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학자 배스티언(S.L.Bastian)은 거미를 관찰하는 중에 아주 신기한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배스티언이 관찰중인 거미는 나뭇가지나 덤불에 새끼들을 낳아 놓고, 잠시 그곳에서 자리를 떠나더라도 새끼들에게 위험이 닥치면 재빨리 돌아오곤 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새끼들의 위험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지 궁금했던 배스티언은 더욱 자세하게 거미의 행동을 관찰하고는 그 이유를 알아내었습니다.
어미 거미는 새끼들에게 아주 가는 실을 달아 자신의 몸과 연결시켜 두었습니다.
만약 새끼들이 위협을 받거나 동요해 평소와 다른 움직임을 하게 되면, 다르게 움직이는 실의 진동을 통해 위험을 감지하고 새끼들을 보호하러 돌아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한 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40대 중반의 성실한 한 가장이 대장암에 걸렸다. 혼자 외롭게 투병생활을 하던 그는 용기를 내 암 환자 모임인 ‘아시안 암 환우회’에 참석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손 사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CT 촬영 결과를 병원에서 확인한 날이었다. “글쎄요, 제가 지금 바로 집에는 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디에라도 가서 마음 정리를 하고 싶은데, 정말 갈 곳이 없네요. 이런 초라한 모습을 다른 가족이나 친구한테 보이고 싶진 않고요. 그래서 사모님께 전화를 드리게 됐습니다.” “그럼 우리 집에 오세요. 제가 국수 한 그릇 말아드릴게요.” 대장암이 재발되면서 배변을 못하게 되어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그는 손 사모가 말아준 국수 한 그릇을 정말 맛있게 먹어치웠다. 국물까지 뚝딱 다 마신 그는 기운이 난다며 밝은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한 달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이미 한참 전 이야기지만,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던 손 사모 눈은 금새 충혈되었다. 질문에 얼마간 대답을 하던 손 사모의 눈에서는 결국 굵은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손경미 사모 (49·‘아시안 암 환우회’ 대표·미국 LA 은혜의여정교회)의 경우는 그것이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다.
나는 고난과 아픔을 경험하는 가운데 ‘은혜’라는 선물을 받았다. 산소 호흡기를 꽂고 숨을 쉴 때 제 스스로 숨 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은혜인지 알았다.
입으로 말만 할 수 있다면 주님만 증거하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임파선 제거 수술을 한 후에 팔을 올릴 수 없었을 때는 손들고 찬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살을 찢는 아픔으로 재활훈련을 거친 뒤에야 기적처럼 손을 번쩍 들 수 있었는데,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오른손을 높이 들고 큰소리로 찬양을 부른다. 산소 호흡기를 목에 넣고 말도 못하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팔을 높이 들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나는 늘 거울을 보며 입가에 미소 띠는 연습을 한다. 비록 뇌종양으로 두통에 시달리고, 심한 근육통으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 때도 많지만 나의 영혼만큼은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미소 지으려 애를 쓴다. 아무리 아파도 아직까지 걸어 다닐 수 있고, 코로 숨을 쉴 수 있고, 눈으로 세상을 볼 수도 있고, 입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나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으니 나는 모든 것을 가진 암 환자이다.
어떤 이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사역하는 것을 걱정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암 진단을 받은 순간 죽었고, 지금 사는 것은 보너스 인생이라고 말한다. 환우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다가 너무 지쳐서 삶의 시간이 반으로 줄어든다 해도 나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으로 사는 인생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출처:손경미사모의 "ITH YOU 당신에게 힘이 될게요" 중에서
나는 연구소를 사직했으나, 곧바로 중국으로 갈 수는 없었다. 이미 스탠포드대학교와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로 약속했는데, 갑작스럽게 약속을 파기하고 관련된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1년 정도 연구를 수행한 후에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미 한국의 연구소에 사표를 낼 때 생활비 지원을 포기했기 때문에, 살고 있던 집을 팔아서 돈을 가지고 갔다. 그 돈도 나중에 중국에서 제자들을 먹이고 돌보는 데 쓰느라 금세 바닥이 났지만 말이다.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우리 가족은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산호세에 있는 교회에 등록하여 성경공부를 하면서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아내는 머리로만 중국 선교에 동의했지, 마음으로는 확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내는 불안과 초조감을 늘 품고 있으면서 가끔 내게 중국에 안 가면 안 되느냐고 묻곤 했다. 어떤 때는 꼭 중국으로 가지 않아도 선교하는 방법이 있다고도 말하는 등 변덕을 부렸다. 아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집 안 청소는 거의 내 차지였는데, 진공청소기를 돌릴 때마다 나는 늘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카펫에 있는 먼지나 휴지 조각들을 청소기로 모두 빨아들이듯이, 제 마누라 마음속에 있는 세상에 대한 미련,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을 제발 쏙쏙 빼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났을까, 하루는 아내가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에 오더니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이것저것 계산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계산이란 없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염려해서 되겠어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그날 주일예배 시간에 교회 목사님이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내의 가슴에 와 박힌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마음고생 하느라 수고한 아내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미국 시카고에 아주 행복한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스패포드 (Horatio G. Spafford). 그는 유명한 변호사이며 대학 교수였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네 딸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한번은 아내와 네 딸이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여객선 하브호가 영국배와 충돌해 승객 2백 26명이 익사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네 딸은 모두 익사하고 아내만 겨우 생명을 구했다. 스패포드는 사고현장에 도착해 딸들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다. 아내는 절망적인 슬픔 속에서도 남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여보 딸들은 지금 하늘나라에 있어요. 우리와 잠시 헤어져 있을 뿐이랍니다." 스패포드는 이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비극의 바다에서 시 한편을 지었다. '내 평생의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이것이 바로 찬송가 339장(침례교 찬송가)이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노래가 오늘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