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리더 :: 크리스천 리더

성경이 강조하는
리더십의 자질은
굳게 서서 버티는 것이다.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영적 지도자들이 
 당시 초대교회들에게 보내는
목회서신에서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굳게 서서 버텨라,
강건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한 번의 화끈한
싸움을 치르는 능력이 아니라

계속되는 힘든 하루하루의
싸움에서 도망가지 않고
버텨내는 신실함과
강인함을 필요로 한다.

신약성경에서 ‘강한 것’과
‘영적 성숙’은 동의어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상처를 잘 받고 기복이 심하다
조금만 시련이 오면
확 가라앉아버린다. 

 조금만 힘들면 도망가버린다.

원수 사탄이 그런 사람들의
감정을 마구 흔들어댄다. 

 그래서 조금만 힘들면 
 다 도망가버리기 일쑤였다.

하나님은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을
절대 들어 쓰시지 않는다.

힘들어도 기도하며
다시 일어나 계속해야 한다.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당신 안에,
위에, 옆에 서 계신다.

한홍 목사
 <아멘 다음이 중요하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2000년 이승환의
‘그대가 그대를’의
뮤직비디오로 데뷔하여
MBC TV '논스톱 3', KBS 2TV '백설공주'
KBS 1TV '광개토 대왕' tvN '연애조작단;
시라노'에 출연하였고

연기뿐만 아니라, 모델, MC,
라디오 DJ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당대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손꼽히며
화려한 삶을 살던 김정화 씨는

CCM 가수 겸 작곡가
유은성과 결혼하여
벌써 두 아이의 엄마로
행복의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요.

그녀에게도 남모를 시련이 있었다.

모태신앙이었던 김정화 씨는
우연히 길거리 캐스팅이 되면서
방송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나중에는 바빠서
신앙생활을 못하게 됩니다.

​일요일의 SBS 인기가요
진행을 하다 보니 주일예배는
상상도 못한 거죠.
그러다 보니 우울해지고
힘들었답니다. ​

성격도 소심해서
누구와도 이야기를 못했고
가족과도 만날 시간이
없었기에
​“왜 나를 연예인으로 만드셨어요?”
라고 기도할 정도였답니다.

가장 왕성한 시기에
우울했는데
그녀가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하나님과 그녀의 중심을 잡아
준 엄마의 중보기도였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믿음의 유산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처음 어머니가 암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았다는데요.

어머니는 개척교회를 섬기면서
주일 식사를 도맡아하셨고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빠짐없이 드렸답니다.

밤샘 촬영하고 지금쯤 엄마가
있겠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가면
목사님과 어머님이 단둘이 예배를
드리고 계셔서 이젠 셋이서
예배를 드렸답니다.

이렇게 헌신적인 어머니가
아프시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했답니다.

한 번은 어머님이 기도원에
다녀와서는 응답받았다고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수고했다"
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마지막은 병원에서
한 달을 먹지도 못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시면서도
하루에 두 번 예배를
드리시고

마지막에는
장기기증을 하시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김태우 씨가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이 있는데
가자고 제의가 들어와서
좋다고 가게 됩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우간다에
간 것이 축복으로
바뀌게 됩니다.

한국 기아대책 기구 홍보대사로
김정화 자매가 자신이 결연한
9살 소녀 아그네스를 만나게 됩니다.

김정화 씨가 마음으로
낳은 딸인데요.

아그네스라는 소녀는
에이즈에 걸렸는데
에이즈에 걸린 부모는
아그네스 3살 때 죽었고
역시 에이즈에 걸린
이모집에 살고 있었답니다.

그곳에서 부모의 입장에서
빨래, 설거지, 식사 준비
학교에서 선생님과 면담 등
5일 동안 함께 한 것이지요.

"아그네스 만나고
한국에 돌아와
제가 가장 크게 변한 건
하나님이랑 깊은 교제를
시작하게 된 것이에요.

