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변호사 부부가 미국의 어느 지방에 출장을 갔다가 그곳에서 주일을 보내게 되었다. 주일날 아침 차를 몰고나가서 어느 교회를 가야할 지 몰라 헤매다가 교통경찰을 만나 좋은 교회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경찰은 한 교회를 소개해 주었다. 변호사 내외는 그 교통경찰이 가르쳐준 대로 차를 운전하며 가다가 여러 교회를 지나치게 되었다. 가는 길에도 교회가 여러 곳이 있는데 경찰은 왜 더 멀리 있는 이 교회를 소개해주었을까 의아해하면서 교회에 도착하여 예배를 드리고 나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 교통경찰을 또 만나게 되었다. 변호사 내외는 경찰에게 굳이 왜 그 교회를 소개해주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경찰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지역에 어느 교회가 참 교회인지 좋은 교회인지 제가 직접 가보지 못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요일 아침마다 교통정리를 하면서 보니 그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의 표정이 가장 밝고 기뻐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를 자신 있게 소개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유행하는 말이 있다. “일 맛 나는 직장생활, 꿀맛 나는 가정생활, 신바람 나는 건강생활”이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언가 활력소를 불어넣어 재미있고 즐거운 삶을 영위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소속한 교회는 항상 생기가 넘치고, 평안과 기쁨이 떠나지 않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한다. 우리 교회를 위해 평안을 구해야 한다. 평안한 교회는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 됨을 만든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행복한 교회생활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행복한 교회는 항상 평안한 교회다.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교회라면 틀림없이 좋은 교회이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행 9:31) 출처:남택률목사의 목회칼럼중에서 [광주유일교회]
마약 단속을 피하기 위해 나는 강남기도원을 도피처로 삼고 들어갔다. 기도원 규칙 때문에 할 수 없이 예배를 드리러 갔다. 준비 찬송을 한참 부르는데 갑자기 가슴을 짓누르는 곡이 있었다. ‘낮에 해처럼, 밤엔 달처럼’이라는 찬양이었다. 이 찬양을 듣는 내 가슴에 거센 파도가 몰아쳤다. ‘나는 지금껏 무엇을 했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부끄러움과 함께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동안의 행적들이 떠올랐다. 시장의 노점 상인들을 괴롭히고 돈을 뜯어냈던 일, 남의 영업장을 뒤집어엎었던 일, 마약에 손을 댄 것도 모자라 여자들의 커피 잔이나 술 잔에 마약을 몰래 타서 남의 영혼까지 망가뜨린 일들도 떠올랐다. 이런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자 내 입에서 이런 고백이 터져 나왔다. “나는 개처럼 살았습니다. 나는 나쁜 놈입니다.” 회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그저 용서해 달라고만 말했다. 그 찬양 한 곡으로 꼬박 5일을 회개하며 눈물을 흘렸다. 닷새 동안 실컷 울고 나니 가슴이 후련해지고 불안하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예배 때 무릎을 꿇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 박수를 치며 기쁘게 찬양하는 사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 모두 참 평안해 보였다. 무릎을 꿇고 오랜 시간 좀처럼 자세를 바꾸지 않는 집사님을 따라 기도했다.
10분쯤 지나자 온몸이 뒤틀렸는데 나중에는 3시간 넘게 같은 자세로 앉아 기도할 수 있었다. 또 찬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나비가 춤을 추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여 따라 했더니 1주일 후쯤에는 나도 어느 새 나비와 같은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 후 가슴속 깊은 곳에 강단에서의 말씀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변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에서는 성도를 서로 축복하는 시간이 있다. 예배가 시작되면 인사를 나누고 서로에게 "잘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그저 하라니까 하는 정도로 "잘되고 있습니다"를 예배 때마다 반복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문제로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잘되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떠올랐고 힘을 얻게 되었다. '잘되고 있습니다'는 현재진행형이다. 사실 우리는 결과로 '잘되었습니다'라고 말하길 원한다. '사업도 잘되었습니다' ' 자녀도 잘되었습니다' …
그러나 그런 기대가 어긋나면 '잘못되었다'를 결과로 받아들인다. '내 삶은 잘못되었다"는 회의에 빠지게 된다.
