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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나님의
부름받으신
김준곤 목사님은
한국 대학생 모임인
CCC대표를 섬기면서
 거쳐간 대학생이
40만명이나 됩니다.

평신도는 350만
배출했습니다.

그분의 간증을 소개합니다.
 
전남 신안에
있는 2만여
주민이 사는
지도가 고향인데요.​​

유학자 집안으로
7대조 제사를
드리는
집안이며

아버지는
동네
유림회 회장으로
엄격한 선비셨습니다.

어머님이 제일먼저
예수믿으시고
철야기도를
많이 하신분입니다.

여덟살 때
문준경 전도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

일본군에
 끌러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오기도 했습니다.

해방후 첫 아내
인정진 사모와
결혼해서 했습니다.
 

6.25가 발발하자  그 당시 지도면
일대에서는
2천여 명의 민간인이
공산당에게 떼죽음을 당했다

나와 아내가
끌러나가고
어린 딸
살릴려고
조용히 끌러갔습니다.
 동네 뒷산까지
끌려갔더니 마을 친척들을
비롯한 60여명의 사람들이 끌려
나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곤봉으로 사람들을
때려 신신시킨후
한꺼번에
죽창이나 일본도로
찔러 절명시켰는데
내 눈앞에서 아버지와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다 

곤봉에 맞아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셔서
아들인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계셨다

의식을 잃어가던
나는 아버지의 피 토하는
그 부르짖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시체더미 밑에
깔려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나는 그 때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죽음,
고통, 저주, 절망을 짊어지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울부짖었던 예수님의 고토을 보았다 

바로 그 십자가의 고통이
하나님과 만날 수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만날수 있게 해준 것이고
이런 고통 속에서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의
죽음을 경험했기에
전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고
통과 죽음을 함께 체험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아
‘전라남도를
거룩한 도시로 만들자’하고
다짐했다


지금 지도는
63%가 기독교화 되었다 
전남 성시화 운동은
그렇게 씨가 터서 싹을 냈다 

둘째 딸 신희는 C.C.C에서 아버지를
도와 간사를 하다가
결혼하고 미국에 갔는데
미국 병원의 오진으로
뒤늦게 위암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나와
165일동안
투병하다가 내게 슬픈
무덤을 남기고
하늘나라에 갔다 


나는 내 딸 신희가
가혹하게 죽음의 순간까지
견디었던 극한 고통을 보면서 
그리고 아버지와 첫
아내의 죽음을 보면서
정신을 놓을 만큼
감당못할 아픔을 겪었다 

‘아빠, 살길이
없을까요?
살고 싶어요’
간절하게
되뇌던 딸은
죽는순간 마지막
유언기도를 했다

‘사랑하는 주님
나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이
찬송으로 사랑과 기도로
변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딸은
말을 못하고
의식을 놓더니
하늘나라에 갔다 
손이 점점 식어가면서
굳어져 갔다 

그 모든 존재가 사
라지는 제로점이었다 

그때
나의 아버지가
숨을 넘기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나 
내가 신희의
이름을 부른 것이나 
 
첫 아내가 순교하면서
딸 은희를 불렀을 것이나 
그리고 신희가 죽으면서
불렀을 아이들의
이름을 생각할 때 
그 모든 고통들 앞에서
존재가 사라지는
‘존재의 제로점’을 느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으면
피 흘리는 구원이 없었다면
그때 그 사건이 없었다면
회복할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섭섭함이 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때 십자가의
예수님은 소나기 같은
 피를 흘리고 계셨다 

내가 없어지는
존재의 제로점에서
나는 주님을 만나서
영혼 전에 택했다는
사랑도 이해되고

아버지의 학살과
첫 아내의 순교가
이해되고
소중한 보물 같은
내 딸아이의 죽음도
용서가 되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아펜젤러 선교대상과
한인세계선교사 선교대상을
수상하였고

아프리카 케냐
35만 마사이 부족
전체의 명예 대추장으로
추대되신
안찬호 선교사님이
‘들어쓰심’이라는 책을
쓰셨는데요.

이 안찬호 선교사님은
1952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했지만
​아주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이 가난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19살의 나이에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것도 악명 높은
공수부대였지만
먹을 것은 물론
입을 것과 잘 곳이
모두 공짜로 해결됐기에
그곳이 좋았답니다.

그래서 무려 7년간 복무했다. 
제대 후 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나를 오라는 곳은 없었다.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하다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래서 삼척 탄광에서
7년간의 광부생활을 했고
탄광에서 일을 하는데
아버지가
늘 중노동을 하니까

밤에만 들어오면
술에 취해서 지냈는데
자기도 그냥 아버지 하시던
그대로 밤마다 술로 지새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탄광에서 일을 하는데
갱도가 무너졌어요.

