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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국민 엄마라는
탤런트 김혜자 권사님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현제 남대문교회
권사님으로 계시는데요.

연예인들이 당당하게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본인은 당당하게
이렇게 고백한답니다.

김혜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성경에도 있잖아요.
네가 나를 모른척하면
나도 널 모른다고 하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우리는
‘난 어떤 사람을 존경해’라는
말은 잘 하면서
‘하나님을 좋아한다’는
말은 왜 꺼려 할까요?

저는 하나님이 없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어요”라고
 말했다. 

1941년 10월 25일
서울에서 출생한 김혜자 권사는
이화여자대학교 2학년 시절인
1961년 KBS 서울중앙방송
공채 1기 탤런트로 정식 데뷔하여
공채 1기로 시작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작품은
(전원일기) (사랑이 뭐길래)
(장미와 콩나물) (엄마가 뿔났다)
(눈이 부시게) 등으로
제2회 마닐라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동아연극상 여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88년 mbs 방송연기대상, 92년 방송대상,

2011년 영화《마더》로
미국 LA 영화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95년에는 최장수 전속 광고모델로
선정됐다.

1991년 월드비전
친선 홍보대사로 임명되었고,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신앙은 모태신앙으로
어렸을 때 다닌 교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방석에 앉아서
예배 보는 교회였어요.

그런데 만날
예배를 보고 나오면
좋은 신발이 없어지고
헌 신발이 있어요.

그러니까 청년부
어른들이 도둑을
잡아야 된다고 했어요.

신발 사이즈가 열 살
미만 애들 것이 없어지니
누군가가 와서 바꿔
신고 가겠지요.

 잡는다고 막 그러는데
전도사님이 이러셨어요.

 “놔둬라.
도둑질하다 하나님 만난다.
잡지 마라."라고 했어요.

 저는 그게
굉장히 어렸을 때인데도
평생 잊어지지가 않아요.

교회 문이 너무
굳게 닫혀 있잖아요.

그리고
이상한 사람
안 들이려 하고.
제 생각에는
그 전도사님처럼
도둑질하는 사람,
배고픈 사람 이런
사람들이 뭘 훔쳐 가려고
왔다가 뭘
얻어먹으려고 왔다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하나님을 너무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애인같이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나 이거 몰라요.
해줘요.
내가 못 하잖아요.

이거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떼를 잘 쓰는 것 같아요.

 그 대신 제가
 할 일은 정말 최선을
다 해서 해요.

그다음에는
이제 나는 몰라요.
​ 그렇게 얘기하죠.

새 드라마를
시작할 때나
새 연극을 할 때는
‘저를 책임져 줘요.

 나는 못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해 줘야지
나는 못해요.’

김혜자 권사님의
담배를 끊게 된
고백입니다.

첫 임신 때
입덧을 없애려
담배를 접한 후
나도 모르게
30년 골초가 되었다.

​집에서나
방송국에서나
늘 내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오죽했으면 연예계
‘체인 스모커’를 뽑을 때
늘 1위를 차지하곤 했을까.

​나는 흡연가라기보다는
애연가였다.

담배를 물었다 하면
필터만 남을 때까지 피웠고
폐 속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이며
참 맛있게 피웠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담배만은 포기할 수 없어
교회에 갈 때마다
“하나님,
이것만은 좀 봐 주세요”라고
기도하곤 했다.

​그런 내게 ‘사건’이
일어난 것은 6년 전 이맘때였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담배부터 피워 물었는데
이제껏 피던 맛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 껐다가
다시 불을 붙이기를 거듭했지만
쓰고 역겨운 맛뿐이었다.

​그날 밤 미국에 사는 딸이
전화를 했기에
“고은아, 정말 이상하다.
​담배 맛이 싫어졌어”라고
말했더니

딸이 갑자기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며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하나님이
아름답게 지어 주신 몸을
담배 따위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이렇게 빨리 들어주실 줄 몰랐어.”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담배를 피워 온 엄마에게
차마 담배를 끊으라는
말은 못하고

무려 백일 동안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새벽 기도를 다녔다는
딸아이의 말을 듣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로 담배와의
길고 긴 인연이 끊겼다.

​다행히도
금단현상은 전혀 없었다.

​누가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워도 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금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의 힘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

김혜자 권사님의
기아 돕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
 

‘기아 아동 돕기’는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어요.

 드라마 끝나고
11년 전에 어디로
여행 가려고 할 때
월드비전 회장님이,
그때가 우리나라가
도움을 받기만 하다가
우리가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뀐 해예요.

