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리더 :: '간증 모음/일반인' 카테고리의 글 목록 (3 Page)

유명한 부흥사이자 성북교회
담임인 이태희 목사이며
​자녀를 1남 1녀 두고 있는
이금자 사모가 [나의 하나님,
기적의 마스터 키, 기도]라고
하는 책을 쓰셨습니다.

 사모님이 무당의 딸로
태어나신 거예요.
그런데 무당집에 15남매 중
여덟 번째로 태어났어요.

 여덟 번째로 태어났는데
일곱 살 때 친구를
따라서 교회를 갑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집에서
핍박이 심한지 너 때문에
무당집 망하게 되었다고
막 오빠를 시켜서 딸을
우물에 던지기도 하고

삽을 휘둘러서
허리를 부러지게 하고
독한 약을 먹여서
죽이려고 하기도 하고
 그래서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이모의 집으로 피신을 시킵니다.

서울에 와서 이모 친구의
수양딸이 되면서
이제 생활하다가
점점 생활이 좀 나아지니까
세상 재미에 빠져가지고
사업에 투자를 했는데
그 사업체에 불이 나서
 전 재산을 다 날렸어요.

“이렇게 살아 무엇 하나?”
절망해서 수면제를 사들고
이제 자살하려고 거리를 나섰는데
서대문 로터리에
찬송소리가 들리는 교회가 있어서
쑥 들어간 것이
여의도 순복음 교회입니다.

 그때 목사님이 강단에서
 마태복음 7장 7절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 말씀 붙잡고 눈물,
콧물 흘리는 가운데
성령이 임해가지고
성령 받고 방언 말하고
하나님 은혜 가운데
아주 성령 충만한
주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다니고
전도사 사역을 하다가
이태희 목사님을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1982년,
이태희 목사님이
‘간경화’로 쓰러지는데,
두 달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삼각산에 올라가서
‘20일’ 동안 부르짖어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다 하나님
은혜로 목사님이
다시 건강해 지셔서

지금까지도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전 세계를 다니며
많은 집회를
인도하고 계시고,
본인의 무당 어머니와 
15명의 형제를 40년 동안
기도해서 다 전도했어요.

40년 동안 온 가족,
더군다나 무당 집에,
가족도 많아, 15명의 자녀.
그런 집 한 집을 전도하면
대거 부대가 오는 거예요.

목사님의 사모님이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호텔 총지배인은
‘모든 방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이 깜빡 잊고
키를 놓고 방에서 나왔을 때,
내 힘으로 방문을 열 수 없지만,
지배인에게 부탁하면
잠긴 방문을
마스터키로 열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늘을 여는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즉, 기도할 때에,
‘모든 문을 여시는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스터키’를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은혜와 복,
감사와 평안을 만드는
기적의 열쇠입니다.
‘응답의 마스터키’를 활용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금자사모님은
​현재 평택대학교 이사,
개신교선교훈련원 이사,
한국난정필회 이사를 맡고 계시고,
또 1978년부터 사모들을 위한
응답기도회를 설립, 회장으로
모임을 이끌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모든 문을 여시는
마스터키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늘부터
활용하시어
하늘를 여는 축복의
예수 증인되시기를
 원합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예레미야29:12)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약할 때 강함 되시네",
주를 향한 나의 사랑을,
"주님 말씀하시면", 등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되고 있는 
주옥같은 찬양을 부른 사람,

현재는 사랑의 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찬양사역자 조수아 씨를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본명은 방혜령이며
조수아가 본명은 아니지만
여호수아의 영어식 발음
조슈아(Joshua)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꾸게 된
이유가 있다는 데요.

가나안을 정탐하러 갔던
여호수아의 적극적인 모습을
담고 싶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늘 기쁘고
즐겁고 힘 있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깊은
뜻이 있답니다. ​

또 하나
특별한 조합인데요.

남편 되시는 분은
판소리를 하시는
최용석 님이시고요.

찬양과 판소리의
만남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랍니다. ​

 1995년 CCM 그룹
‘마르지 않는 샘’의 멤버로
CBS 창작복음성가제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데뷔했습니다.

2000년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실력과 대중성을 겸비한 
CCM 계 대표
여성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조수아 씨는
 모태신앙으로
경찰 공무원을 하다가
헌신한 아버지를 비롯해, 
어머니, 오빠 모두 목회자인데요.