 
완전히 암흑천지가 되고
이제는 나갈 길이 막혀버리고
갑자기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습니다.

근데 그 옆에 있는
광부아저씨가 손을
꼭 붙잡고 물어봅니다.

‘야, 너 예수를 믿니?’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예수가 무어가 나와
상관있어요. 안 믿어요.’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 경험상 우리는
여기서 살아나지 못할지도 몰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넌 죽어서
어디로 갈 거라고 생각해?

 
지금도 늦지 않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단다.
어떻게 하겠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밑져야 본전인거 같아요,
여기서 죽어가지고
지옥에 가면
얼마나 손해가 많습니까?

그래서 그 자리에서
 예수를 믿겠다고
무릎을 꿇고
결신기도를 하는데

성령의 감동이 와가지고
얼마나 눈물이
나오는지 통곡하며
기도하다가 기절했어요.

깨보니까 병실인데
자기가
가까스로 구조되어서
구원을 받게 되었고
자기에게 전도한 사람은
그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이고 그 아저씨가 
​ 나에게 마지막
이 귀한 예수님을 전하고
세상을 떠나셨구나.’

 
그래서 주님
은혜 너무 감사해서
자신을 주님께 드려
이제 신학교 가서
주의 종이 되었어요.

선교사님의 고백입니다.

그 곳 생활을 마친 후
신학교를 졸업하게 됐고
 80년대 말에 아프리카로
선교여행을 다녀오게 됐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것을 계기로 아프리카로
영원히 가라는
하나님의 명을 들었답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고
아이들도 걱정됐지만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1991년
3월 18일 3일분의 식량을
담은 배낭 하나 달랑 매고
마침내 케냐의
마사이족 땅을 밟게 됩니다.

마중 나온 원주민을 따라
무려 7시간을 걷고 나니
그 원주민은 이 이상은
위험하다면서
돌아가 버렸답니다.

원주민이 떠나 버린 뒤
머리에 사자털을 뒤집어 쓰고
얼굴과 몸에는 핏칠을 한
마사오족 7명이 나를 에워 싸고
가죽끈으로 묶어 나무에 매달았다.

그리고 뭔가를 물었지만
나는 아프리카말은 물론
영어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주님 뜻대로 하소서!"
그 때 추장이
나를 향해 뭐라고 물었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눈을 감고 기도만 했다.

"주님, 저는 두렵습니다.
제게 용기를 주소서!"

그래서 할 수 없이
무조건 “예스”라고
크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놀라면서
내 옆구리를 창으로 쿡 찌르더니
다시 한번 나에게 뭔가를 물었다.

뭔가 잘못돼 간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이번에는 “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끼리
한창 얘기한 후
조용히 다시 물었다.

이번 나의
대답은 “오케이”였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
마음대로 하라는
마음의 고백이었다.

이렇게 세 번의 질문과
대답이 오가자
그들은 나를 풀어주더니
그 중 제일 높아 보이는
마사오족이 나를 끌어안고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 동안의 두려움도
잠시 너무 화가 난 나는
죽기살기로 그의 얼굴에
침을 뱉어버렸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예상과는 달리 나는
그날 저녁 소똥으로
만들어진 집으로 안내됐고
안에는 여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사오족 추장의
세번째 부인이었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그들의 지도자로 추앙 받았고
결국 대추장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그들이 나에게
한 첫번째 질문은
“이곳에 들어 오면 죽는다.
그래도 들어 오겠는가”라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살려주면 이곳을
나가겠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세번째는
“그렇다면 우리와 영원히
살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정말 그들이 원한 것과
내 대답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셈이었다.

 나와 달리 미리 현지 언어를
미리 배웠던 이전의 선교사들은
똑 같은 질문에 겁을 먹고
나와는 다른 대답을 했고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창에 찔려 죽음을 당했다.

또 얼굴에 침을 뱉는 것도
상대방을 환영한다는 의식
(물이 부족해
자기 몸 속의 물을
상대방에게 선사한다는 의미)이었고

자기의 부인에게
귀한 손님을 접대(?)하게
하는 것도 역시
그들의 오랜 관습이었다.

하여간 그 모든 것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주님이 예비하신 결과였다.

그래서 
 아프리카 케냐에
가서 22년째
 사역을 하고 있는데

마사이족의
거주지에 가서
교회를 24개를 세웠고
44개 유치원과
초등학교 그 다음
3개의 중학교
1개의
​신학대학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마사이족에서
그를 추장으로 추대를 했어요.

명예추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그는 이러한 성공적인 사역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너무나도 무능하고
우둔한 저 같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
할 것 이 없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한국에서보다는
미국에서 더 활발하게
사역하고 계시며
"재수 없는 아이"라는
책을 내셨는데요.