 아프리카가
어렵다는 말은 들었지만
 제 눈으로 보고 오게 됐고,
내 딸이,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 현실에 있다는 걸 생각하니까
너무 마음이 아픈 거예요.

그러니 기도할 수밖에 없었어요.
집 앞 교회 금요철야 가서
모자 푹 눌러 쓰고 맨 뒤에
 앉아 엄청 울고 기도했어요."

그러면서 김정화 씨는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이
되었고

고난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정화 씨의 아픔과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예비해 놓으신 선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우리들에게는
CCM 작곡가로
유명한 유은성 씨와
결혼을 발표하였는데요.

(국제구호단체)
기아대책 홍보대사인
두 사람은 기아대책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었고

​ 2012년 정화 양이
 에세이 <안녕, 아그네스!>를 출간하면서
녹음한 동명의 노래 '안녕, 아그네스!'를
작곡한 작곡가이자 CCM 가수 유은성 님"이
작곡을 맡으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고

또한 '안녕, 아그네스!'를 작업하고
녹음하는 과정에서 사랑을 키워가게 됐다"
라고 했습니다. ​

2012년 연말에
엄마 돌아가시고 교제를 시작했는데,

데이트할 때 시간의
십일조를 같이 드려보자는
제안을 제가 했어요.

같이 큐티 나눔을
해보자는 거였는데요,

이전에 다니던 그대로
방배동에 있는 늘 함께 교회에
지금도 출석하고 있답니다.

가장 화려한 시기에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때 하나님은 어머니의
아픔과 마음의 낳은 딸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의 특별 이벤트인
남편을 만나게 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개그맨 고명환 씨를 소개하려고
하니 아내 되는 배우 임지은 씨와의
만남이 화제가 된 적 있는데요.

두 커플은 17년 전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 동반 출연하면서
만나 서로에 대한 사랑과 우정을
나누다가 같은 신앙의 바탕으로
하나님의 만남의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2012년에 1월부터 정식으로
사귀어서 교제를 시작한 후에
임지은이 다니던 교회로 옮겨
신앙생활을 이어갈 정도였답니다.

MBC 방송 "능력자"에 출연하여
고명환 씨가 아내 임지은과의
만남 중에 떡볶이를 먹는 중에
반했다고 합니다.

그럼 남편 고명환씨를
소개해볼까요.

드라마마다
맛깔나는 감초 역할로
안방극장에서 사랑받고 있는
연기하는 개그맨, 고명환씨는
현제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출석하고 계시는데요. ​

대학에서 연극 영화과를
전공한 그는
1888년 영화 "독불장군"의
단역으로 영화배우로
데뷔를 했지만
인기를 얻지 못하다가

이후 1997년 MBC 공채
8기 개그맨으로 데뷔하면서
인기를 얻게 됩니다.

문천식과 함께한
“와룡봉추”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그는 
정통 코미디뿐 아니라,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을 오가며 
만능 엔터테이너로
주목받아왔는데요. 

요즘에는 사업도
잘되고 있는데요.

원래는 연극 영화과에
들어가기 위해 삼수를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7개월 정도를
기다리다가 가게 되었답니다.

연극의 꿈을 가지고
왔는데 광대를
자꾸 시켜서
주인공 하고 싶었는데
결국 개그맨으로
가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고등학교 때에 잠깐
교회에 다녔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의지력이
강했답니다.

무명생활 7년 만에
문천식과 콤비
"와룡봉추"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같은 동료인 문천식 씨가
모태신앙에 형님이
목사님으로 계셔서
고명환 씨를 전도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었답니다.

그 기도와 노력이
나중에 열매로 나타나게
된 것이지요.

어릴 때부터 가난에 힘들게
살았기에 갑자기 돈이
들어오니 행복했지만
그것도 잠시 6개월이었고

스타라는 것을
유지하는 것에 불안과
잠이 안 와서 술만 먹게 되고
참 행복이 없었답니다.

하지만 진정한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2005년 드라마 해신
18회 녹화가 끝나고 오는 길에
매니저의 졸음운전으로
트럭과 충돌해서

뇌출혈과 심장출혈,
허파에 피가 차고
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게 됩니다.

