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리더 :: '간증 모음/일반인' 카테고리의 글 목록

먼저 하나님의
부름받으신
김준곤 목사님은
한국 대학생 모임인
CCC대표를 섬기면서
 거쳐간 대학생이
40만명이나 됩니다.

평신도는 350만
배출했습니다.

그분의 간증을 소개합니다.
 
전남 신안에
있는 2만여
주민이 사는
지도가 고향인데요.​​

유학자 집안으로
7대조 제사를
드리는
집안이며

아버지는
동네
유림회 회장으로
엄격한 선비셨습니다.

어머님이 제일먼저
예수믿으시고
철야기도를
많이 하신분입니다.

여덟살 때
문준경 전도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

일본군에
 끌러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오기도 했습니다.

해방후 첫 아내
인정진 사모와
결혼해서 했습니다.
 

6.25가 발발하자  그 당시 지도면
일대에서는
2천여 명의 민간인이
공산당에게 떼죽음을 당했다

나와 아내가
끌러나가고
어린 딸
살릴려고
조용히 끌러갔습니다.
 동네 뒷산까지
끌려갔더니 마을 친척들을
비롯한 60여명의 사람들이 끌려
나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곤봉으로 사람들을
때려 신신시킨후
한꺼번에
죽창이나 일본도로
찔러 절명시켰는데
내 눈앞에서 아버지와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다 

곤봉에 맞아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셔서
아들인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계셨다

의식을 잃어가던
나는 아버지의 피 토하는
그 부르짖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시체더미 밑에
깔려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나는 그 때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죽음,
고통, 저주, 절망을 짊어지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울부짖었던 예수님의 고토을 보았다 

바로 그 십자가의 고통이
하나님과 만날 수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만날수 있게 해준 것이고
이런 고통 속에서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의
죽음을 경험했기에
전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고
통과 죽음을 함께 체험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아
‘전라남도를
거룩한 도시로 만들자’하고
다짐했다


지금 지도는
63%가 기독교화 되었다 
전남 성시화 운동은
그렇게 씨가 터서 싹을 냈다 

둘째 딸 신희는 C.C.C에서 아버지를
도와 간사를 하다가
결혼하고 미국에 갔는데
미국 병원의 오진으로
뒤늦게 위암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나와
165일동안
투병하다가 내게 슬픈
무덤을 남기고
하늘나라에 갔다 


나는 내 딸 신희가
가혹하게 죽음의 순간까지
견디었던 극한 고통을 보면서 
그리고 아버지와 첫
아내의 죽음을 보면서
정신을 놓을 만큼
감당못할 아픔을 겪었다 

‘아빠, 살길이
없을까요?
살고 싶어요’
간절하게
되뇌던 딸은
죽는순간 마지막
유언기도를 했다

‘사랑하는 주님
나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이
찬송으로 사랑과 기도로
변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딸은
말을 못하고
의식을 놓더니
하늘나라에 갔다 
손이 점점 식어가면서
굳어져 갔다 

그 모든 존재가 사
라지는 제로점이었다 

그때
나의 아버지가
숨을 넘기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나 
내가 신희의
이름을 부른 것이나 
 
첫 아내가 순교하면서
딸 은희를 불렀을 것이나 
그리고 신희가 죽으면서
불렀을 아이들의
이름을 생각할 때 
그 모든 고통들 앞에서
존재가 사라지는
‘존재의 제로점’을 느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으면
피 흘리는 구원이 없었다면
그때 그 사건이 없었다면
회복할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섭섭함이 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때 십자가의
예수님은 소나기 같은
 피를 흘리고 계셨다 

내가 없어지는
존재의 제로점에서
나는 주님을 만나서
영혼 전에 택했다는
사랑도 이해되고

아버지의 학살과
첫 아내의 순교가
이해되고
소중한 보물 같은
내 딸아이의 죽음도
용서가 되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아펜젤러 선교대상과
한인세계선교사 선교대상을
수상하였고

아프리카 케냐
35만 마사이 부족
전체의 명예 대추장으로
추대되신
안찬호 선교사님이
‘들어쓰심’이라는 책을
쓰셨는데요.

이 안찬호 선교사님은
1952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했지만
​아주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이 가난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19살의 나이에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것도 악명 높은
공수부대였지만
먹을 것은 물론
입을 것과 잘 곳이
모두 공짜로 해결됐기에
그곳이 좋았답니다.