미국 이반젤
크리스천교회에 썬훼닌
(Sun Fannin)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한국 분인데
미국에 가셔서
미국 시민권을 얻으신 분이에요.

그런데 한국
이름은 정순덕입니다.
1950년에
한국전쟁 중에 태어났는데,

유복자라.
1남 6녀 중에 막내로.
유복자라는 것은
아버님 돌아가셨는데
어머님 뱃속에서 있다가
아버님을 태어나서 보지도 못한
그러한 상태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런데 “너는
그래서 불행을 가져온 아이야
네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의 죽음을 보면
넌 정말 재수 없는 아이야.”
그래서 배드럭 베이비
재수 없는 아이라 그렇게 불렸어요.

 전쟁이 일어날 때
6.25전쟁으로 인해서
고아원에 갔다가
어머님이 다시 5살 때에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잠시 고아원에 있을 때에
예수님의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 당시에도 어린 나이에
복음을 전했답니다.

다시 또 집에 왔을 때는
주위 사람들이 재수 없는
아이라고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가정이 너무 어려운 상황이
되었지만 가난을 벗어나고자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됩니다.

낮에는 쌍화차를 팔고
저녁에는 야간학교를
다닙니다.

오빠가 구박이 심하게 되고
그 오빠가 집안 살림을
대신해야 되니깐
동생들을
그렇게 두들겨 팹니다.

그래서 너무나 언니들이 맞다가
‘같이 죽지 이렇게 살아 무엇 하냐’
그래서 아주 거칠고 힘들고
어려운 인생길을 걸어가게 됐어요.

밖에서 한 남자를 만나서
임신까지 했는데 남자의
폭행이 시작되었고
 낙태를 결심했는데
하지 못하고 수면제를
먹고 쓰러졌는데
다시 살았지만
결국 낙태를 하게 됩니다.

하혈한 후에 낙태할 때에
병원에서 누워있으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다시 살려주시면
하나님을 믿을게요"

그때에 마귀가
"하나님은 거룩하니
너는 불의하니 하나님께
가지 못한다"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남편과 헤어지고
미국 사람과 결혼한
친구가 소개를 해주어서
미국 군인을 만나게
됩니다.

정말 고생고생하다가
미군을 만나서 1972년에
미국에 왔는데

미국은 가난한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가난한 사람이었고
남편이 두 번 이혼하였고
신용불량자에다가
전처의 아이들의 자녀들에게
양육비까지 주게 됩니다.

미국에서 계속 힘든 일들을
하게 되었지만
시댁에서 구박이 심하게 됩니다.

미국에 친정어머니를 초청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데
남편이 이혼하자고 합니다.

다른 여자가 있었고
친정어머니가 여자답게
참고 살라고 했는데
마음의 분노가 있어서
받아들이지를 못 합니다.

도리어 이젠 남편을
술 먹고 때리게 됩니다.

나중에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면서
마음에 지금까지
그렇게 자기가 고통과
괴로움과 상처 속에 살았는데
남편마저 자기를 배반하니까
막 원한이,
증오심이 솟구쳐 올라서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서
남편을 죽여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답니다.

결국 내가 죽어서
남편에게 복수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새벽에
골짜기에서 울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분이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요,

 이때가 교회를 다닌 지
석 달이 되었을 때에요.
그래서 통곡하며 울고 있던
그분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신을 돌아보아라.”

그 울면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니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상처받았던 과거가
지나가면서 마음속에 있는
그 미움 슬픔이 다 보여 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음속에 말씀을 주시기를

“네게 상처 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라.
네가 용서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내가 도우리라.”

 그래서 그날 통곡하면서
그때부터 자기를 상처
준 사람을 다 용서했습니다.

남편마저 용서를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밖에
나가서 자기 맘대로 살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어요.

그래서 가서 자기를
버린 남편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시 살아났어요.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었어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영접한
다음 얼마 후에
다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로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인 지금의 남편과
만나서 같이 신학을 하고,
부부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인디애나주
그린필드의
Body of Christ Fellowship 교회의
부목사로 팀 사역을 하고 있는데,
특별히 상처 입은 사람들
내적치유의 사역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있어서

이 분의 말씀 듣고
많은 사람이 큰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저는 제 삶의
진정한 회복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정말 너무나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 행복을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우리 나라 국민 엄마라는
탤런트 김혜자 권사님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현제 남대문교회
권사님으로 계시는데요.

연예인들이 당당하게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본인은 당당하게
이렇게 고백한답니다.

김혜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성경에도 있잖아요.
네가 나를 모른척하면
나도 널 모른다고 하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우리는
‘난 어떤 사람을 존경해’라는
말은 잘 하면서
‘하나님을 좋아한다’는
말은 왜 꺼려 할까요?

