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리더 :: '간증 모음' 카테고리의 글 목록 (3 Page)

CD 한 장으로 얼굴이
다 가려지는 여자이며
발레를 전공하였지만
심한 부상으로 결국
꿈을 접게 되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박소현 씨(집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1993년 SBS
"출발 서울의 아침"
리포터로 데뷔하였고

1993년 드라마
"내일은 사랑"에서
발레를  포기하고
국문과에 입학한 여대생으로
데뷔한 이후에

"종합병원, 도시남녀
맨발의 청춘, 장미 울타리
왕꽃선녀님, 가 문의 영광 등과
라디오 프로그램
"박소현의 러브게임"과
예능 "순간 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를 오랫동안
진행하고 있는데요.

처음에 발레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답니다.

몸이 약해서 집 앞에
생긴 발레리나의 예쁜
모습을 보고 시작하여서

초등학교 때부터 15년간
발레를 하면서 이화여대
무용과를 거치면서
꿈꾸던 발레를
무릎 부상으로
포기하게 됩니다.

수술을 해도 발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박소현 씨는 좌절했지만
하나님은 그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발레리나에서
 연예인이라는
새로운 길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잠언 말씀을 가장 좋아해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인도였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하죠,"

처음 방송 출연하게 된
계기가 있었답니다.

홍대에 놀려가서
방송 프로듀서를 만나고
나서 그분이 하는 말이
"너무 얼굴이 작은데
방송을 해보지 않겠어요."
라고 했는데

그때는
발레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나중에 몸이 다치면서
다시 전화가 와서
리포터로 시작하게 됩니다.

마침 리포터 중에서
예술을 전공한 사람을
뽑아야 된다고 해서​
리포터로 시작해서
드라마 여주인공도 해보고
MC도 보내되면서
쉽게 풀려나가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제가 여주인공을 할 때
경쟁이 심하였지만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지 않으시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어려서부터 온 가족이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주일날에는 아예 스케줄을
잡지 않고 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박소현 씨의 주일에 대한
고백입니다.

“제게 주일은 당연히
예배드리고 쉬는 날이에요.

연예인이 된 뒤에도
6일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 쉬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죠.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방송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입니다.

안식은 활력을 줍니다.

또 이 활력은 6일 동안
부지런히 일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 주죠.

제게 주일은 영적,
육적 재충전의 날이랍니다.

이 날은 결코
제가 양보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도 빠지지 않고
드리기를 즐거 한답니다.
​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게 된
시기가 초등학교 때에 친구들과
집 앞에 있는 교회를 다니면서
였다는데요.

중간에 굴곡 없이
중고등학교 때도
열심히 다녔답니다.

발레 할 때에도 항상
실수할까 봐서 기도가
더욱 절실하게 되었답니다.

언제 신앙의 낙심이
되었는가 하면은
본인이 그렇게 신앙생활하고
발레를 열심히 했는데
다쳤을 때였답니다.

박소현 씨의 고백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올까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라고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느끼면서
고백을 합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함께하신 하나님"
이심을 고백합니다.

박소현 씨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기도가 응답이 안된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다른 계획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본인이 발레의 꿈을
포기할 정도로 아픔을
주신 이유가
하나님의 발걸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2000년 mbc 11기 공채
개그우먼으로 데뷔하여
활발한 방송활동하고 있는
안선영씨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안선영씨가
F&A업체 대표이사인
서정관씨와 결혼하여
자녀까지 낳아
 알콩달콩 살고
있는데요.

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라온 환경이 어려워져서
초등학교 때는 봉지쌀을 사 먹고
어머니가 화장품 방문 판매를
통해 번 돈으로
경성대학 연극 영화과에
들어가게 되었고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영국 왕립 연극학교에 유학을
갔지만 한국에 IMF가 터지면서
 어머니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게 되어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후배의 권유로 개그맨에 응시를
했는데 합격을 하게 됩니다.

열심히 해서 4년 만에
 빚을 다 갚게 되었답니다.

안선영씨의 신앙생활을
어릴 때부터라는 데요.

어릴 때 어머니께서 화장품
방문판매를 가시고
교회 부근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교회 유치부 선생님이
전도를 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집안이 불교이었고
고등학교 때도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남자아이들의 전화가
온다고 교회 출석을 어머니께서
금지하시고는 교회를 다닐 수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안선영 씨를 사랑하셔서
부르시는 계기를 주신 것이지요.

sbs의 "안선영의 라디오가 좋다"는
진행을 3년간 맡으면서
나온 게스트 여덟 분 중에
일곱 분이 모태신앙에
크리스천인 겁니다.