그래서 무려 7년간 복무했다. 
제대 후 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나를 오라는 곳은 없었다.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하다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래서 삼척 탄광에서
7년간의 광부생활을 했고
탄광에서 일을 하는데
아버지가
늘 중노동을 하니까

밤에만 들어오면
술에 취해서 지냈는데
자기도 그냥 아버지 하시던
그대로 밤마다 술로 지새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탄광에서 일을 하는데
갱도가 무너졌어요.

 
완전히 암흑천지가 되고
이제는 나갈 길이 막혀버리고
갑자기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습니다.

근데 그 옆에 있는
광부아저씨가 손을
꼭 붙잡고 물어봅니다.

‘야, 너 예수를 믿니?’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예수가 무어가 나와
상관있어요. 안 믿어요.’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 경험상 우리는
여기서 살아나지 못할지도 몰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넌 죽어서
어디로 갈 거라고 생각해?

 
지금도 늦지 않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단다.
어떻게 하겠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밑져야 본전인거 같아요,
여기서 죽어가지고
지옥에 가면
얼마나 손해가 많습니까?

그래서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겠다고
무릎을 꿇고
결신기도를 하는데

성령의 감동이 와가지고
얼마나 눈물이
나오는지 통곡하며
기도하다가 기절했어요.

깨보니까 병실인데
자기가
가까스로 구조되어서
구원을 받게 되었고
자기에게 전도한 사람은
그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이고 그 아저씨가 
​ 나에게 마지막
이 귀한 예수님을 전하고
세상을 떠나셨구나.’

 
그래서 주님
은혜 너무 감사해서
자신을 주님께 드려
이제 신학교 가서
주의 종이 되었어요.

선교사님의 고백입니다.

그 곳 생활을 마친 후
신학교를 졸업하게 됐고
 80년대 말에 아프리카로
선교여행을 다녀오게 됐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것을 계기로 아프리카로
영원히 가라는
하나님의 명을 들었답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고
아이들도 걱정됐지만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1991년
3월 18일 3일분의 식량을
담은 배낭 하나 달랑 매고
마침내 케냐의
마사이족 땅을 밟게 됩니다.

마중 나온 원주민을 따라
무려 7시간을 걷고 나니
그 원주민은 이 이상은
위험하다면서
돌아가 버렸답니다.

원주민이 떠나 버린 뒤
머리에 사자털을 뒤집어 쓰고
얼굴과 몸에는 핏칠을 한
마사오족 7명이 나를 에워 싸고
가죽끈으로 묶어 나무에 매달았다.

그리고 뭔가를 물었지만
나는 아프리카말은 물론
영어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주님 뜻대로 하소서!"
그 때 추장이
나를 향해 뭐라고 물었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눈을 감고 기도만 했다.

"주님, 저는 두렵습니다.
제게 용기를 주소서!"

그래서 할 수 없이
무조건 “예스”라고
크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놀라면서
내 옆구리를 창으로 쿡 찌르더니
다시 한번 나에게 뭔가를 물었다.

뭔가 잘못돼 간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이번에는 “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한창 얘기한 후
조용히 다시 물었다.

이번 나의
대답은 “오케이”였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
마음대로 하라는
마음의 고백이었다.

이렇게 세 번의 질문과
대답이 오가자
그들은 나를 풀어주더니
그 중 제일 높아 보이는
마사오족이 나를 끌어안고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 동안의 두려움도
잠시 너무 화가 난 나는
죽기살기로 그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렸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예상과는 달리 나는
그날 저녁 소똥으로
만들어진 집으로 안내됐고
안에는 여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사오족 추장의
세번째 부인이었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그들의 지도자로 추앙 받았고
결국 대추장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그들이 나에게
한 첫번째 질문은
“이곳에 들어 오면 죽는다.
그래도 들어 오겠는가”라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살려주면 이곳을
나가겠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세번째는
“그렇다면 우리와 영원히
살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정말 그들이 원한 것과
내 대답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셈이었다.

 나와 달리 미리 현지 언어를
미리 배웠던 이전의 선교사들은
똑 같은 질문에 겁을 먹고
나와는 다른 대답을 했고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창에 찔려 죽음을 당했다.

또 얼굴에 침을 뱉는 것도
상대방을 환영한다는 의식
(물이 부족해
자기 몸 속의 물을
상대방에게 선사한다는 의미)이었고

자기의 부인에게
귀한 손님을 접대(?)하게
하는 것도 역시
그들의 오랜 관습이었다.