저는 하나님이 없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어요”라고
 말했다. 

1941년 10월 25일
서울에서 출생한 김혜자 권사는
이화여자대학교 2학년 시절인
1961년 KBS 서울중앙방송
공채 1기 탤런트로 정식 데뷔하여
공채 1기로 시작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작품은
(전원일기) (사랑이 뭐길래)
(장미와 콩나물) (엄마가 뿔났다)
(눈이 부시게) 등으로
제2회 마닐라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동아연극상 여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88년 mbs 방송연기대상, 92년 방송대상,

2011년 영화《마더》로
미국 LA 영화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95년에는 최장수 전속 광고모델로
선정됐다.

1991년 월드비전
친선 홍보대사로 임명되었고,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신앙은 모태신앙으로
어렸을 때 다닌 교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방석에 앉아서
예배 보는 교회였어요.

그런데 만날
예배를 보고 나오면
좋은 신발이 없어지고
헌 신발이 있어요.

그러니까 청년부
어른들이 도둑을
잡아야 된다고 했어요.

신발 사이즈가 열 살
미만 애들 것이 없어지니
누군가가 와서 바꿔
신고 가겠지요.

 잡는다고 막 그러는데
전도사님이 이러셨어요.

 “놔둬라.
도둑질하다 하나님 만난다.
잡지 마라."라고 했어요.

 저는 그게
굉장히 어렸을 때인데도
평생 잊어지지가 않아요.

교회 문이 너무
굳게 닫혀 있잖아요.

그리고
이상한 사람
안 들이려 하고.
제 생각에는
그 전도사님처럼
도둑질하는 사람,
배고픈 사람 이런
사람들이 뭘 훔쳐 가려고
왔다가 뭘
얻어먹으려고 왔다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하나님을 너무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애인같이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 이거 몰라요.
해줘요.
내가 못 하잖아요.

이거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떼를 잘 쓰는 것 같아요.

 그 대신 제가
 할 일은 정말 최선을
다 해서 해요.

그다음에는
이제 나는 몰라요.
​ 그렇게 얘기하죠.

새 드라마를
시작할 때나
새 연극을 할 때는
‘저를 책임져 줘요.

 나는 못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해 줘야지
나는 못해요.’

김혜자 권사님의
담배를 끊게 된
고백입니다.

첫 임신 때
입덧을 없애려
담배를 접한 후
나도 모르게
30년 골초가 되었다.

​집에서나
방송국에서나
늘 내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오죽했으면 연예계
‘체인 스모커’를 뽑을 때
늘 1위를 차지하곤 했을까.

​나는 흡연가라기보다는
애연가였다.

담배를 물었다 하면
필터만 남을 때까지 피웠고
폐 속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이며
참 맛있게 피웠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담배만은 포기할 수 없어
교회에 갈 때마다
“하나님,
이것만은 좀 봐 주세요”라고
기도하곤 했다.

​그런 내게 ‘사건’이
일어난 것은 6년 전 이맘때였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담배부터 피워 물었는데
이제껏 피던 맛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 껐다가
다시 불을 붙이기를 거듭했지만
쓰고 역겨운 맛뿐이었다.

​그날 밤 미국에 사는 딸이
전화를 했기에
“고은아, 정말 이상하다.
​담배 맛이 싫어졌어”라고
말했더니

딸이 갑자기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며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하나님이
아름답게 지어 주신 몸을
담배 따위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이렇게 빨리 들어주실 줄 몰랐어.”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담배를 피워 온 엄마에게
차마 담배를 끊으라는
말은 못하고

무려 백일 동안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새벽 기도를 다녔다는
딸아이의 말을 듣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로 담배와의
길고 긴 인연이 끊겼다.

​다행히도
금단현상은 전혀 없었다.

​누가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워도 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금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의 힘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

김혜자 권사님의
기아 돕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
 

‘기아 아동 돕기’는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어요.

 드라마 끝나고
11년 전에 어디로
여행 가려고 할 때
월드비전 회장님이,
그때가 우리나라가
도움을 받기만 하다가
우리가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뀐 해예요.

 우리가 제일 먼저
돕는 나라가 에티오피아인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

다른 나라도
유명한 배우나 가수가
이런 데 참여하면 사람들이
그 얘기에 주목하고
좋은 결과가 나와서
애들을 도울 수 있다고 해서
시작한 거예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너무나 비참한, 가난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보고
여태까지 내가 죄인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제가 월드비전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내가
모태 교인인데도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정말 희미하게
하나님께 가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저에게 확실하게
일을 맡기신 것 같아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그런데 거기에 꼭
크리스천들이 와서
봉사를 해요.