그중에 목회자가 되겠다고
신학교를 간 가수 에스더가
있는데

하루는 방송 도중에
“아무개 가수 무슨
노래 듣겠습니다” 해놓고

노래 나가는 사이에
에스더에게
별 심각하지 않은
느낌으로 제가 이랬어요.

“에스더야,
너 요즘 남산에
무슨 개척교회 나간다면서?

목사님이 말씀 좋다며?
나 심도 있게
성경공부하고 싶은데,
거기 데려다주면 안 될까”

노래는 끝나 가는데
에스더가 그냥 아무 소리 않고
펑펑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머, 얘 왜 이래” 말리니까,
생방송이니까 간신히
참더니 이러더라고요.

“언니 위해
100일 특별새벽 기도했거든.
오늘이 100일째였거든!”
알고 봤더니요,

 게스트들끼리 짜고 저를 위해,
 제 신앙심에 불이 붙도록
 같이 중보기도하고 있었다고 해요.

그 후로 에스더와 함께
교회에 나가게 됩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부산 kbs 어린이 프로그램
MC가 되고
인터넷 방송 아나운서가 되고
서울에서 MBC 공채에
합격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MBC 공채 개그맨을 뽑을 당시에
마침 그 해에 박미선, 이경실을 이을
여자 MC를 뽑으라고 했는데

그때 안선영 씨가 준비한 것이
백지연의 앵커의 성대모사를
정장을 입고하게 된 것이
뽑히게 되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감사하다고 합니다.

안선영씨의 고백입니다.

"나는 내가 열심히 살아서
된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고,
 그러니 하나님 은혜로
 살았다 싶은 거지요."

 안선영씨에게 큰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사기 사건으로 많은 돈을
잃게 되는데
돈과 일에 대한 압박에
시달린 가운데
기도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안선영씨의 고백입니다.

“결국 이때
했던 기도로 인해
마음의 담이 허물어졌고,
어머니와의 담이 헐려서
 전도하는 계기가 됐다."라고
 합니다.

늘 일하면서 엄마를 원망했지만
이제 돈으로 자유롭게 되면서
어머니가 예수 믿게 되었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19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해
 ‘신의 아그네스’(1983),
 ‘딸에게 보내는 편지’(1995)
‘넌센스’(2001)
‘토요일밤의 열기’(2004)
‘브로드웨이 42번가’(2004)
‘사의 찬미’, ‘아가씨와 건달들’,
‘명성황후’ 등

뮤지컬과 연극을
오갔던 윤석화 씨는
지난 30년간 배우로
온몸을 불살랐다.

1994년부터
돌꽃 컴퍼니 대표를 맡고 있으며
현재 월간
객석의 발행인 겸 편집인,
설치극장
정미소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연출가로써
뮤지컬<톱햇>으로
영국 로런스 올리비에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항상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면 제일 먼저
기도로 시작한답니다.

이 작품을 하는 동안
아무런 사고도 없고
관객이 가득 차게 해달라고
한답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요?

그녀가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중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을 다녔고요,

 처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체험을 하게 된 것은
‘신의 아그네스’를 공연할 때입니다.

대 히트가 되면서
하루도 쉬지 못하고
장기 공연을 하다 보니

 6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해 감기에 걸렸는데
그것이 기관지염이 되고,
인후염이 되어
굉장히 고생했답니다.

그때 많이
 하나님을 원망했고
그때까지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답니다.

스타가 된 이유로
 모든 언론과 동료들은
  아픈 것도 질시를 했고,
편견으로 바라봤답니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저는 쓸쓸했고
아픔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기로 끝까지 버텼고,
남은 한 학기를 마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갈 때는
제 목소리를
완전히 잃은 상태였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면
목이 막혀
음정이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너무 절망스러워
며칠 밤을 울며 지샜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목소리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통 속에 있을 때에
후배의 권유로 목사님께
가서 안수기도를 받게
됩니다.

 그전에 교회에 가면
조용히 말씀만 듣고
나왔으면 좋겠는데
성도들이
‘아멘! 할렐루야!’ 하고 외치면
저는 무서워서 ‘어머.
왜 저래’ 하며 소리를 질렀답니다.