하여간 그 모든 것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주님이 예비하신 결과였다.

그래서 
 아프리카 케냐에
가서 22년째
 사역을 하고 있는데

마사이족의
거주지에 가서
교회를 24개를 세웠고
44개 유치원과
초등학교 그 다음
3개의 중학교
1개의
​신학대학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마사이족에서
그를 추장으로 추대를 했어요.

명예추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그는 이러한 성공적인 사역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너무나도 무능하고
우둔한 저 같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
할 것 이 없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한국에서보다는
미국에서 더 활발하게
사역하고 계시며
"재수 없는 아이"라는
책을 내셨는데요.

미국 이반젤
크리스천교회에 썬훼닌
(Sun Fannin)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한국 분인데
미국에 가셔서
미국 시민권을 얻으신 분이에요.

그런데 한국
이름은 정순덕입니다.
1950년에
한국전쟁 중에 태어났는데,

유복자라.
1남 6녀 중에 막내로.
유복자라는 것은
아버님 돌아가셨는데
어머님 뱃속에서 있다가
아버님을 태어나서 보지도 못한
그러한 상태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런데 “너는
그래서 불행을 가져온 아이야
네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의 죽음을 보면
넌 정말 재수 없는 아이야.”
그래서 배드럭 베이비
재수 없는 아이라 그렇게 불렸어요.

 전쟁이 일어날 때
6.25전쟁으로 인해서
고아원에 갔다가
어머님이 다시 5살 때에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잠시 고아원에 있을 때에
예수님의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 당시에도 어린 나이에
복음을 전했답니다.

다시 또 집에 왔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 재수 없는
아이라고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가정이 너무 어려운 상황이
되었지만 가난을 벗어나고자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됩니다.

낮에는 쌍화차를 팔고
저녁에는 야간학교를
다닙니다.

오빠가 구박이 심하게 되고
그 오빠가 집안 살림을
대신해야 되니깐
동생들을
그렇게 두들겨 팹니다.

그래서 너무나 언니들이 맞다가
‘같이 죽지 이렇게 살아 무엇 하냐’
그래서 아주 거칠고 힘들고
어려운 인생길을 걸어가게 됐어요.

밖에서 한 남자를 만나서
임신까지 했는데 남자의
폭행이 시작되었고
 낙태를 결심했는데
하지 못하고 수면제를
먹고 쓰러졌는데
다시 살았지만
결국 낙태를 하게 됩니다.

하혈한 후에 낙태할 때에
병원에서 누워있으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다시 살려주시면
하나님을 믿을게요"

그때에 마귀가
"하나님은 거룩하니
너는 불의하니 하나님께
가지 못한다"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남편과 헤어지고
미국 사람과 결혼한
친구가 소개를 해주어서
미국 군인을 만나게
됩니다.

정말 고생고생하다가
미군을 만나서 1972년에
미국에 왔는데

미국은 가난한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가난한 사람이었고
남편이 두 번 이혼하였고
신용불량자에다가
전처의 아이들의 자녀들에게
양육비까지 주게 됩니다.

미국에서 계속 힘든 일들을
하게 되었지만
시댁에서 구박이 심하게 됩니다.

미국에 친정어머니를 초청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데
남편이 이혼하자고 합니다.

다른 여자가 있었고
친정어머니가 여자답게
참고 살라고 했는데
마음의 분노가 있어서
받아들이지를 못 합니다.

도리어 이젠 남편을
술 먹고 때리게 됩니다.

나중에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면서
마음에 지금까지
그렇게 자기가 고통과
괴로움과 상처 속에 살았는데
남편마저 자기를 배반하니까
막 원한이,
증오심이 솟구쳐 올라서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서
남편을 죽여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답니다.

결국 내가 죽어서
남편에게 복수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새벽에
골짜기에서 울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분이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요,

 이때가 교회를 다닌 지
석 달이 되었을 때에요.
그래서 통곡하며 울고 있던
그분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신을 돌아보아라.”

그 울면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니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상처받았던 과거가
지나가면서 마음속에 있는
그 미움 슬픔이 다 보여 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음속에 말씀을 주시기를

“네게 상처 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라.
네가 용서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내가 도우리라.”

 그래서 그날 통곡하면서
그때부터 자기를 상처
준 사람을 다 용서했습니다.

남편마저 용서를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밖에
나가서 자기 맘대로 살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어요.