에티오피아를 방문했던
 당시를 회상하던 김혜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보이는 광경
하나하나가
드라마 세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평 남짓한 공간에서
열댓 명이 생활하고
젊은이들은
에이즈와 굶주림에
희망이 없이 살아간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희망을 지닌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태어나지 말아야 할
존재들이었다"라며

 "현실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동반 취재를 했던 언론에서는
나를 굉장한 인물로
그려놓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생지옥 같은 그곳이 싫어
'다시는 가지 않겠다'라는
마음뿐이었다"고 전했다. 

다시는 아프리카에
 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한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한 젊은 여성의 편지였다.


 구로공단에서
받은 월급을 모았다며
김혜자 권사에게 편지와 함께
보낸 한 여성의 정성에
그녀는 다시
아프리카 대륙으로,
인도로, 굶어죽어가
는 아이들에게 찾아갔다. 

9.11테러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총칼을 들이댄
전쟁에서 계속되는,
배고픔과의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곳의 아이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오래 먹으면 실명하게 되는
독풀을 씹고 또 씹는다.

 하도 풀을 씹어서
입 주위는 퍼렇게
물까지 들었지만
생풀을 뜯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갈 뿐이라고 한다. 

김혜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라면
이들을 모른척해서는
안된다.

나도 처음에는
그곳이 싫고 무서웠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은
그들을 이렇게라도
돕는 것"이라며

"나는 먼지만도
못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쓰시기 위해
 유명한 여배우로
만드셨다고 생각한다.

그곳의 아이들이
나를 부르고 있다"라며
"이 아이들을
외면하지 말아달라.
아이들에게 날개 달린
천사가 되어 달라"라고
합니다.

김혜자 권사님에게도
고난이 찾아왔는데요.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야 한 한 것입니다.

김혜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이별이란
슬픈 거잖아요.
 병실에서
남편과 둘이 있을 때
자기가 암이라니까
우리 남편이 가만있더라고요.

‘그렇지,
나도 암에 걸릴 수 있지’
그러더군요. 모르겠어요.

죽으면
하나님에게 가는 건데
그런 게 많이
힘이 됐겠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면서 내가 죽으면
자기가 힘들어서 어떡하나
그랬어요.

그러고 한 달 반 만에
갔으니 너무나 꿈같이,
현실이 아닌 것 같이….
그래도 세례도 받고
성찬식도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했으니 그게
 큰 위로가 됐고요."

김혜자 권사님은
 하나님은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은 대해 말할 때
‘복 주시는 분’이란 이야기를
자주 하잖아요.

그런데, 그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해요.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해요”라고
고백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외길 인생 연극배우 박정자씨는
50년 동안 쉬지 않고 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시는데요.

동승 교회에 출석하면서
지금도 무대에 서기 전에는
떨리기에 기도로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1962년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이래 반세기 동안 그는
<따라지의 향연>, <파우스트>,
<위기의 여자>, <신의 아그네스>,
<19 그리고 80>등
 13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1963년 동아방송
성우 1기로 입사했으며
애니메이션 팬들에겐
인어 공주의 문어 마녀
우르 술라로 유명합니다.
 
2013년 현재,
한국 연극인 복지 재단 이사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 나눔 추진단 단장이다.

1950년 아홉 살 때 
부민관이라는 극장에서
연극하는 오빠의
 도시락을 나르며
 처음 무대를 본,
아홉 살 꼬마 박정자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하는데요.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의 조명 받는 것을
좋아하고 혼자 노래를
하곤 했답니다.

피난시절에
 제주도 천막교회에
나가서 무대가 서는 것을
좋아해서 성탄절 날
축하예배 때와 새벽송의
그때가 좋았답니다.

연극 "위기의 여자"할 때에
내가 무엇하고 있는가
고민할 때에
고은정 선배께서
이쯤에서 교회 가자고 합니다.

처음에 온누리교회에
가게 되고 성가대에
가서 찬양을 하면서
행복하셨답니다.

박정자 씨가 무대에서
실수할 때가 있는데
왜냐하면 라이브로
하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러기에 항상
꿈을 꾸면 대사를
잃어버린 꿈을
꾼답니다.

배우는 아플 권리도
슬플 권리도 없다고
하는데요,

실수하는 순간
"오 하나님"
절체절명의 순간에
죽고 싶다고
할 정도이지만
무대에서 실수를 한답니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한답니다.

멀리서 오고
비싼 표를 사서 왔기에
오는 분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 저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답니다.

지금은 암기력이
떨어지기에 더욱
열심히 한답니다.

박정자씨는
"연극의 완성은
관객이 해준다."라는
신념이 있기에
무대에서의 관객과의
시선이 중요하답니다.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작품을
할때에 딸과 엄마가
관객으로 와서
무대에 감동해서
서로 손을 잡고 울 때에
감격을 했다고 합니다.