죽음과의 갈림길에서
3일 안에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소견으로
자신이 너무 큰 충격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신우회 예배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찾아오셔서
기도해 주십니다.

고명환 씨가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합니다.

아플 때에 은혜를 받고
결국 수술을 한 번도
받지 않고 20일 만에
기도를 받고는
퇴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
나가지는 않았다는 데요.

퇴원 후 대학원도 다녀보고
다이어트도 해서
책도 출간해 보고
그러나 공허함을 채울 수가
없었답니다.

그의 삶이 송두리째 변화되는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났다.

2011년 12월 31일 날​
너무 술을 먹어서
그날은 집에 있겠다고 해서
책을 읽고 있는데

오후 3시에 탤런트 임지은 씨가
​오랜만에 전화를 하면서
설명도 없이 "너 오늘 교회 갈래."
그런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라고 해 버린 것입니다.

친구 손에 이끌려
나온 송구영신예배.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만지기 시작하셨다.

​기도하는데 친구들이
양손을 잡고 기도하는데

기도도 할 줄 몰라서
"하나님 오랜만입니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 손의 느낌이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지게 됩니다.

마침 그 다음날이
주일이어서 이제는
교회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3주 정도 너무 좋았답니다.

그런데 사람 관계로 힘들게
되면서 이것은 사단이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철야예배까지
참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할 줄
모르니 "교회를 못 오게
한 것 같아요, 교회 오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점점 더 갈등이 많아지고
시험이 들게 됩니다.

그냥 가자 단지
교회 가서 생각하자
그럼 교회에 나오면
또 다른 생각이 들게 됩니다.

교회 부흥회가 있고
가기 싫었지만 갑니다.

​하루 전날 큰 소리로
싸우게 되었고
욕하고 욱하게 되었던 것이
기도하는데

"아 내가 먼지만도
못한 내자신이였구나."
는 생각이 가슴에서
부터 다가와서
복받쳐 오르는 눈물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옆에 사람에게
당해가 될까 봐
멈추려고 해도
통곡하게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릴 때부터 잘못된
생각들이 필름처럼
지나가게 되고

그날 처음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됐다
그만 울어라."라고 하십니다.

고명환 씨가 본인도
모르게 소리 쳐지는데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답니다.

그때부터 삶의
질서가 생기고
새 생명의 인생을 살아
가게 됩니다.
​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CCM가수 소향은
 시집식구들로 구성된
CCM밴드 포스를 결성해
국내를 비롯한 해외에서
 사역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대표적인 찬양으로
‘반석 위에’, ‘피난처’,
‘나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등이 있다. 
  
동양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4옥타브
이상의 음역을
 소화할 수 있어
"한국의
머라이어 캐리"라는
칭호를 얻었다.

CCM만 고집하던 그가
방송에 출연하게 되면서
나가수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요.

어떤 이유로 일반방송에
출연하게 된 동기를
볼까요.

그가 하는 말입니다.

“몇 번
출연제의가 있었는데,
앨범 작업과
유럽 투어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어요.

CCM가수가
대중무대에 서는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부담도 있었죠.”

고민하던 차에 그는
‘CCM으로 출발했지만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대중음악을 한다’는
세계적인 록밴드
U2(유투)의 보컬
보노의 이야기를
접하게 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게 됐다.

그럼 어떻게 신앙을
시작하게 되었나면

소향은
고등학교 3학년
언니와 함께 간 교회
수련회에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여름수련회였던 같아요.
무언지 모를 뜨거운
마음을 어떻게
주체 할 수가 없었죠.

수련회를 다녀와서도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길을 걷다가도
‘예수님 사랑해요’라고
외치기도 했어요” 

CCM 가수로
데뷔한 스무살 어느날,
새벽 기도 중에
"결혼을 행하지 않으면
유익이 없으리라" 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막 교제를 시작하던
CCM 그룹 POS 리더인
김희준 씨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출석하던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아들이었던
남편을 만나
스무 살에 결혼을 하고,

시댁 식구들의
사랑에 행복을
느낀 것도 잠시.
결혼 후 3개월만에
자궁암이라는
청천병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간단한 근종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고 있었는데
초음파에서 발견되지
 않은 암 덩어리가
 발견된 거예요.