그래서 가서 자기를
버린 남편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시 살아났어요.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영접한
다음 얼마 후에
다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로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인 지금의 남편과
만나서 같이 신학을 하고,
부부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인디애나주
그린필드의
Body of Christ Fellowship 교회의
부목사로 팀 사역을 하고 있는데,
특별히 상처 입은 사람들
내적치유의 사역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있어서

이 분의 말씀 듣고
많은 사람이 큰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저는 제 삶의
진정한 회복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정말 너무나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 행복을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내가 아직도 너희를 사랑한다​

비타민씨 전도사로 유명한
 이왕재 박사님 간증을 소개합니다.

서울의대를 졸업한
기독 의사들의 간증집을 담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에
그의 간증이 나왔습니다.

부모님은 시골 농부였는데
아주 믿음이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언제나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굶주린 사람들을 데려다가
집에서 상을 차리고
저들을 먹이셨다고 합니다.

교회도 여럿 지으셨고,
저녁마다 가정예배를 드리셨는데
서울로 유학을 보낼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네가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하나님을 모르면 그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아버지 말씀을 명심하고
서울의대를 입학하고 박사까지 마치고
서울의대 해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서울의대 기독 학생회를 맡아
지도 교수로 열심히 일하던
어느 날, 사고가 났습니다.

여섯 살이던 딸 하나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딸이 주차장에서 운동화를
고쳐 신느라고 허리를 굽힌 순간
우회전 하던 차가
미처 보지 못하고 딸을 치었습니다.

차 앞바퀴가 정확하게
딸의 복부 부분을 넘어가 버렸습니다.

CT 촬영 결과, 딸의 간이
 마치 두부를 발로 밟은 것처럼
 망가져 있었습니다.

이 하나는 9년 동안
시험관 수정을 통해서
 어렵게 낳은 딸입니다.

9년 간 시험관 아기를 해서
 간신히 낳은 아이인데
이 아이가 간이
 다 으깨져서 죽게 되었으니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을 것입니다.

밤새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를 사랑한다!”

이 말씀에 힙을 얻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고백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미리
준비한 감사헌금을 드리고
 마음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확신이
 마음에 가득 차게 되자,
마음이 평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왕재 박사
 딸을 위해서 같이
서울의대 기독 동문들이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한지 2주 만에,
뭉개졌던 간이 기적적으로
 다시 재생된 것입니다.
회복된 것입니다.

간이 본래대로 재생되는
과정을 지켜본 동료 의사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선생, 열심히 기독 학생들을
 지도하며 기도하더니,
그래서 하나님이
딸을 살려주신 모양이야!”

 이왕재 박사님의 간증입니다.

“4년 6개월 된
어린아이의 몸
한가운데로 승용차
 앞바퀴가 통과하고도
살아 있다는 것을 그 누가
쉽게 믿으려 하겠습니까?

그것만으로도 기적인데,
짓이겨진 간을 2주 만에
다시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시어
기적이 주는 비합리성의
시비까지 제거해주시니,

 이는 교만하기 쉬운
의대 교수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한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사고를 통해서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은
간이 서늘한 정도로 분명하게
그리고 확실하고 정교하게
우리의 삶을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121편 1~3절)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항상 누군가를 붙들어 주다가 간 사람

네비게이토 선교회 창설자인
도슨 트로트맨(1906~1956)은
금세기에 개인 전도자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도슨 트로트맨에게는
평생의 모토가 있었습니다.

"그를 알고 그분을 알게 하라."
("To know him and to making known")

그의 평생의 모토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아는 것
또 그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를 알고 그를 알게 하는 것,
바로 네비게이토의 표어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총학생회 회장,
학생위원회 위원장,
농구팀 주장을 지냈으며

 졸업식 고별사를
읽는 영예를 누리며 졸업을 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 몇 년간
그는 계속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음담패설에 상스러운 욕이나 하고
거의 매일 댄스홀이나
호프집에서 보냈습니다.

음주운전에 도박을 하고
온갖 말썽을 다 부렸습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네 번을 경찰관에게 쫓겨 다녔고,
4번은 결국 경찰관에서 잡혔고,
2번은 결국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준비하십니다.

그날도
술에 너무 취해
가까이에 세워 둔
자신의 자동차도 찾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데
그를 불러 세운 경찰은
그에게 차 열쇠를 건네며
“이보게, 청년,
이렇게 사는 게 좋은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아니오,
저도 지겹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 대답을 들은 경찰은
그를 과음으로 체포하는 대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아버지처럼 격려해주기로
 했습니다.