그러한 나이지만
워낙 다급하고
갈 곳이 없는 상황이기에
안수기도를 받게 되었고,
도중에 방언이 터졌습니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저는 성격이 부끄러움도 많고,
자존심도 강하여
남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는데
그때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흐르면서
기도 중에 방언이 터진 것입니다."

그렇게 첫 번째
성령의 체험을 했지만
믿고 싶지도 않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는
못했답니다.

그 후로 감사하게도
목소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성경 말씀을 듣고
"빈들에 마른 풀 같이"라는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다시 내 목소리를
찾게 된 것에 대한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와 막 울었답니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도
졸음이 왔는데 실컷 울고 나니
 목사님의 말씀이
천상에서 떨어져 제 귀에
딱 박히는 것 같았답니다.
 
이게 두 번째 성령체험인데,
그 말씀이 저에게 들어오고
난 후에는 모든 의심이 사라졌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한 알 한 알 씨앗처럼
천상에서 제 귀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라지게 되었고,
아무 의심 없이 성경 말씀을
사모하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금요철야 때에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왜, 연극배우는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아버지, 저는 정말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이 달란트를 귀한 축복으로 믿고 있는데
이 귀한 축복이 쓰이기 위해서는
일단 제가 취사할 곳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연극하는 것을
반대하셨던 어머님이
제가 7.5평에서 월세를
산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저의 식구들은 다
미국에서 살고
저만 한국에 있었습니다.

연극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래서 저의 식구들은
제가 한국에서
어떻게 사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이
저의 사정을 아신 것입니다.
어머님이 서울에 오셔서
그동안 모아뒀던 쌈짓돈으로
저에게 13평 전세 아파트를 하나
얻어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이 13평
전세 아파트를 얻어주신 것입니다.
그때  나이가
이미 서른이 넘었습니다.
저는 어머님이 가시자마자
그 집을 복덕방에 내놨습니다.

그 돈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서 1987년
제작한 작품이 ‘송 앤 댄스’라는
뮤지컬입니다.

금요철야예배와 새벽 기도 때
이작 품을 놓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온전히 주님께 의지하고
부르짖게 됩니다.

뮤지컬이 성공을 해서
다시 15평 아파트도 사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신 것이고
그때의 개포동 15평짜리
아파트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답니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저의
가장 친한 친구십니다.
제가 외로울 때
저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제가 너무 기뻐서 우쭐할 때는
저를 다시 제자리에 놓아주시며,
제가 부족한 것을
열심히 애통하면서 간구하면
그것을 마련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늘 고난을 주셔서
사실 인기를 누릴수 있는
여유가 없었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축복인데
하나님의 선물인
참 평안이랍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아버지는
연극배우 추송웅이고
작은오빠 역시
배우인 추상록이며,
남편은
뮤지컬 배우인 이석준인
연예인 집안의
 배우이자
이제는 영화감독인
추상미 감독을 소개합니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의 고아 1,500명이
 비밀리에 폴란드로 보내졌고

 폴란드 선생님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었고,
아이들도 선생님을
‘마마’, ‘파파’라 부르며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8년 후,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송환 명령을 받게 되었고

2018년, 아이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지금까지도
폴란드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영화를 가지고
다시 감독으로 돌아온
추상미 감독을
소개합니다.

추상미 감독은
고등학교까지는
성당에 다녔고

대학교 전기에 떨어지면서
그때 마침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다니시던 엄마가 하는 말
"네가 후기 시험이라도 붙으려 먼
교회에 다녀야 해"
라고 하면서 철야예배에 다니게
되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의 터치로
방언과 감동으로 평안함으로
후기 시험을 통해
대학교 합격하여서
1학년 때는 ccc에 활동하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국문과이다 보니
어려가지 학문과 철학을 접하면서
세상의 학문 철학들의 매력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젠 성경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았고
교회를 다니지 않고
연예인이 되면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2003년까지 방황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부르시게 됩니다.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2003년도에
생활의 발견에서
주연으로써 잘 나가게 되었고
이젠 잘 될 것 같다고 주위에서
말했는데

그 이후로
섭외가 뚝 끊기게 되면서
어머니, 오빠와 홍대 앞에
소극장을 지으면서 재정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오빠의 사업의 실패와
보증으로 가정의 어려움과
신앙도 튼튼하지 못했기에
서로 가족 간의 갈등까지
오게 되었답니다.

