말 대표이사로
재 선임되었답니다.

처음 신앙생활은 
초등학교 때 친구 따라서
충현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그 당시에
어머니가 불교였기에
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중에
어머니가 예수를 믿게 되면서
다시 다니게 되었고

고3 때 성가대 하면서
찬양을 통해서 신앙이
자라게 되었답니다.

대학교 때에 끝까지 술을
마실 정도였지만
그 다음날에는
교회에 반주하러 가기도
했답니다.

2011년에는
서울종합예술전문학교
실용음악예술학부 겸임교수로써
가르치기도 합 답니다.

원래 아버지께서 노래대회를
나가면 상을 받을 만큼
노래를 잘하였고

통기타를 가지고 다녔지만
장남이어서 가수의 꿈을
접었다고 합니다.

알리는 어릴 때부터
김완선의 "피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와 나미의
"빙글 빙글"을 흥얼거리고
다닐 정도였다네요.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친구로 왕따를 당하면서
내성적으로 변했고
우울증과 조울증 증세도
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판소리를 초등학교 3학년 때
배우다가 왕따 때문에
더 판소리에 몰입했는데

알리의 숨겨진 진실하면서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판소리로 다듬어진 것
같다고 합니다.

알리는 국악중학교를 진학
하려고 했지만 부모님이
반대하셨기에

일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진학했는데 음악이 너무 좋아서
중학교 때는 사물 놀이패를
고등학교 때는 관현악단에서
바이올린을 했고

고3 때는 실용음악학원을
다니게 됩니다.

이후에 하이 서울 페스티벌과
강남구청 등에서 각종 상을
휩쓸면서 실력을 입증받고
부모님으로부터 허락을
받게 됩니다.

대학교 때는 재즈를 했으나
어느 날 피처링으로 다른
가수들의(휘성, 거미)
 노래에 참여를 하면서
대중가수로 첫걸음을
걷게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리쌍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발레리노"에 참여하면서
힙합 음악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알리의 예명은 복싱선수
"무하마드 알리"에서 유래가
되었는데 원래는 타이슨이
였는데 리쌍의 길 오빠가
타이슨을 지어주었답니다.

그런데 알리는 복싱선수의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처럼
대중에게 기억되고 싶어서
알리로 바꾸었답니다.

알리는 자신의 신앙의
근원은 아침마다 드리는
큐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알리의 고백입니다.

“힐링을 드리기 위해서
저 스스로는 큐티
(성경 묵상)를 한다”라며

 “아침마다
큐티를 하지 않으면
하루가 엄청 흔들린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또 고백합니다.

“제가 많이
나약해서 말씀이 없으면
흔들리는 제 모습을 발견해요.

알리는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이 담기기를 소망하고
있는데요.

알리의 고백입니다.

 “제 목소리와 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며

“말하지 않아도 내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노래를 통해) 느껴지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가장 큰 꿈”이라고 했습니다.  

 이웃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하려면
말씀으로 저를 먼저
 채우는 게 정답인 것 같아요.

 지키기 힘들지만
매일 큐티를 열심히 하는 게
저의 힐링법입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히야, 마지막 콘서트,
비와 당신의 이야기
소녀시대,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네버엔딩 스토리, 인연 등
우리들의 가슴속에 따뜻한
노래를 전하고 있는
이승철 씨가 지금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교편을 잡은
어머니 밑에서 엄하게 자랐지만
 고2 때인 1983년
그룹사운드 '봉랑제'에서
대상을 타며
가수 데뷔를 꿈꾸게 됩니다.
 
당시 같은
동네 막역한 형이었던
김태원의 녹음실에 놀러 다니면서
 김종서의 후임 보컬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다가
어머니 봉급 1년 치를 가져다가
 팀에 악기를 증정한 뒤 보컬이 
발탁됩니다. 

2년 뒤인 1985년
둘은 그룹 부활을 결성하고
 '희야'와 '비 와 당신의 이야기'를
연거푸 히트시키며
2장의 앨범을 냈으나

김태원이
대마초 사건에 휘말리면서
이승철은 팀을 탈퇴하고
솔로로 전향하여
인기를 누렸지만

그러나 가수 인생에
가장 후회를 한다는
대마초 사건과
톱스타와의 결혼과 이혼

어두운 터널을 지나기까지
16년이라는 시간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의 아내 박현정 씨를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면서

인새의 중대한 터닝 포인트가
되는 내조와 더불어
​아내의 기도와 헌신으로
예수님께 한 걸음씩 다가가게
되었답니다.

이승철 씨는 불교의 신자이었고
아내와 결혼 때도 점을 보고
했을 정도이었고

 새 앨범이 나오면
제일 먼저 주시 스님께
선물할 정도였답니다.

하지만 아내와의 절충으로
천주교에 다니게 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딸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아내의 권면으로
기독교로 바뀌게 되었고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지상파의 한 방송에서
아내와 함께 새벽 기도를
다니는 이승철의 모습은

그동안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라
관심을 끌었는데,

그는 10여 년 전
지금의 아내와
새 가정을 꾸린 뒤부터
교회를 나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답니다.

이승철 씨의 고백입니다.

 “집 근처에 교회가 있어
아침마다 새벽 기도를 하러 갑니다.

“교회에 가서 가볍게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질까 해서
나가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승철 씨는 아내 박현정 씨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고
 늘 조용히 옆을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이라고
감사하다고 합니다. 
​ 
이승철 씨의 고백입니다.

“정신적인 위안이 되고
안식처가 되어 주는 부분이
아내에게 가장 고마워요”
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승철씨가
새벽 기도 나갈 때마다
느끼는 뿌듯함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아끼던 피아노를
새벽 기도 나가는 교회에
기증한 일입니다. 
 
​이승철씨의 고백입니다.

“교회에 기증한
피아노로 많은 곡들을 만들었습니다.
네버엔딩 스토리, 인연 등
저를 대표하는 많은 발라드 노래들을
전부 이 피아노로 녹음했습니다. ”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이승철은 "한혜진과 같은
교회에 다닌다"라고 했는데요.
 
"엄정화 한혜진이
주보를 나눠주고
내가 주차 사역을 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승철은 자신이
A형이라서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
그전에는
울컥 치솟는 화를 이기지 못해
스태프들에게
육두문자를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더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상대를 배려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승철씨와 아내는
국제구호개발 NGO 굿네이버스와 함께
 아프리카 최빈국 차드에 학교를 건립,
가난으로 꿈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는데요.

10년간 30여억 원을 기부해
 아프리카에 10개의
‘희망학교’를 짓기로 했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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