그 만남은 도슨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됩니다.

며칠이 지난 후
그는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 10개를
암송하는 어느 교회
모임에 참석하였고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 중
그 열 구절을 다
외운 사람은 도슨뿐이었습니다.

그다음 주에도
그는 성경 구절 10개를 암송했는데

그런데 그가 작정하고
외우기 시작한 성경 구절들이
그의 마음을 울리기 시작합니다.

몇 주가 지난 후
그는 배운 말씀들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하나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건 지금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조용히 기도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자라면서,
그는 성경을 공부하는 것뿐 아니라
동시에 영적 성숙을
가져다주는 기도와 예배,
그리고 섬김의 요소들이
수반하여야 한다는 것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구절을 외우면서
예수님을 믿고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후
그 감격으로 해군 기지에서
예수님을 믿은 후에
해군 병사들을 상대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전도한 사람을 집에 데려다가
개인적으로 양육했습니다.

 도슨 트로트맨은
예수님을 믿고 말씀이
너무도 좋아서 매일 한 구절씩
외웠습니다.

그는 하루에
한 구절씩 외웠습니다.

첫날은 한 구절을 외우고
그 이튿날은
그 전날 한 것까지 합하여
두 구절 외우고
셋째 날은 세 구절을 외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믿은 후
1,000일 동안 천 구절을 외웠습니다.

성경암송 카드는
이 분이 처음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어떻게 양육할지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을 개발해 냈습니다.

수레바퀴 예화,
생명의 다리 전도도
도슨 트로트맨이 만든 것입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양육했습니다.
 
 1956년 6월 18일에
도슨 트로트맨은 죽습니다.

뉴욕 북쪽에
스크룬레이크라는 호수가 있습니다.

도슨 트로트맨은
거기서 물에 빠진
한 어린 소녀를
구출하기 위해서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구출자가 올 때까지
소녀를 붙들고 있다가
그가 구조되는 것을 보고 죽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서 한 사람이
이런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도슨 트로트맨은
평생을 한 영혼
살리는 비전을 위해 살았다."

 도슨 트로트맨은
한 영혼 비전(one soul vision)
곧 한 영혼 살리는 데
자기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 한 사람이
제 발로 서게 되면
그가 또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그런 사역을 했습니다.

1956년 7월 2일 자
타임즈의 종교란에
"항상 누군가를 붙들어
주다가 간 사람"이라는
제목 하에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창시자
도슨 트로트맨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무엇이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수많은 군인들에게,
또 한 소녀를 붙들어 주었습니까?

그는 비록 고졸이고
트럭 운전사였지만
모든 환경을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트로트맨은
미국 지도를 펴 놓고
모든 주(州)를 짚어 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벌 떼와 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으며,

이어서 세계지도를
펴 놓고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네비케이토는
지금 전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그가 배운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하면서
수백만 명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제자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도슨 자신은
그 어떤 단체도 만든 적이 없지만
그를 통해 결국 현재
거의 90여 개국에 퍼져 있는
 네비게이토 선교회가 탄생하게 된것입니다.

항해 원리를
기초로 키 중앙에
그리스도를 모신
네비게이토 선교회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회심만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제자 삼는 강력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왜 다리를 하루도 잊을 수 없을까?​

2017년
대한민국 기독교미술 대전에서
"하늘에서 내려와..."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받으신 장동호교수님을
소개합니다.

전주 교대 미술교육학과 교수이며
대학생 성경 읽기 선교회(UBF)
전주지부 책임간사를 맡으며
전북대와 전주교육대를 중심으로
캠퍼스 선교하기도 한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한쪽에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서
늘 마음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열등감과 트라우마를 갖고 살았습니다.

5살 때 처음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한 번도 한쪽 다리를 잊은 적이
없었고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왜 다리를 하루도 잊을 수 없을까?"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자기 다리만 보는 것 같아가지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고.
그러한 절망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한 번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면서
개구리가 우는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신이 계시다면
왜 날 이렇게 불공평하게 만드셨는가!
 그런 신은 신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신은 믿지 않을 것이며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술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어머님이 아들이 밥을 굶지 않는
직업을 위해서 재단사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럼 미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하였고

고등학교 선생님을 찾아가서
미술을 시켜달라고 하니
선생님이 감동을 받고
하게 되었답니다.

자기가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절에 가서 백팔 배를 했는데,
아! 절의 보살이 자기한테
 이렇게 말해주는 거예요.