병원에서는
결혼하지 않았으면
산부인과에 올 일도 없고,
죽었을 거라고 했어요.

네 시간 동안
수술을 하고
회복하는 기간 동안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살리시기 위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하셨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경험했기에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소망은 강렬했다.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셀린 디온 등의 노래를 귀
기울여 듣고 한 구절 한 구절
똑같이 따라 부르려 애썼다.

“머라이어 캐리 앨범은
 1000번 이상을 들으며
곡조를 완전히 외웠어요.”

몸이
너무 힘들어서
진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날
교회에 사역을 가서
‘깨진 항아리’에
대한 말씀을 듣고
‘아, 내가 바로
깨진 항아리였구나!’를 느꼈죠.

깨진 저를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농부가 밭에
물을 대기 위해
냇가에서 두 항아리에
물을 담아 옮기는데,
한 항아리가
깨져 있었데요.

그래서 냇가에서
물을 길어서 밭까지
옮긴 후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면
물이 반도
남아 있지 않았죠.

답답해진 깨진
항아리가
농부에게 물었어요.

'주인님 뒤 좀 보세요.
제가 깨져서
물이 줄줄 세잖아요.
새 항아리를 쓰시면
힘도 덜 들 거에요.'

그러자
농부가 말했어요.
'뒤를 바라보렴.
길에 활짝 핀 저
꽃들은
너 때문에 사는 걸'

하나님이 쓰시는데
우리들이 깨어진
항아리같고
물이 줄줄새지만
그것때문에
꽃들이 산다는 것은

곧 우리들이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기 위해
부족한
우리들을
쓰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인간의 두뇌는
기본적으로 크기나
정보 수용량이 비슷하다.

유전학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데
결과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성장과정에서 그들의 부모가
제공한 정보에 있다.

부모가
긴 안목을 가지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이 있다면
큰 그릇을 만들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셈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 부모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아이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세계적인 발명왕 에디슨은
그의 전기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하루도
어머니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항상
이해하고 믿어주셨습니다.

어려서 학교 선생님이
날 바보라고 퇴학시켰을 때,
나는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만은
나를 믿어주셨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에디슨이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불과 3개월 만에 학교에서
바보취급을 받고
퇴학당한 것이
안타까웠던 어머니는
교사 경험을 살려 에디슨을
직접 가르치기로 한다.

 아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겠다고

헛간에 불을 지르는
에디슨을 보고
크게 꾸짖지 않고 한 곳에만
 열중하는 에디슨의 장점을
발견하였다. 

 천재 물리학자로 추앙받는
아인슈타인도 어머니가 들려준
‘한마디의 말’ 때문에 낙제생에서
천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네 살이 될 때까지
말을 제대로 못했고,
 학교에 들어가서도
수학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낙제를 받았다.

담임선생님조차
다른 아이들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그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어머니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너는 세상의
다른 아이들에게 없는
훌륭한 장점이 있단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너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그 길을 찾아가야 한다.
너는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처럼 부모의 절대적인
사랑과 따뜻한 격려가 좌절감이나
자책감에 빠진
아이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자아가 약한 아이들에게는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줄
단 한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비뚤어지지 않는다.

여러분은 하얀 백지와 같은
아이들의 뇌에 어떤 정보를
들려주고 있습니까?

부정적인 말이 쌓이면
뇌에 블록이 생겨서
가스가 차게 되지만
긍정적인 말이 쌓이면
뇌에는
시원한 고속도로가 뚫린다.

그 고속도로에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정보와 함께 시공을 초월한
우주의 정보도 자유롭게
실어 나를 수 있다.

우리의 뇌는
본래 완전하다.
주인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좋은 뇌도 있고 나쁜 뇌도 된다.