매일 가정예배가 있었고
매일 성경을 읽어야 했고

어머님이 처음으로
목사 안수를 받으셨고

아버지도 나중에
2호 목사로 안수 받으시고
그다음에 오빠도
목사 안수를 받게 됩니다.

조수아 씨가
신앙고백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한 친구가 신앙이
좋아서 날마다 감사와
기쁨이 넘쳐서
내심 너무 부러워서
속으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2년을 기도한 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지은 분의 강의가 끝나고
찬양과 기도를 하는데
본인도 모르게 방언과
 은혜의 파도가
넘치게 됩니다.

그 후로 새롭게 삶이
바뀌게 되었답니다.

그 후로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지금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누리게 됩니다.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노래와
반주를 한 그녀는
노래에 재능을 보였지만,
꿈은 연기자였다.

그런데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열리는 길은
연기가 아닌, 노래. 

항상 자신의 뜻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노래했던 삶이기에
소명이나 기쁨은 없었다.  

우연히 참가한 CBS
창작복음성가제에서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이름으로
금상을 받고,
몇 년 동안 찬양사역을
하면서도 그랬다.  

같이 사역을 했던 분들은
음반을 내는데

본인들은 어느 누구도
불러주지 않아서
낙심하고 있다가

1997년 3월에
마르지 않는 샘으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1년을 사역하였지만
그때도 집에 올 때에는
공허함이 있었답니다.

노래보다는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1999년 2월에
팀에서 탈퇴를 하고
사역을 그만두게 됩니다.

이제 새로운 길을
가고자 했지만
다른 길이 열리지 않았고

그때 친구하고 살면서
하루를 시편으로 시작을 했고
하루 종일 고민을 하면서
한 달이 지나게 됩니다.

다시 사람들이
찬양을 하라고 했지만
확신이 없었는데
어떤 분이 음반을
만들고 싶다는 제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솔로 음반의 시작을
하게 되면서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사람을 감동시키려면
아픔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셨답니다.

그때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는다면
많은 사역자를 붙여주세요"
라고 기도했는데
그대로 응답이 됩니다.

첫 번째 음반을 내고
사람들에게도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진정 노래가 알려지지는
않았고
본인 나름은 유명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2집을 만들었지만
별로 좋지 않았고
그만두고 싶은데

벌써 3집을 내게 됩니다.

이 3집은 특별하게
만들자고 의견을 내놓는데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사람들이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그런 테마로 하자고 합니다.

준비하는 중에
어느 교회에 초대로
특송을 하는데

사람들이 서로 따로따로
앉아있는 것을 보면서
교회가 서로 다툼이
있어서 힘들다고 하는
사연을 듣게 되면서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때 청년들이 헌금을
가지고 강대상으로
나오면서
"감사해요"찬양을
하는데 너무 감동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악보를 가지고
음반에 내자고 하면서
작곡자를 찾는데
못 찾았고 헤매고 있는데
결국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설경욱목사님이
십니다.

2002년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를 통해
세상에 조수아라는
이름을 알렸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를
쓰신 설경욱목사님이
작사, 작곡을 하셨는데요.

고속버스를 타고
지방을 내려가고 있었답니다.

앞으로의 사역과 다가올
미래를 계획하며 기도하고
찬양을 흥얼 거리던 중에
내가 바로 사랑받기 위해
태아 났으며 소중한 존재
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함이 넘치게 되었고
그때 영감을 받고 쓴
곡이랍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SBS 예술단장 <김정택> 장로
40대 이상이면
그가 만든 곡 한두 개쯤은
알 것입니다.

​전영록의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현숙의 "정말로”,
인순이의
“외로운 밤이면 밤마다”
심수봉의 "미워요"등의
가사로 시작되는 인기가요가
그가 작곡한 것입니다.

현제 한국음악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작사 작곡 편곡까지
모두 포함해 수록된 곡이
319곡 정도 된다고 하는데요.

월 저작권료의 인세가
2천만에서 3천만 원이 나오는데
지금은 그 인세로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고
있답니다.

가수 현숙과 함께 병원,
요양원, 구치소 등에
찾아가는 음악회도 열고
무의탁 어르신을 위해
효 콘서트도 같이 한다고
하네요.

김정택장로는 평양 출신으로
미국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아버지의 신앙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종교적인 생활만 했다는데요.