 “네 다리는
조상들의 업보의 결과이다.
너는 그 저주를 받아서
다리가 불편한 것이다.”
더 큰 상처를 받아버렸어요.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불구가 된 것에 대해서
답을 찾아보려고 철학에 빠져보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봤지만
마음에 상처와 절망만 깊어졌습니다.

밤새 술을 마시며
잠까지 설치다가 보니
결국 폐렴까지 다가와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됩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서 미술을
가르치는 화실을 차리게 됩니다.

 늘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던 26살 때에 한 친구가
전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친구가 날마다 오면
하는 말이 "이 죄인"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26년을 살면서 헛된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에 펑펑 울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 위해 사는가?
늘 죽을 생각만 합니다.

막상 죽으려고 하니
어머니가 생각이 나서
죽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친구를 보면서
"왜 저 친구는 하나님을
믿을까?"궁금해서
친구에게 먼저 교회에 가고
싶다고 했답니다.

막상 교회에 버스 타고 가는데
너무 마음이 무거웠고
목사님이 성경공부를
시작하자고 해서 하는데
두 달 만에 수련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누가복음 23:34말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죄인입니다"
우상숭배했던 것에 대한
회개가 나오게 됩니다.

아직까지 본인은 스님이
말한 조상의 저주를 받아서
이렇게 사는 줄로 알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저주 운명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구나"
믿게 되었답니다.

처음으로 자유를 얻게 되었고
하루를 아픈 다리를 잊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끝나고 나오는데 하늘을 보면서
"왜 하늘이 이렇게 아름답지"
비로써 알게 되었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의 피를 너무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쓰러질 정도였고
한 집안에 두 종교를 믿으면
안된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제 장 교수가
결심을 하고 화실에 늘
밥을 해 오시는 어머니께
이제부터는 혼자 알아서 먹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자립하겠다고
선포했답니다.

어머님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시니
"나는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확실하게 믿는다"라고
고백을 하니

어머님이 그럼 이제부터는
"네가 믿는 예수님을 나도 믿겠다"
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답니다.

함께 교회를 다니는 친구가
UBF 수양회에 가자고 권해서
마지못해서 따라갔는데
그곳에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맹인에게 인과응보를 주님께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3절에 나옵니다.

"그가 맹인 된 것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구나"
그러면서 장 교수의 열등감이
씻겨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운명, 슬픔, 어두움이 떠나가게 되고
자신의 삶의 모습에 감사하게 됩니다.

죄와 열등감에서 해방되면서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드리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장 교수님의 고백입니다.

" 제 몸이 불편한 것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얻었습니다." 
 
 장 교수가 주님의 은혜에
너무 감격하여 통곡하고 울고 나서
 “나 이제 주님의 영광 위해 살리라."라는
결심으로 일본에 유학을 갑니다.

13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전주 교대 미술교육학과
교수가 되었고

전주 지역에 있는
많은 대학생들을 말씀을 통해서
교육하고 제자훈련하고
또 전도하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2017년
대한민국 기독교미술 대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하늘에서 내려와’란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수상 소감입니다.

 “3개월 동안
대여섯 시간을 내리 서서
나무를 파내며 작업하다 보니
손목 발목은 물론 몸 전체가
더 망가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어
멈출 수 없었습니다.

모든 인생이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제 모습으로,
또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황국명 목사는
1981년 ‘다윗과 요나단’으로
찬양활동을 시작,
 ‘친구의 고백', ‘요한의 아들 시몬아’
‘주만 바라볼찌라’,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
찬양곡을 잇따라 발표하며
당시 한국 CCM을 이끌었었다.

황국명목사님은
​ 어린시절에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가난하게 영덕에서 살다가
서울에 있던 넷째누님이
불러 어머니와 함께 갔는데

누님은 월세방도
구하기 어려워 여관방 하나에
아이들 다섯과 함께
식구가 살고 있었다.

 그 작은 방에서
아홉 식구가 살면서
나는 사춘기를 보내야 했다.

그 때까지는 웃을 일도
노래할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때
예수님을 만나면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맛보았고
 그 분을 찬양하게 됐답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누님이 신을 받아서
무서웠어요.

한마디 전도를
하지않았지만

하나님이 황목사님을
인도하신것을 보고
결국 예수를 믿고
지금은 전도사님으로
계신답니다.

황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절망가운데서도
 우리의 고난과 아픔을
부르짖을 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항상 예수님안에 거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를 바랍니다. 

