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군의 창설자인 윌리암 부츠 목사님께서 깊은 기도 중에 놀라운 환상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기도 중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사다리를 가지고 오더니 십자가에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크나큰 대못을 꺼내서 예수님의 양손과 발에 망치로 그 못 들을 때려 박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윌리암 부츠 목사님께서 그 사람을 향해서 소리를 냅다 질렀습니다. "야! 이 나쁜 녀석아 네가 누군데 우리 예수님을 못 박는 것이야! 썩 내려오지 못해"
대못을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고 있던 사나이가 그의 외침을 듣고 고개를 돌려 윌리암 부츠 목사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윌리암 부츠 목사님께서 소스라쳐 놀라 소리를 악하고 지르고 말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던 사나이의 얼굴이 바로 자기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빌라도입니까? 유대인입니까? 로마 병정입니까? 누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습니까? 바로 나입니다. 바로 내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들은 이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성 분야에 유명한 안소니 드 멜로 (Anthony de Mello)라는 사역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주님과 퍽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혹은 뭘 청하기도 하고, 혹은 찬양하기도 하고, 혹은 감사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늘 나에게는 이런 찜찜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분의 눈을 들여다보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곧잘 말씀을 여쭙곤 하면서도, 그분이 날 바라보고 계시다고 느껴지면 그만 그 눈길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나는 그 눈길을 멀리했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눈길 속에서 뭔가 뉘우치지 아니한 죄에 대한 나무람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떤 요구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나에게 원하시는 바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은근히 염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나는 기어이 용기를 가다듬었고, 그리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 책망도 없었습니다. 아무 요구도 없었습니다. 그 눈은 그저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나는 그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살피듯 바라보았습니다. 그래도 역시 그 눈길이 전해주는 말씀은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나와서 울었습니다
말씀 묵상을 하면 깊이 있는 사람이 된다. 리처드 포스터는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깊이가 있다는 것은 곧 생각이 깊다는 것이다. 깊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깊이 있는 사람만이 사람의 깊은 심령을 이해할 수 있다. 말씀 묵상에 들어간다는 것은 깊은 바다로 항해하는 것과 같다. 깊은 바다 속에 잠수하는 것이다.
시편 42:7에는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라는 말씀이 있다. 깊은 바다가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말씀 묵상이다.
말씀이라는 깊은 바다에 자신을 내어 던지는 모험, 그것이 말씀 묵상이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모험이다. 나는 이 모험을 “거룩한 모험”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말씀의 바다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두 변화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말씀을 붙잡기 위해 말씀의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인생이 그러했다. 누가도 “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행 18:5)라고 기록했다. 바울에게서 우리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런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말씀에 붙잡힌 말씀의 사람이 된 것이다. 말씀은 보배이다. 말씀 속에 감추어진 보배를 발견해 내서 자신의 소유로 삼는 것이 말씀 묵상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밭에 감추인 보화에 비유하셨다.
보배는 항상 감추어져 있다. 보배는 바다 깊은 곳, 땅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
보화가 깊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그것이 멀리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진리는 가까운 데 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다.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실 때 우리는 모든 진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바로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요 14:6).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골 2:3).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것이 말씀 묵상에 들어가는 입문이다. 예수님 없이는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 예수님 없이는 성경이 풀리지 않는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 5:39). 구약을 읽을 때 경험하게 되는 이해되지 않는 수건이 예수님 안에서 벗겨진다 (고후 3:14-16). 성령께서 도와주실 때 예수님 안에서 모든 진리가 깨달아지는 것이다 (고후 3:17-18). 예수님은 말씀 묵상의 열쇠가 되신다. 말씀을 묵상하라.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묵상하라. 성령님의 조명 아래서 말씀을 묵상하라.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말씀 묵상을 위해서 가장 좋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라.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 말씀의 깊은 바다에 빠지라. 말씀에 사로잡힐 때까지 말씀을 붙잡고 묵상하라.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온몸이 말씀으로 가득 차게 하라. 피 전체에 말씀이 흐르게 하라. 온몸이 말씀 덩어리가 되게 하라. 말씀을 붙잡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말씀에 사로잡힐 때까지 묵상을 계속하라. 그때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 된다.
뉴질랜드의 앤디 폴디라는 여성은 노력도 하지 않으며 인생을 되는대로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엔 호스티스 일을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트럭을 운전하며 억세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사막에 꽃을 피우겠다.’고 말하며 일을 그만두고 사하라 사막으로 떠나자 모두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트럭 운전사 일을 하던 앤디는 자신의 삶을 회의를 느끼던 도중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됐는데, 말씀을 묵상하다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사 35:1) 라는 구절을 보고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씀에 확신이 들자 지체하지 않고 아프리카로 떠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수년간 사막에 꽃을 피우는 방법을 연구하며 도와줄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사막에 꽃을 피우겠다며 돌아다니는 외국인 여자를 보고 현지인들은 모두 미친 여자라며 손가락질 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성경을 통해 하신 말씀을 저를 통해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은 풍성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몇 천 년 동안 사막이었고 주변국조차도 포기한 황무지에서 그녀가 나무를 심고 보리를 수확한 것입니다. 사하라를 개간하며 희망을 준 그녀는 현재 세계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온 말씀은 모두 이루어집니다. 내가 그것을 믿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능히 우리로 하여금 사막에서 꽃도 피우실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삶 속에 말씀을 성취하십시오.
주님!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전하는 도구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세계적인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젊은 시절 지독한 가난 속에서 약 7년 동안의 각고 끝에 ‘프랑스 혁명사’를 탈고했다.
그러나 처음의 원고는 그가 검토를 부탁했던 친구 존 스튜어트 밀의 하녀가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말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칼라일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그 방대한 원고를 다시 쓴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보내던 어느 날, 그는 거리를 걷다 석공이 길고 높은 벽을 쌓는 것을 보았다. 한 번에 한 장씩 돌을 쌓아 갈 때 아름다운 건물이 완성되는 것을 목격한 그는 용기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하루에 한 페이지씩 써 가자. 내일은 다음 페이지를, 모레는 그 다음 페이지를, 좋아! 그렇게 하자.” 그 는 천천히 조금씩 시작했다. 그리고 3년의 시간이 흐른 1837년 그는 훨씬 더 훌륭한 ‘프랑스 혁명사’를 출판할 수 있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한 글자도, 한 걸음도 내 딛기조차 힘들 때 눈을 들어 하늘을 보자. 실패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것이 실패다. 실패를 통하여 배웠다면 성공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한 걸음만 뗄 수 있다면 오늘 성공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