음악적인 재능을 처음
8살때에 피아노를 배우면서
알기 시작했으며
배재중학교를 거쳐서
서울예고에서 트럼펫을
전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음대를 졸업하고
대중음악 연주가 겸 작곡자,
지휘자로 방송계와 밤무대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연주가 끝나고
불 꺼진 무대를 뒤로하고
돌아갈 때엔 허탈감과
끝없는 고독감이 밀려왔어요.

술로 달래 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순간이었어요.

이럴 때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던 터라
쉽게 그만두지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회식을 가려는데
가수 심 봉수 씨와
전에 본 적이 있는
여자 전도사가 찾아와,

하나님이 보내서 왔다면서
"선생님! 어떠세요?"
그 물음에 이렇게 답을
했다는데요.

"죽지 못해서 살지요, 뭐...
그랬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곤 가버렸어요.

그 말을 듣자 처음에는 불쾌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가슴이 답답해져 회식에
못 간다고 양해를 구하고
차를 타고 무작정
강변도로를 달렸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어요.
갑자기 엄청난
공포감이 그를 덮쳤어요.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차 안에서 울부짖었습니다.

“주님,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정신없이 집에 와서는
먼지가 가득 덮여 있던
성경을 집어 들었어요.

그리고 피아노
밑으로 기어 들어가
끝없이 떠오르는
과거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또 회개했어요.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울며 토해내게 됩니다.

그 순간 어두움이 물러가고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적시며
마음에는 감사가 넘쳤습니다.

회개한 후에
그는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생활습관들을 정리해 나갔어요.

밤무대 출연도 중단했어요.
단호한 태도예요.
대단하지요?

이로 인해 생활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 품 안에
돌아온 저를 인도하소서...”
기도하며 나아갔어요.
쫓기는 삶을 다 내려놓았어요.

그리고 완벽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시간, 재능,
심지어 일까지도 다 맡겼어요.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사람이 되었어요.

 이렇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지금껏 맛볼 수 없었던
참 평안을 허락하셨어요.

생전 느껴 보지
못하던 여유를 주셨어요.

헛된 것을 버리니
가치 있는 것보다 의미 있는 것이
깨달아지게 하셨어요.

이렇게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주셨는데
이제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은 그를
SBS 관현악단장으로 세워주셨어요.

그것만이 아니에요.
몇 년 후 합창단과 무용단을 합쳐
만든 예술단장의 직책까지
맡게 하셨어요.

놀라운 일이에요.
하나님은 교회에서도
그를 장로로 세우셨어요.

영혼의 귀함을 깨닫게 하시고
전도에 불을 붙게 하셨어요.

연주인 연예인 할 것 없이
누구든지 닥치는 대로
전도하는 열정을 불어
넣어주셨어요.

개그맨 이영자 씨를 전도를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1997년 1년 동안 진행해온
"아이 러브 코미디"라는
녹화를 마친 뒤 송별회식을
위해 가려는데

이영자 씨가 갑자기 이렇게
물어봅니다.

"단장님, 숨겨놓은 여자 있죠?"
"엥... 뭐라고요?"

"제가 1년 내내 지켜봤는데
어떻게 단장님은 항상
싱글벙글 하세요?"

그 말을 당황스러웠지만
무슨 말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나야 뭐 할렐루야를
하니까 늘 웃죠
늘 다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잖아요,
영자 씨는 웃을 일 많지 않아요?"

그랬더니 영자 씨가
"저는 그렇지 않아요
밤에 잠을 잘 못 자요."

순발력과 재치를
가지고 인기를 누리는
이영자 씨가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노력을 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항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부모와 형제들의 생활을
거의 책임지고 있던 상황이기에
더욱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갈등과 고민으로 시달리고
있었던 겁니다.

장소를 식당으로 옮기고 나서
일부러 영자 씨 옆으로 가서
내가 웃을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해주게 되었고

그곳에 같이 있던 홍진경 씨와
조연출자, 코디 담당자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몇 주 후에 이영자 씨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다시
몇 주 후에는 아버지, 오빠
올케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답니다.

 김정택 장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 “앞으로도
제 입술의 나팔을 불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상한 심령을 고치시며
외로움과 고독으로 몸부림치는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과
만족을 주실 수 있기에,

이 비밀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어서
저는 오늘도 나팔을 붑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규장 문화사 대표
여운학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25년 동안 출판계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쉬는 날도 없이 일하다
심한 허리디스크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가던 아내가
누워서 심심하니
​책이나 읽으라며
성경책을 주었습니다.
 