무대를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때에 있는데요.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야
나 아닌 다른 힘이야."

그럴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구나하고
깨닫게 된답니다.

그래서 박정자씨는
하나님은 무대에서
또 다른 힘을 주는
에너지라고 고백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연극배우 출신에서
본격적으로
경찰 전문 배우로
 활동을 하다가

 이제는 따뜻하고
친근한 배우로
 우리들의 곁에 와 계시는
 강신일 장로님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동숭교회 장로님로
섬기고 계시는데요.

주요 작품은
[광부 화가들] [레드]
[공공의 적] [실미도]
[강철중] [7급 공무원]
[[태양의 후예] [미스터 션사인]
[비켜라 운명아]
연극과 영화 및 드라마
다수에 출현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하게 된
계기가 있었답니다.

강신일 장로의
고백입니다. 

원래 집안이 유교적인
집안이기에
고등학교를 가는데
한 곳을 가는 것을
반대했는데
그곳에 미션스쿨이었고
하나님은 그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학교에 다니면
교회에 출석하고 도장을
받아 올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리고 성경 시험에서는
100점을 맞기도 했답니다.

서울 오면서 교회는 잊고
있었고 친구도 없었는데
고등학교 친구가 전도를
하게 됩니다.
 

그 후로 동숭교회를
40년을 다니게 되었고
한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만나게 해 주신 분은
교회학교 고등부
선생님이셨고
지금은 선교사님으로
사역을 하고 계시답니다.

그 당시 전도했던
친구는 목사님이 되었답니다.

그럼 어떻게 배우로
시작했는지 알아볼까요.

강신일 장로의
고백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소개로
동숭교회에 나왔는데 

그것을 계기로
연극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청년 때에 문학의 밤을
 참여하면서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자 하여
소외된 지역에 공연하면서
선교 극단 "증언"을 시작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대학은
전기공학과를
전공했지만

성경을 더욱 많이 봤기에
집안에서는 그러다가
신학과를 가면 어떻하나?
라고 걱정할 정도였답니다.

군대 있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연극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준비해 오다가

군대 제대 이후에 동숭교회
최종률 장로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연우무대"라는
극단을 소개해주신 것입니다.

이후 강신일 장로는
1986년부터 극단 ‘연우무대’에
들어가서 다수의 연극에
주인공으로 서게 됩니다.

그런데 2000년도에
함께 활동 연기자들이
방송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외로움을 느꼈지만
오직 연극으로 평생을
바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셋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오게 되니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여
"방송도 연기인데
도전해 보아야지"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마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2002년 영화
‘공공의 적’에 출연하면서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연극 20년 동안
하는 것보다 한 번의 영화가
대중의 인지도가 큰 것임을
기차 타고 가면서
알았다고 합니다.

그 후에
영화 ‘실미도’ ‘한반도’ 
 ‘강철중’
‘7급 공무원’ 등으로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영화배우로
자리를 잡고 나니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영화 관계자들과
술자리도 잦아지고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신앙생활을 멀리했다.

그는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또 한 번 철퇴를 내리셨다.

셋째가 8살이 되었을 때에
2007년에 간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두 달 후에 다시
검진을 받은 후에
수술을 받게 되었답니다.

수술 전까지는 가족을 위해
사는 것 같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연극이
너무 좋아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주위 사람들의 안타까움과
위로와 눈물을 통해
이 사람들을 위해
이제 기쁨을 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강신일 장로님의
고백입니다. ​

“승승장구하니
신앙에서 멀어지게 됐죠.
하나님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고
철퇴를 내리셨는데,
이것이 오히려 은혜였습니다.”

그때를 계기로
 처음 연극을 시작했을 때
자세와 하나님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를
다시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술, 담배를 끊으며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다고 합니다.

강신일 장로님의
연기의 기본을 성경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요즘 가장
핫한 연예인으로
이영자씨를
떠올리는데요.

특히"전지적 참견 시점"을
통해서 이영자 먹방으로
전국에 먹방 지도를
그려달라고 할 정도인데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데뷔한지 27년 만에
여자 방송인으로는
최초로 kbs
연애 대상을 차지한
이영자 씨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본명 "이유미"이지만
웃기지 못할 것 같아서
이영자로 바꿀 정도로
사람을 웃기려는 사명으로
살아오다 보니

데뷔 27년 만에
처음으로 여자 방송인으로
KBS 예능 프로그램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볼 빨간 당신’으로 대상을
차지했습니다.

대상을 차지하고 나서
소감을  이렇게 밝혔는데요.