그 당시 친구 따라서
 온누리교회에 다니는데
문제의 해결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릴 때의 상처까지
치유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후로 5년간
성경공부를 하면서
당시 목사님이 인도하면서
성경 속의 인물들이 전부 상처를
통해서 쓰임 받게 되는 과정을
알게 되었답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연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남편까지
준비해 놓으셨답니다.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지만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와
갈등으로 공황장애가
오게 되어서
새로운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오래전부터
꿈꿔온 영화 연출,
창작을 위해 대학원
진학을 합니다.

그런데
아이 출산 후에 산후 우울증을
겪게 되면서 자신이 잊혀지는
모습과 남편은 일이
바빠서 늦게 들어오게 되었고
서로 관계의 어려움과 육아의
힘든 상황까지 왔답니다.

어느 누구도 우울증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어릴 때 가정의 상처와
부모님들의 갈등으로
가정에서 채우려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기대가 결혼의 갈등으로
상처가 우상이 되었음을
하나님이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
주위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분리 시키시며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신을 환상을
보게 되었답니다.

어느 날 소파에
눈을 감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지친 나를 안아서
십자가로 겹쳐서
못 박히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2시간 이상을 울었답니다.

1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산후 우울증으로
매일 아이가 죽는 악몽을
꾸던 시기였답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린 것에 것을
반복적으로 아이에게
느껴지게 되었는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가져가셨답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창문에
뛰어내리고 싶은 상황 속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서

"하나님 어떡하죠?"

하나님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
"괜찮다, 내가
너를 다시 세울 것이고
내가 너의 남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왜 죽음을 생각하느냐"

"내가 너를 정결한 신부로
다시 세울 것이다"

그 순간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이제 어떤 문제가 와도
주님만 바라보면 되는것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6개월은 날마다
"마라 나타"
주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고백만 나오더랍니다.

그때부터 이런 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을 텐데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고"

이제 궁금해지기
시작해서
본격적인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너를 하나님 나라의
예술가로 세우고 싶다"라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즌별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 메시지를 작품으로
만들라는 소명을 주셨답니다.

소명을 주신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작품을 만들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인생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막연했는데
그때 하나님께 또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저에게
 장편 영화의 소재를 주세요"

일주일을 야곱처럼
간절한 기도를 한지
일주일 후에 친한 후배가
일하는 출판사에
놀려가게 되었답니다.

그곳에 출판사에 사장님이
무슨 영화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보시길래

아이들이 나오는
성장영화에 관심이
있다고 했더니
그럼 북한 아이들,
한국 전쟁영화 아이들
소재가 있다고
하면서 넘겨주시는데

집에 와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확신이 필요했답니다.

자료를 넘기면서
북한의 아이들이
폴란드에 입양을 왔다가
북한의 천리마 운동이라는
조국 재건운동을
하면서

청소년 아이들을 다시
 북송을 시키면서
아이들은 두 번 부모를
잃게 됩니다.

그 당시 폴란드 선생님들이
쓴 일지에서 발견한
"주여!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우리로부터 아이들을
떼어 놓으십니까?"

이 글을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신앙 깊은 폴란드 교사들에 의해
양육되었던 전쟁고아들인 것이죠.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저 예산 다큐멘터리 영화이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답니다.

추상미 감독을 먼저
훈련과 과정을 통해
"먼저 예배자가 되어라"라고
하시면서 준비하게 합니다.

2018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
개봉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침 부산 영화제가
잃어버린 가족의 주제와
일치되게 하셨답니다.

추상미 감독도 자신의
어릴 때의 아빠를 잃었던
상처를 통해서 이 작품을
발견하였는데

폴란드 선생님들도 전쟁을
통한 상처를 통해서
이 아이들을 품게 되었답니다.

추상미 감독이 직접 가서
인터뷰를 하는데
지금도 살아계신 90살 된
폴란드 선생님이 하는 말

"우리가
기차역에 내린
까만 머리 까만 눈의
한국 고아들을
보았을 때
내 유년시절의 모습이 보여
그 아이들에게는
엄마 아빠가 필요하다"

그래서 자신들이
엄마 아빠가 되었답니다.