특히 잠언을 읽으라고
펼쳐 주었습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성경을 읽게 된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며
책을 많이 읽고
원고 교정도 하였지만,
별 감동이 없었는데
잠언서를 읽는 순간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잠언 8장 32절
“내 말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이 임하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말씀을
읽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 강하게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잠언만
읽은 것이 아니라
전도서도 읽고
시편도 읽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자
더 이상 누워서 허송세월을
할 수 없었습니다.
 
새벽기도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낫기 힘들다는
허리디스크가
치료되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믿음을 갖게 되면서
그는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를 위해서 일했지만
이제부터 하나님을 위해
일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배운 것이
출판일밖에 없으니
문서 선교하는 출판사를
세우고자 계획하고,
규장 문화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슬비 전도편지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경영이 어려워서
빚더미에 올라앉기도 했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나니
마음에 평강이 넘치고
어려운 고비도 넘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으로 양재동에
규장 문화사 사옥도 신축하고
베스트셀러를 많이 내어
흥황하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1965년 신춘문예에
희곡 "성야"로 등단하여
작가,연극배우
그리고 방송인으로
살아온 오혜령씨를
소개합니다.

극작가 오혜령 씨는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 후
모교인 이화여고에서
교편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의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잇달아 당선되며
등단 한 후 극작가,
라디오 DJ 등
만능스타로 이름을
높였습니다.

특히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별이 빛나는 밤에'서
DJ로 방황하는
청춘들의 '대모'로
활동한 것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하지만 한창나이인  
30대의 젊은 나이에
까마득한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1978년도에
 ‘위암과 임파선 암’이라는
청천벽력의 진단을
받게 되었고
의사는 3개월을 넘기기
힘들다고 판정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숱한
질병 속에서
용케 살아왔는데
그것도 모자라 중년에
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기독교인으로
성장해왔지만
하나님께 항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추구해 온,
제게 왜 매를 드십니까?

당신이 살아 계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이 고통 중에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더 이상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원망하는 가운데
통증은 24시간 동안
단말마로 다가왔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달력의 숫자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
나갔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짜인
6월 26일에 빗금이 쳐진지
며칠이 더 지났습니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혈변을 보는 고통이
계속됐습니다.

어느 날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하자
그때 어디선가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이 느껴졌고 순간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삶과 죽음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을
원망한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지난날 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며,
며칠 동안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이제는 육체적인
 암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암이
치료받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라는
두려움으로 가슴을 쳤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던
중 온몸에 오한이 덮쳤습니다.

‘아 이제 부름받는구나’
죽음을 예감하면서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웬일입니까?

겨드랑이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세히 만져보니
멍울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어깨에
복숭아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또 한 복수로 차올랐던
배가 푸~욱 꺼졌습니다.
그동안 가빴던 숨도
고르고 평안해졌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주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너무 감사한 나머지
서원기 도를 올렸습니다.

‘덤으로
얻은 인생 앞으로
소외된 자들과
함께 살겠습니다.’

그런데,
다시 9년 전에
‘관상 대동맥경련증’이란
희귀병에 걸려 지금까지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그녀는 질병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몇 번씩이나
찾아온 질병과
죽음의 고통 앞에서
욥과 같이 간절하게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도움의 손길을 순간
순간 경험하면서,
 
남편 권오정 목사와 함께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에
'평화의 집'을
개원한 후 무의탁 노인과
결손가정 자녀들을 돌보며
헌신적 사역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오혜령씨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삶의 에너지를 받는 것은
잠이나 먹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육신을
지탱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저의 힘의 활력은
오직 주님을 의지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자체만으로도 한없는
평안을 경험합니다.
 
​절망의 뒤편에 희망의 빛은
이렇게 실제로 존재합니다.
육신의 구원을 넘어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출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소망교회에서 장로님으로
섬기고 계시며
건국대학교 교수인
류태영박사님의 간증입니다.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집안에서 유일하게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남들보다 늦은 나이인
열 여덟 살에 비로소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는 무작정 상경,
구두닦이, 신문팔이,
아이스 케이크 행상 등을 하며
겨우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찌들어지게 가난했고 장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었지만,
 
그는
구두를 닦으면서 생활하던 중
그는 우연히
 '유학'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유학'이
뭐냐고 묻자

"외국에 나가
훌륭한 선생들 밑에서
공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유학의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은 너무도
허황된 꿈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삶을 지탱해준 좌우명이었던
성경말씀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말씀에 의지해 기도하며
꿈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어느 나라에 가서 공부할 것인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가난한 농촌을
잘살게 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선진 농업국가인
덴마크로 가자"라는 답을 얻었다.