악한 뇌도 되고
선한 뇌도 된다.

자녀의 현재 모습이
영 미덥지 못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는 아이를 앉혀놓고
사랑을 가득 담아
이렇게 암시를 걸어보기 바란다. 

 “너는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성을 가지고 있단다.”

“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너는 이 세상에 뜻을
가지고 태어났단다.”

“엄마는 너를
사랑하고 너를 믿어.”

단언하건대 뇌는 틀림없이
그렇게 믿고 자신의
잠재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이승헌의
"마인드디자인"중에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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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나는 아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치료자이시니
난 괜찮습니다.

나는 무명씨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알아주시니
난 괜찮습니다.

나는 경제적으로
쪼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공급자이시니
난 괜찮습니다.

나는 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힘이 되시니
난 괜찮습니다.

나는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난 괜찮습니다.

나는 예상치 못한 때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나의 영생이시니
난 괜찮습니다.

주님이 변함없는
나의 선한 목자이시니
난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오늘과 내일을 위한
나의 고백이며 기도입니다.

박광철 목사
<말씀의 향기>
[죠이휄로쉽교회]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드라마 "순수"종이학"
"나는 그녀가 좋다""웨딩"등
수많은 인기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활동하며

​요즘 대세인 일일드라마
"다시 첫사랑"이 시청률
20%를 넘어서며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는
명세빈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처음 데뷔를 하게 된
계기가 재미있는데요.

​1996년 백화점에서
친구와 같이 쇼핑을 하던 중에
평소 팬으로서 좋아하던
신승훈 씨를 보고
특히 오빠가 노래를
좋아해서 팬이기에
오빠를 위해서 용기를 내고
가서​ 사인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신승훈 씨가 무얼 하나
따라다니다가 부끄럽고 민망해서
밖으로 나왔는데 5월인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건 분명히 신승훈 씨를
다시 보라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시 신승훈 씨를 찾아가는데
매니저를 보게 되었는데

갑자기 매니저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혹시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생각 없으세요?"

본인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이를 본 당시
신승훈의 연예 기획사
관계자의 눈에 띄어
신승훈의 뮤직비디오
출연 제의를 받고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면서
연예계에 입문했습니다.

​그 후에
캔커피 레쓰비 CF에서
"저 이번에 내려요."로
CF로 국민 여동생이라는
인기를 얻게 됩니다.

윤석호 감독의 "순수"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명세빈 씨는 사실 어릴 때에
어머니에게 연기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던 것을
기억하면서
결국 하나님이 꿈을
이루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럼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모태신앙으로써 어머니를
따라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여
어머니를 따라 기도원에 가기도
할 정도였다는데요

신앙생활은 하였지만
바쁘다 보니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가 없어서 신앙이
자라지 못했는데

분당에서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김영준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시는
기쁜 소식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신앙이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신앙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답니다.

신앙의 맛을 느끼고는
셀 모임, 수요예배,
금요철야까지
참석하였고
중 고등부 교사까지
맡을 정도였답니다.

방송인 박지윤 씨도
 명세빈의
어머니가 전도를 하셔서
결국 박지윤 씨가 모태신앙이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데뷔 초기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면서
하나씩 작품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니까
내 마음대로 인기를 위해서
작품을 하게 되었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선택을 주저했던
명세빈 씨가 신앙 생황에
열심히 믿게 된 계기가
있었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면서
이렇게 기도를 했답니다.

"이제는 나의 인기를 위해서
작품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겠습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신앙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 
그 후로부터 한번 안된다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한답니다.

명세빈 씨가 조안, 강성연 씨를
위해 기도해주고
함께 신앙을 나누고 있다고
합니다.