추상미 감독은
"우리들도 살아온 상처를 가지고
북한의 아픈 민족을 품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원해요"
라고 고백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1996년
MBC 탤런트 공채 25기로
연예계에 입문한 뒤

 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1996)’,
‘그녀는 짱(2003)’,
 ‘아내가 돌아왔다(2009)’,
‘위대한 조강지처(2015)’,
‘돌아온 복 단지(2017)’,

영화
‘이대로, 죽을 순 없다’(2005),
‘왕의 남자(2005)’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고 있는
배우 강성연 씨를
소개합니다.

2001~2002년에는
얼굴 없는 가수 컨셉으로
'보보'라는 이름으로
가수 활동도 했으며

 김형석이 작곡한 발라드곡
'늦은 후회'로 당시
음악방송 10위권에 드는 등
상당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어릴 때는
소심한 성격이었고
학교에서 발표를 하기
부끄러워하는
그런 아이였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음악을 좋아해서
어머니의 권유로
성악을 하게 되었는데
대학 진학에 실패를
하게 되었으며

다시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예술대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교수님의
권유로 방송 탤런트의
시험을 보게 되었고
합격을 합니다.

이전에는
내가 잘나서
탤런트로 잘 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29살 때
원하는 작품은
들어오지 않고
우울증이 심해서

무작정
가까운 동네 교회에
9시 저녁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답니다.

본인의
할머니와 어머니도
성당에 다니기에
따라다니기만 했으며
중, 고등학교 때 미션스쿨이어서
잠깐 예배와 찬양을 드린 것이
전부였답니다.

나중에
그것이 은혜였음을
알게 됩니다.

너무 힘들어서
간 교회에
가서 눈물 흘리면서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했고
눈을 떠보니 다시
집으로 도망갔답니다.

이제 또다시 시련이
찾아옵니다.

36살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연예계와 인연을 끊고
싶었답니다.

거의 포기하는 마음으로
하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하나님께서 남편을 만나게
해주시고 예수님을 믿게
해주셨답니다.

지금의 형부인 음악 연주자와
함께 하는 프로그램인데
그곳에서 멋있는 사람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답니다.

너무 편안해 보이고
남편을 보는데 너무
후광이 비치더랍니다.

이야기하는 중에
목사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고

나를 하나님께 이끌
파트너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바로 이 사람이라고 깨닫게
되었답니다.

현재는
시아버지가 사역하시는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답니다.

결혼이 삶의 피난처이며
무조건 행복할 줄 알았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
모든 것이 다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책임감과 영적인
긴장감 속에 살아가게
되었답니다.

또다시 어렵고 힘든
신앙생활과 결혼의 갈등으로
자신이 너무 하나님 앞에서
작아지게 모습이 되었는데

10년 넘게 믿음의 멘토가
되어준 배우 명세빈 씨가
있었답니다.

같은 말씀 모임이 있었는데
이전에는 부담이 되었지만
용기를 내어 먼저
이렇게 말했답니다.

언니 그 말씀 모임에
나 좀 데려가줘"
라고 했답니다.

강성연 씨의 고백입니다.

"나는 나약하고 도망가려고 만
하는데 내 주위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셨답니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은
가장 나에게 잘 맞는 분을
주셨답니다."

그곳에서
말씀과 교제를 나누면서
중보기도중에
울음보가 터지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내가 너를 발랄하고
활달하고 밝게 빚었는데
상처로 인해 네가 너무
나약해졌구나."

"내가 김가온이라는 친구를
보내줄 테니 그 손을 잡고
당당하게 이 문을 들어오렴."

"그때 주님의 손을
덥석 잡았어요."

원래는 웃음이 많았는데
웃음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주님을 만나고 나서
웃음을 찾게 되었답니다.

연기자로써 고충과
수면부족으로 힘들었는데
이젠 사람들에게도
깐깐한 모습이 아닌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을
말할 정도로 바뀌게
되었답니다.

이전에는 나 혼자
연기만 잘하면 된다고
했지만 이젠 스템들과
남편과 자녀들과 소통하는
사람으로 새로운 인생을
산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1982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뒤
가요계에 데뷔했으며

대표곡으로
"문밖에 있는 그대",
"장난감 병정",
"내일을 기다려" 등이 있는
라이브의 황제라고 불리는
가수 박강성 씨를 소개합니다.