이제 그 꿈을 현실로
실현시킬 일만 남은 것이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며
한국의 농촌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리고는
한국의 농촌현실과 함께
그의 사상을 피력한
다음 덴마크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영어로 완성시켰다.
이제 편지를 부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고민하던 중 '그 나라의 가장
높은 사람에게 보내라'는
마음의 확신이 들었다.

가장 높은 사람이 왕인지
대통령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도서관에 가서 확인한 다음
편지의 겉봉투에 이렇게 썼다.

'프레드릭 9세 국왕.
코펜하겐. 덴마크' 
주소도 없이 그렇게만
쓴 편지를 부치고 난 후
약 40일쯤 지난 어느날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바로 덴마크의 국왕
보좌관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며칠 후에는 덴마크의
외무성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왕복 비행기표까지 동봉되어 있었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덴마크의 국왕이
무엇을 보고
구두닦이 청년을 초청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건국대학교 설립자
유석창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류태영 박사는 농촌학습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강의와 농촌방문을 통해
실질적인 개발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후 류 박사는 청와대 농촌발전
담당관실의 실무책임자로서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류태영 박사는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역경 속에서 갖은 시련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힘이 되어 주게 되었습니다.

환경, 그것은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두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맞서서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어떤 환경도
문제도 우리가 꿈을 꾸고
믿고 나가면 이룰 줄 믿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인천 주안 장로교회
나겸일 원로 목사님.
​  약 30년 전
교회가 한참 부흥하던
 어느 날 갑자기
목사님께서 몸의 상태가
안 좋아서 병원에
가보니 급성 간암입니다.

왜 몸이 이지경이 되도록
계시다가 오셨습니까.
그래서 또 다음 병원을 가보는데
그다음 병원에서도
똑같은 진단을 내립니다.

이제 우리가 손대서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갔던
병원이 세브란스 병원입니다.

그랬더니 한
삼일을 못 넘기겠습니다.
그러니 집에 가서
쉬고 계십시오.

아니 지금 사람은
숨이 다 넘어가기
전이라도 숨만 붙어있으면
병원에 입원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인데
냉정하게 집에 가서 쉬고
죽음을 맞이하라니까 그래서
떼를 써서 병원에 입원을 합니다.
 
금요일 날 저녁입니다.
얼굴이 새까매지고
복수가 찹니다.
본인은 주의 종으로 죽으면
천국 갈 것이니까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지만,
홀로 아내를 남겨놔야 되고

아홉 살, 여섯 살 난 어린 두 딸이
옆에서 아빠 죽지 마,
죽지 마 우는데
​너무나 불쌍해요.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니까
참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말씀 붙잡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제 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제 간이 나을 줄 믿습니다!
제가 죽으면 하나님 영광 가립니다.
하나님 영광 위해 살려주세요!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는
말씀을 믿습니다! ’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 8:17)는
말씀을 믿습니다! ’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약 5:15)’는 말씀을 믿습니다!”
 
주일날 목사님이 위독하셔서
곧 임종하실 정도까지 위독하다는
말씀을 듣게 되니까 1부부터 5부까지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저녁예배로 7시 반에 모였는데
많은 성도들이 나와서 본당에서
교육관 그 부속 성전까지 다 채워서
밤새 워 다음날 새벽까지
성도들이 떠나지 않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상황은 더 악화되었어요.
주일 저녁에 간호사가 와서
상태를 보더니
‘이제 삼십분 못 넘기겠습니다.’
흰 천을 가져다가 ‘이제
운명하시면 덮으시기 바랍니다.’
의사 두 사람이 차트를 들고 와서
이렇게 들여다보더니
 ‘이거 다 됐네.’
 
 성도들이 교회서 밤새부터
우리 목사님 살려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또 옆에 사모는 내 남편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아이들은 집으로 데려갔어요.

 아버지 임종하는 것
안 보여 주려고 데려가고.
그런데 그 밤 12시가 지나가면서
이제 숨이 다 된 순간에
갑자기 배가 꼬르륵하더니,
탁하고 뭐가 혈변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시커먼 핏덩어리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하루에 세 번씩 나흘 동안
열두 번 혈변을 쏟고 난 다음
남산만 한 배가 쑥 들어가고
그다음 회복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를 담당했던 주치 의사
김병수 박사는 말합니다.
“저는 의사로서, 의대 교수로서
이런 기적은 처음 봤습니다.