1981년도에 대학교 3학년때
친구인
전태식(지금은 선교사님)
이와 가수가 될려고
대학가요제에 나가서
되려고 했다가
​팀 이름을 결성했는데
시기와 명인이라고 지었답니다.
 
그런데
 신학생이어서
그룹 명칭을 바꾸기로 하고
결국 다윗과 요나단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다가 1984년도에
극동방송에서 하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대회에
 '친구의 고백'이라는 곡으로
 나가서 상을 받았습니다.

1987년에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때는
복음성가 경연대회에 주로
많이 나왔습니다.
신학생들이 대회에 나와서
상은 받지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활동을 멈추고
교회안으로 다 들어갔지요.

저도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쪽 사역에 비전이 있어서
 기도하다가 담임목회를
 하기로 안수를 받았는데
 상황이 바뀌어서 계속
 이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워냑 가난하게 살다가 보니
돈을 벌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 여러가지 유혹도
많았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우선순위가 바뀐것이고
하나님전하는 일로
노래하는 일로 성공
목사라는 것을 성공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평안을
잃어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것 좋아하고

작은 교회에 가면
기분이 나쁘고
여러신문에 나오고
음반이 많이 팔리고
10만명앞에서 노래를
불렸지만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렸고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둘이 같이 하다가
친구가 먼저 미국으로 가고
혼자 남아서 1994년도에
절망가운에 주신 찬양인
'주만 바라볼찌라'를 발표하면서


홀로서기를 하고 사역하면서
4년 연속 복음성가 대상까지
받았지만 

1998년도에 건강이 무너지고
 의사가 죽는다고 해서
 1년만 쉬기 위해서
 1999년 2월에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제 계획과 달리 하나님은
14년을 그곳에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1998년도에 그 절망가운데
발표한 곳이
 "주님손잡고 이러서세요."
입니다.

김석균선배
(지금은 목사안수받으심)가
작가 작곡을 했고
이것을 다윗과 요나단에게
주셔서 부르게 됩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이민교회들을 사역하다가
 지난 1월에 하나님이 다시
 조국으로 보내주셔서
또 열심히 사역하고 있습니다.

찬양 중에 병이
 나았다는 간증도 있고
 제 음반을 선물로 줘서
 결혼에 성공한 사람도 있고

 17년동안
 교회에 다니는 것 때문에
 남편에 맞고 고난당하다가
 남편을 위한 기도를 포기하는 순간
 남편이 갑자기 교회에 가겠다고 해서
 왜 그런가 물었더니
 어디서 무슨 노래를 들었는데
 가슴에 와 닿고 좋더라고 해서
 무슨 노래인가 봤더니
제가 불렀던
 '친구의 고백'이라는 곡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간증을 듣기도 했고
 심지어는 자살하러 가는 길에
그 노래를 듣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분도 있고

 이민자들 중에는
 남편 따라갔다가 공항에서
 버림받고 영어도 안되니까
 구걸해서 30년, 40년
근근히 버텨온 이민자들이
그 찬양이 없었으면 난 죽었어요라는
 눈물의 고백을 들을 때는
정말 소름이 돋습니다. 

항국명목사님의 고백입니다.

"고난은 우선 순위를
바꾸라는 하나님의
사인(sign)입니다.
어떤 잘못을 살았든지
어떤 죄를 지었든지
빨리 주님께 오면
새벽빛같이 어김없이
찾아오십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온누리교회 집사님이신
 우리 한국의 국가대표선수로
이름을 날린 이영표 집사님,

2002년
한일월드컵 주역이자
KBS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어릴때 기독교가
싫었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세뇌당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데
자신들이 사랑하지 않고
서로 용서하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용서하지 않아서
싫었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선악과를 주셨고
따먹게 그대로 두셨는가?

한국에 복음이 오기전에
있는 조상들은 어떻게 되는가?

어떤 사람들은 선하게 사는데
고통을 당하는데
 공평하다고 하는가?

이런 고민으로 기독교가
싫었답니다.

그런데 국가대표선발이 되고
친구들이 계속 전도를 했는데
하나님을 믿게된 계기가
있었답니다.

결정적인 두가지가
있었답니다.

첫번째가
제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후에 무언가 있다라는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귀신을
과학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귀신은 있기에
나는 어떻게 할것인가의
고민으로 갈등합니다.

그때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을
믿을수 없습니다.

당신과 나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두번째는
살아계신다고 믿는
사람들을 보니
믿을수가 없습니다.