요즘은 7080의 아이콘으로
불리기도 하죠

 그 당시에는
탁월한 가창력에 대한
찬사가 대단했지만
 대중적 인기로
연결되지 않았다.

화려하게 20대 초반에
데뷔했지만
슬럼프에 빠져들게 됩니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으며
알코올에 의지했답니다.

다른 친구 가수들은
"다른 가수들은 다 되는데
왜 너만 안 되니?"

그 말을 들으면 너무 힘들었답니다.

가슴속 슬픔, 외로움, 아픔,
절망감 등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이런 마음이 들었답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을까?"

주 2회 음주와
​하루에 4갑 정도의
담배를 피우면서
날마다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

이강성씨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여자가 있었는데
지금의 아내입니다.

박강성씨의
 노래가 너무 좋아
그의 무대를 쫓아다니다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분은 박강성씨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박강성씨를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신앙밖에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박강성 씨에게
 하나님을 제시했지만
예상대로 박강성씨는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다.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온 박강성씨에게
 여자는 물었습니다

“박강성 씨, 행복하세요?”

"지금까지 자기 방법대로
운전하며 살아왔는데도
불행하다면 한 번만
맡겨 보는 것 게 어때요?"

무덤덤한 박강성씨를 향해
한마디를 더 했다.

“하나님을 알면
행복해진답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

지금껏 살면서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답니다 .

자기와는
워낙 무관한 것이었다.

한데 하나님이
행복하게 해준다고 하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교회에 가게 됩니다.

전화를 걸어서 그 자매에게
교회를 어디로 가면 좋겠는가를
물어서 가게 됩니다.

두 달을 다녀봤지만 너무 힘들고
역시 자기와는 딴 세상이었답니다.

그때 그 여성팬인 자매가
"오빠는 금식 기도원을 가야
할 것 같네요."라고 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3일 금식을 작정하고
경기도 청평의
기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처음 갈 때는 주여 삼창과
방언을 하는데 이상했지만
그분들의 표정을 보니
달랐답니다.

마지막 날 내면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느껴진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사실 기도도 할 줄 모르고
하니 "죄송한데요
하나님 계시면 보여주세요."

 3일이 지난 후에
마지막에 금식하면서
지쳐있고 옷 하나를
3일까지 입기도 했답니다.

금식 기도원에서 목사님이
방에 오셨는데 응답받으셨냐고
하는데 너무 화가 나서
이렇게 목사님께 질문했답니다.

"왜 하나님은 차별을 하시나요
저에게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네요."

그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분명히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하신 말씀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있었답니다.

"주께 맡겨라"

3일 동안 계속적인
말씀이었답니다.

그래서 맡아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시는데
그때 목사님의 음성을 통해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내가 널 사랑한다.”
목놓아 울었습니다.

아직까지 혼자서
너무 힘들고 외로웠는데
주님이 사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때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30년 넘게
차곡차곡쟁여놓은
설움과 아픔을 한 번에 털어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
이강성씨의 생활은
 180도 바뀌었다.

그리고 영상으로 보여주시는데
어두운 터널 끝에서 자신이
서있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이제 나의 삶이 시작되는구나"
"혹시 저를 구원해 주셨다면
저를 좀 써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들려오게 되고

이제는 그 자매와
대화가 통하게 되었고
 98년 자신에게 하나님을
알려준 여자와 결혼하게 됩니다.

은혜받았던 기도원으로
이사를 가서 그 밑에서
카페를 운영하면서

매일 기도원에 출퇴근하며
기도하면서 2년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박강성씨를
찾게 됩니다.

미사리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노래하다가
문득 이런 물음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너는 왜 노래하니
네가 지금까지 너를 위해서
노래했을 때 행복했니?"

그 말씀을 듣고 보니
행복하지는 못한 것이지요.

그때 또 하신 말씀이
"이젠 나를 위해 노래를
해야 하지 않겠니?"

사실 그때는 거부 반응이
오게 됩니다.

이제 좀 가수로써 뜨려고
하는데 어떻게 복음가수가
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30년 만에 노래하는 관중을
쳐다보는데
다시 이런 말씀을 주신 것이지요.

"너는 나를 만나서
행복하지만
저들은 나를 몰라서
 불쌍하고 힘들어한단다"

이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무대에서 노래하는데
목숨을 내걸고 하게 되었답니다.