목사님의 경우는 1%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병원 측에서
목사님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을 받는다는 것은 곧
시체를 받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고치셨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로부터 하나님께서
건강을 회복시켜 주셔서
 건강한 모습으로
교회를 부흥시키게 해 주시고
십만 성도를 이루고 큰 교회를 짓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주의 일
하다가 은퇴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더니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병상에서 목사님도 믿었고
성도들도 믿었고
함께 기도하니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무너뜨리는
위대한 능력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먼저 하나님의
부름받으신
김준곤 목사님은
한국 대학생 모임인
CCC대표를 섬기면서
 거쳐간 대학생이
40만명이나 됩니다.

평신도는 350만
배출했습니다.

그분의 간증을 소개합니다.
 
전남 신안에
있는 2만여
주민이 사는
지도가 고향인데요.​​

유학자 집안으로
7대조 제사를
드리는
집안이며

아버지는
동네
유림회 회장으로
엄격한 선비셨습니다.

어머님이 제일먼저
예수믿으시고
철야기도를
많이 하신분입니다.

여덟살 때
문준경 전도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

일본군에
 끌러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오기도 했습니다.

해방후 첫 아내
인정진 사모와
결혼 했습니다.

김준곤목사님의 간증입니다.

6.25가 발발하자  
그 당시 지도면
일대에서는
2천여 명의 민간인이
공산당에게 떼죽음을 당했다

나와 아내가
끌러나가고
어린 딸
살릴려고
조용히 끌러갔습니다.

 동네 뒷산까지
끌려갔더니 마을 친척들을
비롯한 60여명의 사람들이 끌려
나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곤봉으로 사람들을
때려 신신시킨후
한꺼번에
죽창이나 일본도로
찔러 절명시켰는데
내 눈앞에서 아버지와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다 

곤봉에 맞아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셔서
아들인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계셨다

의식을 잃어가던
나는 아버지의 피 토하는
그 부르짖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시체더미 밑에
깔려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나는 그 때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죽음,
고통, 저주, 절망을 짊어지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울부짖었던 예수님의 고토을 보았다 

바로 그 십자가의 고통이
하나님과 만날 수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만날수 있게 해준 것이고
이런 고통 속에서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의
죽음을 경험했기에
전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고
통과 죽음을 함께 체험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아
‘전라남도를
거룩한 도시로 만들자’하고
다짐했다
​ 지금 지도는
63%가 기독교화 되었다

전남 성시화 운동은
그렇게 씨가 터서 싹을 냈다 

김준곤목사님의 또 다른
간증입니다.

둘째 딸 신희는
​ C.C.C에서 아버지를
도와 간사를 하다가
결혼하고 미국에 갔는데
미국 병원의 오진으로
뒤늦게 위암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나와
165일동안
투병하다가 내게 슬픈
무덤을 남기고
하늘나라에 갔다 

나는 내 딸 신희가
가혹하게 죽음의 순간까지
견디었던 극한 고통을 보면서 
그리고 아버지와 첫
아내의 죽음을 보면서
정신을 놓을 만큼
감당못할 아픔을 겪었다 

‘아빠, 살길이
없을까요?
살고 싶어요’

간절하게
되뇌던 딸은
죽는순간 마지막
유언기도를 했다

‘사랑하는 주님
나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이
찬송으로 사랑과 기도로
변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딸은
말을 못하고
의식을 놓더니
하늘나라에 갔다 
손이 점점 식어가면서
굳어져 갔다 

그 모든 존재가 사
라지는 제로점이었다 

그때
나의 아버지가
숨을 넘기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나 
내가 신희의
이름을 부른 것이나 
 
첫 아내가 순교하면서
딸 은희를 불렀을 것이나 
그리고 신희가 죽으면서
불렀을 아이들의
이름을 생각할 때 
그 모든 고통들 앞에서
존재가 사라지는
‘존재의 제로점’을 느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으면
피 흘리는 구원이 없었다면
그때 그 사건이 없었다면
회복할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섭섭함이 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때 십자가의
예수님은 소나기 같은
 피를 흘리고 계셨다 

내가 없어지는
존재의 제로점에서
나는 주님을 만나서
영혼 전에 택했다는
사랑도 이해되고

아버지의 학살과
첫 아내의 순교가
이해되고
소중한 보물 같은
내 딸아이의 죽음도
용서가 되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