제 앞에 컵이 있는데
이 컵을 올렸다가 내려놓던지
아니면 하나님이
나타났다가 살아지던지
하세요."
라고 질문을 드렸는데

컵이 사라지거나
하나님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또 다른 질문이 있었다.
내 마음을 바꾸어주세요.

그런데 그때부터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고
성경공부를 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닭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서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주신 말씀이

"나는 언제나 네 주위에
있었는데 네가 믿지 않아서
만나지 못했다."


처음 믿고
예수님을 자랑하고
다니는데 

그날도 숙소에서
전도를 하고 있으니
어떤 선배가 너만 믿지
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가라고는
말을 듣고

호텔에 들어왔는데
책을 읽을려고 6개월을 들고
다닌 곳을 펴니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하얀백지에
"진리를 아느자가
진리를 모르는 자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죄이다.

그때부터
 침묵하지 않았고
나중에 그 책에서
하얀백지에 한줄이 있는
그곳을 다시 찾는데
그 책에는 없었답니다.

신앙심이 깊어진
계기가 있었는데요.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
사흘 전 부상을 당합니다.

근육이
12센티미터가 찢어져서
6주 진단에 회복까지는
석 달 이상 걸린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기부스를 하고
아파서 쩔뚝거리며 월드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인은 교회 집사로
 1년 반 동안 하나님, 
 월드컵에 나가서 
 좋은 성적을 얻어가지고

그래서 유럽에
프로선수로
진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했는데
그만 부상을 당한 거예요.

그래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욥기를 읽다보니까
마음에 탐심이 있었어요.

월드컵을 발판으로
내가 유럽으로 진출해서
내 이름을 좀 날려야 되겠다.

기도 하는데
주님 물으십니다.

“지금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월드컵입니다.”

“그 월드컵을 날
위해 포기할 수 있느냐?” 
 “네. 포기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회개하고
자기의 욕심, 모든 것
다 내려놓으니까
맘이 편안해지는데
그때부터 이상하게
다리가 아프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두 시합을 쉬고
그다음 나간 것이
포르투갈전인데

포르투갈전에
그의 어시스턴트로
말미암아
박지성이 꼴을 넣어서
역사상 최초로
16강에 진출합니다.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다음날 신기하게도
 다리가 아프지 않은 거예요.
목발 없이 걸었고
사흘 뒤에는
뛰게도 되더라구요.

의료팀에서는
오진이 아니었느냐라는
말까지 나왔어요.

처음 두 경기는 쉬고
세 번째 포르투갈전에 나갔는데
보통 선수가 열흘 정도 쉬면
체력이 떨어져 90분을 소화하지
 못하는데
저는 전혀 힘들지가 않더라구요.

그날
어시스턴트한 공이
들어가 16강 진출이
결정되자마자
믿는 선수들끼리 무릎 꿇고
한참을 감사하며 기도드렸어요.

그다음에 더
놀라운 일은 이탈리아전에서
그의 어시스턴트로
안정환이 다시 골을 넣습니다.

이때 4강 신화를
만들어냈는데요.

이때도 탁
어시스턴트 했는데
그 골이 들어갔어요. 
다 포기하니까
하나님이 주셨어요.

이런 간증을 합니다.

월드컵이 끝나고
온누리교회에서
6개월 간 거의 매일
새벽기도를 했어요.

그러던 2002년
11월 24일 주일예배에
찬양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에 감동이
밀려오고 눈물이 났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셨거든요.

“내가 너를
유럽에 보내주겠다.”

그리고 정확하게
두 주 후,
히딩크 감독님이
저를 찾으셨어요.

그리고
또 정확히 5주 후,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네델란드 아인트호벤으로 갔어요.

제 능력이라기보다
그분의 보이지 않는 손이
보내주신 것이죠.

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이렇게 간증합니다.

“저에게 축구는
예배입니다. 

 저의 실력과
위치를 인정하고
겸손히 무릎 꿇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냅니다.

성공과 실패가
중요하지 않아요.
오직 한 곳을
향해서 달려갈 뿐입니다.

제 역할을 다할 때
아름다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축구를 하는 예배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멀리계신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손을
내밀지 못하신겁니다.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간구할때에
놀라운 기적과 응답을
선물로 주신답니다.

지금 어떤 힘든일때문에
좌절과 낙심해 있나요?

지금이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문제에 결코 답답해하거나
고민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내려갈때가
없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실때가
된것이지요.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