어려움 속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삶에 지칠 때 "언제 잘되는 건데 ?"라고 회의적인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면 그때, 그 이유가 이해되지 않아 괴로웠을 때도 잘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성경 말씀처럼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며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잘되고 있었던' 축복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인간의 생각으로 잘되었다고 하지만 정말 잘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정말 잘못되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삶이란 씨실과 날실처럼 고난과 기쁨이 한올씩 짜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두 다 날실로만 짜일 수 없고 씨실로만 짜일 수 없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 삶은 아직 짜여지고 있는 중이다. 내 삶에 대해 결론적인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
아직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잘되고 있습니다"를 받아드릴 수 있다면 내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낙심하여 주저앉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잘되고 있습니다" "잘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보는 건 어떨까? 정말 당신은 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은 삶으로 순종하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대 과학적인 인본주의자였던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하신 것에서 이 사실이 잘 드러납니다. 사두개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고 과부가 된 여인이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해 남편의 형제와 혼인하는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 22:23~33)
이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가정에 근거한 질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실제 삶에 존재하지 않는, 가정에 근거해서 부활을 부정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다”고 일갈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심을 설명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이 설명을 하실 때의 근거구절은 유대인이라면 다 알 수밖에 없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다만 사두개인들은 이 익숙한 말씀을 삶에 적용한다는 생각을 못했으나, 예수님은 매일의 삶을 말씀에 근거하여 살고 계셨기 때문에 이를 통해 진리를 꿰뚫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삶으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을 삶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단지 의식(ritual)으로서의 예배를 잘 드리고,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바치는 등 그 세부사항을 지키는 데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또 관습적인 행동을 지키는 것을 순종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을 어겼다고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그들의 외식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결국 이런 지식에만 머물러 있거나,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종교적인 관습이 곧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제자훈련과 소그룹의 특징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설명은 바로 “말씀을 삶으로 증명하도록 만드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소그룹은 설교나 강의에 비해 비효율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만 한다면 예배 의식에 참여하기만 해도 됩니다. 우리가 제자훈련을 하고, 소그룹 사역을 하는 이유는 말씀을 지식으로서 아는 차원에서 삶으로 살아내는 차원으로 옮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소그룹은 말씀을 정기적으로 듣고는 있지만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 말씀을 지식으로만 알던 사람들, 알지만 실천하기 거부하던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제대로 알고 순종하며 실천하도록 변화시키기 위한 장입니다. 매주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라 하더라도, 파편화된 성경지식, 의식으로서의 예배, 일상에서의 순종을 요구받지도, 피드백을 받지도 못하는 삶을 살다보면 성경이 그들의 인생의 교과서라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의 정신이 그 사고를 형성하고, 성경의 훈계와 경험이 그 마음에 새겨져 자연스럽고 적절하게 삶에서 드러나야겠지만,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성도를 찾아보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가르쳐 그 삶을 살도록 도전할 뿐 아니라, 그런 삶을 살았는지 피드백을 하는 곳이 필요합니다. 소그룹에서는 성경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를 나누고, 또 전 모임에서 나누었던 바를 실천했는지를 이야기하여 지시와 피드백이 계속 반복됩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삶을 예수님께서 사셨던 원리에 맞춰가게 되고, 말씀이 삶의 원리가 되며 삶은 성경의 증거가 되는 생활을 영위하게 됩니다 출처:로버트 콜만의 "주님의 마음"중에서 [국제제자훈련원]
아주 작고 초라하게 시작한 나사로의 집 교회에서 비닐 천막도 없이 몇 달간 목회를 했습니다. 빗속에서 예배를 드린 날도 있었습니다. 겨울 비라 제법 찼습니다. 저는 강대상이 있는 사무실 안에 있어서 비를 맞지 않았지만 성도들은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예배 드렸습니다. 제 마음이 너무 참담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하나님, 비를 피할 수 있는 비닐하우스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세요. 너무 춥고, 마음이 아프고, 힘이 듭니다.” 얼마 후 서울 낙성대에 위치한 작은 교회 간사님이 오셔서 담임목사님이 쓰신 것이라며 한 통의 편지를 건넸습니다. 거기에는 200만원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 교회를 비판하고 원망했는데 그랬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옥상에 비닐하우스가 멋있게 지어졌습니다. 저는 밤에는 시장에서 과일을 팔고 낮에는 교회 바닥 공사를 했습니다. 힘든 공사였지만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시장에서 재료를 사서 바닥에 깔판을 대고 장판을 연결하고 문고리도 달고 문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나사로의 집 비닐하우스 교회가 완성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나사로가 거지이니 나사로의 집 교회는 거지 교회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사로의 집은 거지 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이 땅에 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집은 하늘이었고 바로 그곳이 천국이었습니다. 우리 나사로의 집 교회 역시 거지 교회가 아닌 천국 교회이며 소외된 자들의 미래의 꿈을 담은 교회입니다. 저는 비닐하우스로 만든 나사로의 집 교회가 정말 좋습니다.
저희를 구원하시려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자비로우신 여호와 하나님. 오늘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저희 성도들이 거룩한 주님제단에 나와 고난 당하신 그 모습과 의미를 생각하며 찬송과 영광을 돌리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시고 고난 당하시므로 저희들에게 참 생명과 자비와 평화를 주셨나이다. 그러나 저희들은 주님의 고난을 깨닫지 못하고 저회들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외면한 채 인간의 욕망과 헛된 목적을 가지고 살아 왔나이다. 주님. 이 시간 저희들의 모든 죄를 주님께 아뢰니 용서해 주옵소서. 저희를 위하여 고난 당하신 주님.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하오니 주님께서 겪으신 고통과 죽음에 저희도 함께 참여할 수 있게 하시고 저희들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인내의 힘과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옵소서. 이제 저희들이 다시한번 새롭게 거듭나게 하시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사명과 직분을 잘 감당하므로 택한 백성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게 하옵소서. 또한. 주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처럼 저희들도 이웃과 형제를 위하여 참으로 일하게 하시고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귀한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는 이 땅에 참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고난 받으셨으니 저희들이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살게 하시고, 성도들이 서로 평화를 이루게 하시며 다툼이나 이기적인 마음이 없이 온전한 성도의 교제를 나누게 하옵소서. 자신의 행복과 안일만을 추구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외면하려는 저희들의 속된 심령을 성령의 능력으로 뜨겁게 변화시키사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이 나라 백성을 위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옵소서 . 하나님 아버지. 고난주간에 드리는 저회 예배를 기뻐 받아 주시고 은혜를 베푸사 저희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오직 참된 평화의 걸음만을 걷게 인도 하옵소서. 저희들의 몸된 교회도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옵기를 간구 하며 저희를 위하여 고난 받으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