 우리가 제일 먼저
돕는 나라가 에티오피아인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

다른 나라도
유명한 배우나 가수가
이런 데 참여하면 사람들이
그 얘기에 주목하고
좋은 결과가 나와서
애들을 도울 수 있다고 해서
시작한 거예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너무나 비참한, 가난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보고
여태까지 내가 죄인이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제가 월드비전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내가
모태 교인인데도
하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정말 희미하게
하나님께 가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저에게 확실하게
일을 맡기신 것 같아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그런데 거기에 꼭
크리스천들이 와서
봉사를 해요.

에티오피아를 방문했던
 당시를 회상하던 김혜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보이는 광경
하나하나가
드라마 세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평 남짓한 공간에서
열댓 명이 생활하고
젊은이들은
에이즈와 굶주림에
희망이 없이 살아간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희망을 지닌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태어나지 말아야 할
존재들이었다"라며

 "현실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동반 취재를 했던 언론에서는
나를 굉장한 인물로
그려놓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생지옥 같은 그곳이 싫어
'다시는 가지 않겠다'라는
마음뿐이었다"고 전했다. 

다시는 아프리카에
 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한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한 젊은 여성의 편지였다.


 구로공단에서
받은 월급을 모았다며
김혜자 권사에게 편지와 함께
보낸 한 여성의 정성에
그녀는 다시
아프리카 대륙으로,
인도로, 굶어죽어가
는 아이들에게 찾아갔다. 

9.11테러로 알려진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총칼을 들이댄
전쟁에서 계속되는,
배고픔과의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곳의 아이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오래 먹으면 실명하게 되는
독풀을 씹고 또 씹는다.

 하도 풀을 씹어서
입 주위는 퍼렇게
물까지 들었지만
생풀을 뜯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갈 뿐이라고 한다. 

김혜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라면
이들을 모른척해서는
안된다.

나도 처음에는
그곳이 싫고 무서웠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은
그들을 이렇게라도
돕는 것"이라며

"나는 먼지만도
못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쓰시기 위해
 유명한 여배우로
만드셨다고 생각한다.

그곳의 아이들이
나를 부르고 있다"라며
"이 아이들을
외면하지 말아달라.
아이들에게 날개 달린
천사가 되어 달라"라고
합니다.

김혜자 권사님에게도
고난이 찾아왔는데요.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야 한 한 것입니다.

김혜자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이별이란
슬픈 거잖아요.
 병실에서
남편과 둘이 있을 때
자기가 암이라니까
우리 남편이 가만있더라고요.

‘그렇지,
나도 암에 걸릴 수 있지’
그러더군요. 모르겠어요.

죽으면
하나님에게 가는 건데
그런 게 많이
힘이 됐겠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면서 내가 죽으면
자기가 힘들어서 어떡하나
그랬어요.

그러고 한 달 반 만에
갔으니 너무나 꿈같이,
현실이 아닌 것 같이….
그래도 세례도 받고
성찬식도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했으니 그게
 큰 위로가 됐고요."

김혜자 권사님은
 하나님은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은 대해 말할 때
‘복 주시는 분’이란 이야기를
자주 하잖아요.

그런데, 그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해요.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해요”라고
고백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1968년 TBC 방송국의
공채 6기로 선발되어
반공 드라마 "추격자"를
시작으로 연기 48년의
중견 연기자로써

이후에 "야인시대"
"인어 아가씨"
"모래성"
"간첩 리철진"등
다수의 연기를 선보인
정영숙 권사는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데요.

48년이 다 돼가는
연예계 활동 외에
월드비전 친선대사,
한민족복지재단 홍보대사,
한기총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갱생보호공단 홍보대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 
  
정영숙 권사는
평북 선천이 고향이다.

할아버지가 장로였고
어머니는 권사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북한에서 지주고
믿는다는 이유로
숙청을 당해서
가족과 함께 3살 때
남한으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어릴 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성극과 성가대를
하였던 것들이 나중에
연기하는데 도움이 된것이
라고 하는데요.

그런데 중학교 졸업 때
큰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떨어지고
2차로 다시 넣어보니
숭의 여고 야간학교만
있어서 가기 싫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등록금이 없었는데
어머님이 가셔서
이곳은 미션스쿨이니
돈 없어도 받아달라고
학교 교장을 찾아가서
허락을 받기도 했답니다.

감사하게도 기독학교를
통해서 성가와 설교를
들으면서 기쁨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고

그 고난을 통해서
1차로 대학을 붙게 되면서
고난이 유익임을
고백합니다.

시편 119편 71편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래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1968년,
​아버지와의 오랜 씨름 끝에
​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지원하게 된 정영숙 권사님은
이화여자대학교
​진학을 원했던
​ 딸의 노력과 간절함은
​비싼 등록금으로 무마되고
​ 결국 그녀는 숙명여대에서
​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평범했던 그녀에게
​뜻밖의 일이 찾아왔는데,
바로 탤런트 모집 오디션이었다.