노래를 하면서 듣는 이들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가수 김건모와 함께 춤을 추던
핑계 걸로 콜라의 멤버로
활동했던 김송 씨는

화려한 춤꾼이자 가수인
그녀가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수 강원래와 결혼을
합니다.

원래의 꿈이 현모양처였기에
당연히 남편 닮은 예쁜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자
했답니다.

결혼을 하면 불행은
끝나고 행복이 시작이
될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화려한 인생을
지내던 남편 강원래 씨의
사고로 인생에 먹구름이
오게 되는데요.

결혼 후 3개월이 지난
2000년 12월 9일 날
어머님께 용돈 드리러
강원래 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불법 유턴하던 차에
부딪치게 되어서
전신마비가 오게 됩니다.

이제 주위 분들이 이젠
너의 인생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하물며 클론의 구준협씨
까지도 새 인생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을
믿기 전이기에 자신이
다 할수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현실의
무게는 힘들었답니다.

남들은 그런 남편을 돌보아주는
아내를 날개 없는 천사라고 하지만
그녀는 날마다 남편을 원망하며
싸웠다고 합니다.

“밖에다 대고는
‘저희 잘 살고 있다’고 웃었지만
안은 매일 전쟁이었어요.”

 남편의 간병을
감당하기는 했지만
입으로는 심한 욕설,
심지어 장애인을
비하하는 욕도 서슴지
않았답니다.

“너는 바람피워
천벌받았지만
나는 왜 네 똥 치우며
살아야 해!”라는
말은 일과였답니다.

저녁이면 화장하고
남편에게 당당하게
“나 클럽 가”라며 나가
밤새 춤추기도 했답니다.

 새벽에 돌아와
남편의 자는 모습을 보면
미칠 듯한 마음에
통곡을 했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원망이 되었답니다.

세간의 이목이
두려워 이혼할 수도
없었고

그러는 동안 위에
궤양이 18개나 생겼고
인터넷 게임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전도를 하면
싫다고 했답니다.

이혼하고 해외로
나갈 생각만 했답니다.

그런
고난과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호주에서 재혼해
사시던 어머니를 만나러
김 씨를 비롯한
4남매가 여행을 간 그날
어머니가 병원에서
뇌종양 판정을 받게 됩니다.

가족들이
 망연자실해 있는 사이
호주인인 새아버지가
수소문해 한인 목사를
불렀답니다.

그를 본
어머니는 처음에는
“누가 부르라고 했어!”라고
악을 쓰며 거부했지만
 10분도 지나지 않아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엎드려 통곡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회개 기도와 감사 기도를
하면서 어머니께서
우시는 것입니다.

김송 씨의 고백입니다.

“어머니는 본래
독실한 크리스천이셨어요.
구역장에 전도왕이셨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성경 읽고 찬송하고
방언으로 기도하던
어머니 생각이 날
정도였어요.”

그런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결혼 생활이
 결국 실패로 끝나자

“남을 위해 해준 기도는
모두 응답받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라며
타종교로 개종해 버렸답니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전도하는 사람에게
소금을 뿌릴 정도로
교회를 증오했던
김 씨인지라 어머니의
회심에 충격이 컸는데요.

어머니는 결국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매일 눈물을 흘리며
감사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께 전화를 해서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김송의 고백입니다.

“가장 놀라웠던 건
아버지와 새어머니,
고모들과 결코
화해하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거짓말처럼 관계가
회복됐다는 거예요.

그 과정을 옆에서 보니
저절로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구나’
하는 말이 나왔어요.” 

김송 씨가 성장기에
입은 상처가 치유가
되어가기 시작했으며

아버지와 새어머니
고모의 관계가 회복되고
서울 대치동에 있는
우리들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김송의 고백입니다.

“그전까지는
제가 죄인인 줄 몰랐어요.
‘나처럼 착한
사람이 어디 있어’ 했죠.

죄를 깨닫고 보니
남편과의 모든
싸움의 원인이 저였어요.

그 후
집안에 전쟁이 그쳤죠.

내 불행의 원흉이었던
남편이 이제는 한없이 고마워요.

나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 수고해 준 사람이니까요.” 

김송 씨는 친구 언니가
고등학교 때에 전도를 하려고
했는데 거부했었답니다.

나중에 다시 그 언니가 전도를
해서 우리들 교회에 가게 되었답니다.