명세빈 씨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삶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지만
나쁠 때에 그것이 끝이 아니고
좋을 때에 그것이 항상 가지 않기에
내가 왜 이 자리에 서있는지를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세빈 씨는 요즘에는
하나님 앞에 서 있을수록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명세빈 씨는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말
사랑하세요,
어떤 고난과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라요,

항상 힘든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답니다,

하나님만 믿고 따라가세요"

방송 "택시"라는 예능에 나와서
자신의 짧은 결혼과 이혼의
아픔을 신앙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안에서 힐링이 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행을 많이 했다,
신앙이 저를 붙잡아주었습니다.
성경공부고 하고 기도도 하면서
저를 단단히 세워준 기간인 것
같아요"

결혼과  이혼 후에 그 아픔을
하나님 안에서 거하면서
이겨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명세빈 씨의 제2의 인생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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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 올림픽
탁구 여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탁구 여왕’으로
불렸던 양영자 씨는

잘 훈련된
선교사로 바뀌어
몽골에서 15년간
선교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처음 탁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담임선생님께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데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집중을 못하기에
그럼 탁구를 해보라는
제안을 받고
 시작을 했답니다.

그는
선수 시절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다.

중학교 때부터
팔꿈치 부상으로
 고생을 했고
병원에선 탁구를
그만두라고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국가대표를 꿈꿨던
그는 포기할 수 없었고
대신 주기적으로
진통제를
맞아야 했습니다.

 나중엔 진통제를
너무 많이 맞아
효과가 없을
정도가 됐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1984년
경기도 가평 한얼산
기도원에서 기적을
체험했다.

안수 기도를 받고
팔꿈치 부상이
완쾌된 것이지요. 

그는 고백하기를
그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셨다"라고
했다.

얼마 후엔 간염이
발목을 잡았고
연습을 제대로 못하면서
그의 기량은 떨어지니
​ 나중엔 국가대표팀에서
탈락하기까지 했다.

그때
주신 말씀이
잠언 24장 16절 말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이였답니다.

‘양영자의 시대는
갔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다.

86년 상비군을 거쳐
30여 게임을 치르면서
국가대표로 재발탁됐다.

생방송으로 전국에 방송된​
서울 올림픽에서 최강
중국을 환상의 팀인
현정화와 함께
무너뜨린것입니다.

 최강 중국을
꺾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나왔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날마다 기도해주시던
 어머니의 간암으로
먼저 천국에 가면서
우울증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람 만나기가 싫었고
아침에 해 뜨는 것이
싫었답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 의사와
지인의
도움으로 서서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당신 나 자신도
저의 상태를 몰랐었고
우울증 겪으면서
부족한 믿음을 확인하고
큐티를 통해 말씀묵상과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주신 말씀이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편 107편 10~11절 말씀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때를 위해
만남을 주셨는데
 이가 바로 남편
이영철선교사입니다.

 은퇴하고 제일모직에서
트레이너로 활동하던 때,
연합뉴스 국제부 기자였던
남편을 인도네시아에서
우연히 만났다.

남편은 같은 교회를
다니던 성도였고
자연스레
교제가 시작됐습니다.

1992년 5월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선교사를 꿈꾸던 남편은
이듬해 회사를 그만두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신학공부를 마친
남편과 함께
선교사로 떠나기 앞서
그는 96년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거기서 WEC 국제
선교회를 알게 됐고
6주간 선교 교육을 받았다.

드디어
 WEC 선교사로
1997년에  몽골 선교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공산 국가였던
몽골이 개방이 되어 
이때 하나님은
 양영자 선교사 부부를
몽골로 부르셨다.

교회를 시작했으나
선교 활동은
말처럼 쉽지 않았고
 언어와 문화 차이
때문에 힘들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안면
근육이 마비되면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때 주신 말씀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 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는
고린도후서 1장 4절
말씀입니다.

남편과 뿌리를 내린 곳은
울란바토르에서 차로
10시간 떨어진
‘생샨드’이었다.

선교 사역을 시작할 때
교인을 단 한 명.
하지만 지금은
200명으로 늘었다.

​그는 몽골을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하며
지금의 기도제목은
전 세계에 흩어진
몽골족 800만영을
주님께 말씀으로
세계를 정복하라는
귀한 통로가 되기
원한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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