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 당당하게 배우로서의
​ 입지를 굳히게 된 그녀.
만약 이화여대를 택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정영숙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그 당시 이화여대는
​ 연기자 활동을 금했어요.

​입학 당시 제 뜻대로
​ 해주지 않은 아버지가
​ 왜 원망스럽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 대학 진학뿐 아니라
​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이뤄진 일이 없더라고요.

 제가 무지해서
​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 일마저도
​ 얼마 전에 깨닫고 이제야
​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 말을 전했어요."

화려할 것만
​같은 연기자 생활은
​ 오히려 그녀에게
​신앙 생활을 더욱 깊이
​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줬다.

대학교 2학년 때
봉사단체에서
섬김을 나누는데
어느 날 인도자가 같이
돌아가면서 기도하자고 하니

창피해서 나가지 않았고
나중에 후회를 합니다.

대학 졸업 때 추천제로
탤런트로 나가게 되었는데요.

그 당시에 특별한 탤런트를
모집해 보자고 하였고

숙대에서 모집하니
친구들의 추천으로
돈을 벌고 싶어서
시험을 보게 되었고

친구들이 화장을 해주어서
임신복 같은 옷을 입고
시험을 보러 갔답니다.

그리고 합격을 합니다.

추격자에 뽑히게 되었고
카메라 앞에 두려워서
우물 우물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직업이
아니지만 도와주세요"
정말 표정이 굳었지만
북한의 역할을 잘했다고
칭찬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계기가 있었답니다.

결혼하여 십일조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 드린 것은
그대로 응답하셨습니다.

결혼할 때에 70만 원
전세에서 시작을 하였지만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잠언 3장 9-10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 말씀처럼 응답하셔서
60평 아파트를
 응답 주셨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왔지만
​성경을 제대로
​ 읽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동료 연예인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됐고,

처음 연예인 교회가 생기고
고은아 집사님이 끌고 가서
같이 성경공부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연예인 교회를 다니지
않았기에 자주 가기가 힘들었고

탤런트 정재순 씨가 전화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여서
좋다고 했는데 그곳이
성경암송하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정재순 씨의
집에서 하는데
그래도 내가 수익이
더 많으니 우리 집에서
성경공부를 해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드디어 집에서
드리게 됩니다.

정영숙 권사님 집은
​ 매주 붐비게 됐다.

​성경공부를 위해 모인
​ 동료 연예인들을 식사로
​섬겼던 그녀의 섬김이
​지금은 나라와 세계를
​섬기는 일로 커져 갔다.

성경공부 모임은
98년 '한국TV연기자
​기독신우회'를
​조직화 하는 기초가 되었고,

기독신우회는
​자체적인 예배와
​성경공부 모임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웃과 교회를
​ 돌보는 일로 자라갔다.

정 권사는
연기자 신우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연기자 신우회에서는
각종 좋은 일을 많이 한다.

교도소 방문,
군부대 방문도 한다.

‘건너가게 하소서’ ‘퀸 에스더’
‘영문 밖의 길’ 등 성극(聖劇)에도
자주 참여한다.

연기를 통해
복음을 전한다는 보람과
하나님 앞에 모든 걸 바쳐야
한다는 믿음으로 임하고 있다.

또 나라를 위한
기도모임인 ‘에스더 모임’과
‘땅 밟기 기도모임’
 ‘사랑의 쌀 모임’도 계속하고
있답니다.

정영숙 권사님이 특히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기 시작한 것은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말씀 암송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좁혀가기 시작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강하게 영혼의 울림을
주셨답니다.

정영숙 권사님의 고백입니다.

"그때 저의 영혼을
강하게 울렸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는
히브리서 4장 12절이었어요,"

​연기자 생활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의 선한 마음을 계속
주셨고

이런 소망을 들어주셔서
월드비전의 친선대사가
되어 소말리아의 선교를
가게 되었고

1997년 국내 최초로
 대북지원 사업을
실시한 한민족복지재단의
홍보대사로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사실 정영숙 권사님의
고향이 평북 선천이랍니다.

어릴 때 외 할아버지가 사업을
하셨기에 집안이 넉넉했는데
어느 날 북쪽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아시고

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자리를
잡으라고 하셨고
그러다가 전쟁이 나서
이산가족이 되었답니다.

그런 실향민의 아픔을
가진 정 집사님은
북한을 향한 선교에
가슴이 뜨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48년이 다 돼가는
연예계 활동 외에
월드비전 친선대사,
한민족복지재단 홍보대사,
한기총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갱생보호공단 홍보대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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