처음 교회를 가기 전에는
자신이 피해자이고
남편과 시어머니가 미웠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죄인이고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데
예수님을 핍박한 바울이었는데
이제는 남편을 우상으로
여긴 나 때문인 것을 깨 닫았답니다.

그리고 드디어
불가능하다는 김송 씨 가정에
8번의 시험관의 시도 끝에
자녀를 허락하셨답니다.

인공수정에 7번의 실패를
하고 포기를 했는데

포기한지 5년 만에 남편이
다시 시도를 해보자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날 김송 씨가
읽고 있던 성경 말씀이
있었답니다.

에스겔 36장 12절의
"너는 그 기업이 되어 다시는
그들이 자식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리라"라는
말씀을 묵상했다는 데요.

김송 씨는
그 말씀을 통해서
"다시는 유산되지
않게 한다는 말씀으로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결혼 10주년 되는 날
병원에서 시험관 아기
1차 피검사 성공했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답니다.

이젠 아들을 위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데요.

아이가 살면서 마주치게 될
힘든 일 괴로운 일도
하나님에게 의지하며
감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답니다.

이전에는 몸이 불편한
남편과 평생을
어떻게 살지라며
원망했지만

"지금은 남편이
저의 십자가입니다"
라고 고백한답니다

친한 언니인 가수
박미경 씨도 김송 씨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데요.

김송 씨의 고백입니다.

"언니가
몇 번 교회 얘길 꺼냈었는데
선뜻 권유를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믿음은 강제가
아니고 선물이니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거죠.

결국 하나님이
미경 언니를 인도해 주셨어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용서한 사람들을 언니에게 얘기하며
우리는 서로 안고 한참을 울었어요."

김송 씨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욥기서 23장 10절 말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78년 드라마 "봄비"로 데뷔하여
"달동네" 사랑과 야망"등을
통해서 아역스타 똑순이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탤런트 김민희 씨를 소개합니다.

 어릴 때는 똑순이가
싫었지만 지금은
알아주시니 감사하답니다.

지금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으며
연기도 성숙되어
가고 있는데요.

처음 데뷔하게 된
계기가 조금 특별했답니다.

어머니 친구분 중에서
극단을 운영하는데
이 아이가 조금 특별하니
연극을 시켜보라고
해서 그곳에서 PD에게
발탁이 되었답니다.

어릴 때의 똑순이 이미지를
바꾸려고 좀 망가진 배역들을
골라서 하다 보니
이제는 나에게 맞는
모습을 찾게 되었다네요.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서
"사랑이 꽃 피는 나무"를
끝내고 나서
나 자신이 학생인지
탤런트인지 고민되기 시작
했답니다.

사실 친구들보다 학교를
많이 빠지다 보니
어쩌면 친구들보다
더 모른 것이 많기에

지금 생각해 보면
사춘기를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겪었답니다.

특히 사랑이 꽃 피는 나무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거의
스타가 되었고

자신은 똑순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했고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혼자서 스타가 되지 못했다고
자책하며 방황하게 되었답니다.

세상일이 삐딱하게 보여
매일 술로 화를 달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큰 변화의 선물을
주셨답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나서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었답니다.

남편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을 해준답니다.

"지금도 당신은 내게
최고의 배우야"라고
칭찬을 아낌없이 해준답니다.

신앙생활은 중학교 때에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접하게 되었고요.

미국에서 결혼해서
첫 번째 아이를 유산을
하고 너무 힘들었답니다.

자신의 실패는 처음이었고
이런 모습이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때에 한국 방송을 듣는 중에
기독교 방송을 듣게 됩니다.

갑자기 찬송을 들으면서
"나는 제외된 것이 없었구나
이것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구나."

그때부터 가정에서 드리는
조그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울기도 많이 하고 상담을 하면서

"이분의 아픔이 내 아픔이고
서로의 아픔이 진심으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가정교회에서의 삶 동안
행복했고 끝나고 밥을 먹으면서
좋았답니다.

하나님께서 연기를 쉬는 동안에
미국에서 교회를 가기 위해서
1시간 이상을 가는데
가면서 찬송을 듣고 가면서
넘 행복했답니다.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2장 24절 말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서
간직하다가 고등학교 때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말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이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지금은 많은 사람에게
연기로 행복을 주는 것에
감사하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