​ “먼저 끝까지
누가 뭐래도
나를 포기하기 않게
기둥이 돼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개그우먼이 되기까지
개그 콘테스트에
8번이나 도전했지만 
떨어졌고
수많은 오디션을 보면서도
 꿈을 잃지 않았답니다.

이영자씨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두가 나를 포기할 때
나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묵묵히 하다 보니
꿈의 자리에 와 있더라,
 
꿈을 포기하지 말라.
​나는 이 나이에도
 꿈을 꾼다.
​꿈을 멈추는 순간
나도 멈춘다"라고
 말합니다.

1991년에 MBC의
개그 콘테스트로 연예계에
데뷔하게 됩니다.

그 후로
MBC 오늘은 좋은 날,
SBS 기쁜 우리 토요일,
KBS 슈퍼 선데이 등에
출연해
"살아살아 내 살들아~",
"안 계시면 오라이~" 등의
유행어를 히트시키며
199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 개그맨으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연예계에
발을 들여 돈도 벌고,
​큰 인기를 누렸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답니다.

이영자씨의 고백입니다.
 “어린 나이에
유명세와 돈을 벌었고,
​내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인기가
떨어질까 늘 두려웠다.
​행복하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웃겨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려서
​밤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고
미래를 알고 싶어
점집에 가서 점을
치곤했답니다.

이영자씨가
예수 믿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sbs 관현악단을
지냈던 김정택 장로님이
1997년 1년 동안 진행해온
"아이 러브 코미디"라는
녹화를 마친 뒤 송별회식을
위해 가려는데

이영자 씨가
 갑자기 이렇게
물어봅니다.

"단장님,
숨겨놓은 여자 있죠?"
"엥... 뭐라고요?"

"제가 1년 내내 지켜봤는데
어떻게 단장님은 항상
싱글벙글하세요?"

그 말을 당황스러웠지만
무슨 말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나야 뭐 할렐루야를
하니까 늘 웃죠
늘 다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잖아요,
영자 씨는
웃을 일 많지 않아요?"

그랬더니 영자 씨가
"저는 그렇지 않아요
밤에 잠을 잘 못 자요."

순발력과 재치를
가지고 인기를 누리는
이영자 씨가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노력을 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항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부모와 형제들의 생활을
거의 책임지고 있던 상황이기에
더욱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갈등과 고민으로 시달리고
있었던 겁니다.

장소를 식당으로 옮기고 나서
일부러 영자 씨 옆으로 가서
내가 웃을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해주게 되었고

그곳에 같이 있던 홍진경 씨와
조연출자, 코디 담당자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몇 주 후에
이영자 씨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다시
몇 주 후에는 아버지, 오빠
올케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답니다.

한참 잘 나가던
이영자씨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는데요.
다이어트 비디오 파동‘을
 겪으며
​이 사건은 하나님께
온전히 회개하고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이영자씨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무척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힘들 때마다
낙심하지 않도록
꼭 붙들어 주셨어요.”

집사 직분도 받았다.
​아버지, 오빠와 올케 등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했답니다.
   
이영자씨는
서울 충신교회
 연예인 선교회 회원으로
정기적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신앙상담도 주고받는답니다.

서울드림교회에도
 출석하고 있다.
 

충신교회 연예인 회원으로는
개그우먼, 박미선 송은이 김영철과
탤런트 김석훈, 한상진, 가수 황보가
함께 나누고 있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스펀지" 좋은 나라 운동 본부"
"사이다" 하이파이브"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중계 때는
유일한 여자 MC까지 맡게 되고

아침 6시 뉴스광장의
앵커를 진행한
예쁜 외모와 잘 전달되는 말투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대한민국의 KBS 대표적인
이정민 아나운서는

2012년 5월 26일
MBC 뉴스 앵커 출신인
조정민 목사의 주례로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요.

남편과의 만남도
교회 오빠라고 할 수 있는
3살 연상이며
이비인후과 의사인데요.

교회 안에서 모임을 통해서
서로 호감으로 가까워졌고
6개월 만에
드디어 결혼을 하여
하나님이 딸을 선물로
주셨답니다.

이정민 아나운서는
힘든 출산과 육아 속에서도
가정과 일, 엄마와 아나운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정도로
열심인데요.

그럼 이정민 아나운서는
언제 신앙생활을 시작했을까요?

원래는 집안이
불교 집안이었답니다.

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는 분이셨고
아버지는 불교 재단 동국
대학의 직원이셨답니다.

그런 그녀가 기독교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추첨 원서 쓸 때
살던 동네에서 제일 선호하는
곳이 미션 스쿨이였답니다.

 예일여고의 반에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아이가
이정인 아나운서뿐이였다네요.

