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처음 이민 와서 만난 분 중, 12년 전 내가 이곳에 콘서트 겸 왔을 때의 조하문을 기억하는 분을 만나 뵌 적이 있다. 그분은 내가 가수였을 때 나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다녔다고 하셨다. 난 그분에게 “집사님, 집사님이 생각하시는 10년 전 조하문은 1997년 9월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조하문은 이름만 같을 뿐입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제야 비로소 얼굴 표정이 풀리셨다. 그분은 아마 옛날의 나를 기억하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되었나’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세월이 지날수록,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옛사람의 죽음을 분명하게 포함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주님을 만나고 난 나는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기 위해 그동안 알고 있던 분들을 많이 찾아 다녔다. 그 중에는 당시 내가 운영하던 사업장의 직원들도 있었다. 동일하게 용서를 구하는 과정에서 직원들 중에는 내 달라진 모습을 보고 교회에 출석하는 분이 생기기도 했다. 사업과 음악을 가진 채 만난 예수님은 결국 나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셨고 한참 동안 조용히 혼자 있게 하셨다. 그리고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게 하셨다. 계속되는 훈련 속에서 주의 도구로 만드신 것이다. 극장 사업 이후 내가 손대고 있던 사업을 그만 둔 것도 망해서가 아니라, 신학을 시작하고 보니 두 가지를 동시에 섬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 ’돈’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었고 그로 인해 스스로 폐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손을 잡고 동행하면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지난 9년간 나에게 문제된 것들이 있다면 가끔 그분보다 앞질러 가거나 나의 생각을 그분 생각이라고 우긴 경우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분은 내게 평안을 주셨다.
나는 연구소를 사직했으나, 곧바로 중국으로 갈 수는 없었다. 이미 스탠포드대학교와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로 약속했는데, 갑작스럽게 약속을 파기하고 관련된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1년 정도 연구를 수행한 후에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미 한국의 연구소에 사표를 낼 때 생활비 지원을 포기했기 때문에, 살고 있던 집을 팔아서 돈을 가지고 갔다. 그 돈도 나중에 중국에서 제자들을 먹이고 돌보는 데 쓰느라 금세 바닥이 났지만 말이다.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우리 가족은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산호세에 있는 교회에 등록하여 성경공부를 하면서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아내는 머리로만 중국 선교에 동의했지, 마음으로는 확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내는 불안과 초조감을 늘 품고 있으면서 가끔 내게 중국에 안 가면 안 되느냐고 묻곤 했다. 어떤 때는 꼭 중국으로 가지 않아도 선교하는 방법이 있다고도 말하는 등 변덕을 부렸다. 아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집 안 청소는 거의 내 차지였는데, 진공청소기를 돌릴 때마다 나는 늘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카펫에 있는 먼지나 휴지 조각들을 청소기로 모두 빨아들이듯이, 제 마누라 마음속에 있는 세상에 대한 미련,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을 제발 쏙쏙 빼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났을까, 하루는 아내가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에 오더니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이것저것 계산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계산이란 없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염려해서 되겠어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그날 주일예배 시간에 교회 목사님이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내의 가슴에 와 박힌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마음고생 하느라 수고한 아내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먼지가 잔뜩 묻은 바이올린이 경매에 올라왔다. 누군가 3달러에 사겠다고 했다. 그러자 한 노인이 손을 들었다. “내가 그 바이올린을 한 번 연주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 노인은 바이올린의 먼지를 닦고 줄을 튜닝한 후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멋지게 연주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고 그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내가 3000달러에 사겠소.” 결국 그 바이올린은 3000달러에 팔렸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에게 쓰임을 받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필자가 3세 때 아버지는 7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돈을 벌어야 했기에 필자를 8세까지 고아원에 맡겼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돈을 벌었다. 신문배달도 하고 우유배달도 했다. 구두도 닦았다. 어머니는 교회 사찰집사로 일하셨다.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다. 자녀들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고 그중 4형제가 목사가 됐다. 만약 어머니의 기도가 없었다면 7남매가 어떤 가치로 살아가고 있을까. 하나님 손에 붙잡힌 인생을 생각하면 늘 감사할 뿐이다. 험악한 세상이다.
부모는 자녀들이 하나님 손에 붙잡힌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출처:설동욱 목사 [서울 예정교회] <겨자씨/국민일보>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의 저자인 마크 빅터 한센은 최근에 미국 애틀랜타 조지아에 있는 라이프 카이로프랙틱 대학의 졸업식 연설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졸업생 중에는 엄청 나이 들어 보이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습니다. 올해 일흔 두 살이라고 밝힌 그녀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왜 어려운 의학을 공부하는지 궁금한 마크는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의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무엇을 하셨나요?” “나의 전직은 수녀였습니다. 하지만 내가 있던 수녀원의 정년은 66살이었고 그 나이가 되면 반드시 수녀원을 나와야 합니다.” “이미 많은 나이인데도 어째서 7년이나 되는 세월을 의사가 되는 일에 쓰겠다고 결심하셨습니까?” 그러자 그녀가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나이는 들었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제 인생의 목적은 남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한 그 수녀님은 현재 하루에 150명의 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사명자는 죽지 않습니다. 자신의 나이나 성별, 건강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다할 때까지 주어진 시간을 감사하며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값진 인생을 살기위해 자신의 사명을 찾으십시오.
주님! 사명자로의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먹고사는 일 이외에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찾으십시오.
전에 한신대 학장을 지내셨던 고 김정준 목사님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목사가 되었습니다.
일본 유학까지 갔다 온 일꾼입니다. 김천에서 목회하던 중 폐결핵에 걸렸습니다. 더 이상 가정에도 교회에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산 요양소로 갑니다. 좌우에 결핵 환자로 가득합니다. 여기저기서 콜록콜록합니다. 매일 아침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그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절규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하셨습니다. 주의 일하겠다는 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때 다음과 같은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여기에 온 목적이 있다. 병에 걸렸기 때문에 온 것만 아니다. 사람들을 돌보라.” 김 목사님은 그들을 돌보아 주기 시작합니다. 폐병 아닌 사람은 이런 폐병의 사람들을 돌볼 수 없습니다. 간호사들이 있긴 해도 이들과 함께 잘 수는 없습니다. ‘나를 폐병에 걸리게 하여 폐병 걸린 사람들을 돌보게 하셨구나.’ 그는 이들을 돌보면서 시편 1편에서 150편까지 전부 외웠습니다.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기를 3년간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병이 낫게 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 유학을 갖고, 박사논문은 ‘시편 연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수고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유학을 갔다 와서 그는 연세대 교수를 지냈고 한신대 학장까지 했습니다. 내가 있는 이 자리, 내가 원하지 않았을지라도 있게 된 이 자리를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경륜적 의미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현재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경륜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아 사명적인 인간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타이밍과 사람의 타이밍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인간의 타이밍보다 더 늦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 정확하고 더 옳습니다. 그걸 믿어야 됩니다. 현재 여러분이 자리가 무엇입니까? 형편과 처지가 어떠십니까? 내가 원하는 자리와 일과 형편이 아닐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원망하지 마십시오.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세상적인 소망, 막연한 기대는 버리십시오. 그리고 내가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의 경륜적 자리요, 일이라 믿고 힘차게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높이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