고등학교 때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4명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모두
매일 새벽예배를 드릴 정도로
열심히 하는 분들이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친구들에게
영향을 받게 되었고
1년 정도 멀리서 친구들을
관찰하면서 지켜보게 됩니다.

이정민 아나운서의 고백입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멀리서
친구들을 늘 관찰하듯 했죠
그러다 보니 저 스스로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미션스쿨에서는
교회 다녀온 증거로
주보를 내야 하는데

이전에는 친구에게 한 장만
가져와서 제출했는데
이번에는 직접 가져와야 되겠다
라고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혼자 교회를 찾아갔는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저를 강하게 이끌어 주셨어요"

특히 신앙이 갑자기 성장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는데요.

2학년 때 동네 교회에서
집회가 열려 독서실에 간다고
하고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서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목사님이 다들 눈 감으라고
하시면서

"오늘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 오시기를 원하는
사람은 손들어"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용기가 생겨
손을 들게 되었고

그 순간 밑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밀려
올라오더니 위에서
팍 터지는 것 같았답니다.

이정민 아나운서의 고백입니다.

"제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예수님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회개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때 처음으로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기도의 사람이 되어
고3 때는 매일 기도실에
가서 기도를 했답니다.

사실 그때에 본인이
두려움이 많고 미래에 대한
고민과 대학입시의
불안감에 주님께 매달리게
된 것이랍니다.

기도의 제목은 오직
하나였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살수 있을까요?"

이렇게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맡기니

당연히 기독교 대학 계통으로
가게 될 줄 알았답니다.

때 마침 고3 때 특별 전형으로
E 대에 갈수 있었는데
성적이 333점 커트라인에서
330점이 되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때 집안에 본인을 포함해서
쌍둥이 동생 둘까지 3명이
재수를 해서 아빠가
동국대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오게 되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답니다.

결국 동국대에 들어가게 되고
정말 불교 집안이 싫었는데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은
스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싫었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답니다.

"네가 만약에 원하는 대학으로
갔다면 넌 날 버렸을 거야"

본인의 성격이 밝고 명랑해서
친구들과 사귀면 타락했을지도
몰랐다는 거예요

이정민 아나운서의 고백입니다.

"내 생각은 크리스천
 대학가는 것이 맞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방향을 틀어서라도 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셨어요"

그러면서 가슴속에
남은 꿈이 있었는데
그것이 방송일이었답니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너는 말 잘하는 아이니까
아나운서 하면 되겠네"

그 말을 그대로 순수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요.

막상 그 일을 하려고
하니 잘나고 예쁘고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답니다.

어떤 친구는 빽도
있어서 든든했는데
본인은 하나라도
해당사항이 없었다네요.

그러던 중에 농촌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중에
레크리에이션 진행을 맡게 되었고

그때에 이정민 씨의 말에
호응해 주고 웃어주는 분들이
너무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서
그 순간 "나는 이길이다"라고
확신이 생겼답니다.

아나운서 준비를 하면서
토익의 성적이 좋지 못했고
마침 마지막 시험 기회인데
새봄맞이 성경학교하고
겹치게 되었답니다.

한 달 내내 성경학교
준비를 하느라 시험 준비를
제대로 못한 겁니다.

그때 외우던 말씀이
마태복음 6장 33절의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였답니다.

그런데 토익시험이 최고 점수가
나오게 되었고 합격을 하게됩니다

이런 일도 있었답니다.

첫 시험을 SBS에서 봤는데
4차 최종에서 떨어졌고
그다음에 KBS에서 1차에서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가을쯤에 SBS에서 전화가
와서 골프채널에서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해서

그곳에서 하게 되었는데
골프채널에서 최선을 다했는데
마침 KBS 사장님이 보고 계셨고
나중에 다시 시험 준비를 하여
KBS에 다시 도전을 하였고

5차 최종에서 1300명이 지원을
했고 그곳에서 10명까지 줄여 가는데
면접에서 사장님이 골프에 관해서
물으신 것이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했던 골프채널의
애청자이신 것입니다.

언제 난 다른 아나운서처럼
특별히 똑똑하지도 않고
특별한 빽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이
본인의 빽이었답니다.

아나운서로서 많은 일을
맡겨주셨는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부담과 두려움에 있을 때

고등학교 때부터 항상
붙들고 있었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이사야 41:10의 말씀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실제로 방송국에 들어와서 보니
아나운서의 영향력이 사회에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나운서의 실수나 잘못된
판단이 용납이 되지 않아서
부담감이 있었지만
감사하답니다.

이정민 아나운서의 고백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걸 알리고
나니까 사실 더 부담이 되긴 해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저 감사할 뿐이에요

내가 뭔데 하나님이
 이렇게
날 사랑해주시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세워주시고
다름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으니까요"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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