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리더 :: 크리스천 리더

종교개혁을 추진하던 루터가
지쳐서 완전히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사흘을 자리에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는 일어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빠져 있던 루터 앞에
루터의 아내였던 케이티가
상복을 입고 등장했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누가 죽었습니까?”
“예, 죽었습니다.”
“누가 죽었단 말이오?”

“당신의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당신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오?”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당신이 이렇게 포기하고
누워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 한 마디가 루터를 깨웠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아내와 예배의 자리에 나가서
강력한 성령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룩한 소명 앞에
자신의 인생을 드리기로
다시 한번 작정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이지만,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순간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든 실패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자주 망각한다는 데서 비롯됩니다.

나 혼자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무신론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신론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것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는
교회는 열심히 나오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봉사를 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시험을
치르면서도
전혀 기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부정행위도 저지릅니다.

내 인생에
중요한 직업을 결정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한 번도 기도하지 않고 결정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시나 마나입니다.

정말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늘 묵상할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은 변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십니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 4:6 상반절)

출처:이동원목사의
"복음이 나를 결정한다"중에서
[규장출판사]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전까지
나는 늘 쫓기는 사람이었다.

살기 위해 도망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안에 주신 명령에
순종하는 순간,
이 모든 것은 달라졌다.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는
똑같아 보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는 엄청난 존재로
탈바꿈해 있는 것이다.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갈등에
쫓기는 사람이 아니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는 가난에
쫓기는 사람이 아니라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어려움 가운데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는데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달라진 게
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차이가
바로 신앙의 역설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신앙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신앙의 사람들은
가난한 자 같으나
남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신앙의 사람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출처:유진소 목사의
"하나님의 자신감" 중에서
[도서출판 두란노]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어느 집에 가난한 소년이
점원으로 들어왔어요.

정원을 가꾸는 일을 했어요.

부잣집에서
많은 사람 가운데
이 소년에게
정원을 꾸미게 했어요.

청소하고 거름주고 물주고
정원을 깨끗하게 꾸미고
잔디를 깎는 일을 맡겼어요.

그런데 이 소년이 오는
그날부터 정원이 얼마나
아름답게 꾸며지는지….

깨끗하게 가꿉니다.
관리합니다.
부지런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좋은 꽃들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그 꽃 사이에
돌을 가져다 놓고
나무를 가져다 놓고.

얼마나
아름답게 조각을 하는지요.

예쁘기 그지없습니다.
작품이 되었습니다.
모두 감탄해 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주인이 그랬어요.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하느냐?"라고
그러니까 소년이 말했어요.

"아닙니다. 주인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이 정원을
아름답게 꾸밀 책임이 있습니다.

나는 이게 행복합니다.
나는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좋습니다."

"그 조각은
왜 그렇게 하느냐?"

"이건 나의 취미입니다.

이렇게 하니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 소년의 대답을 듣고
주인은 너무 감격하여서
나중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이 소년을
후원하기 시작합니다.

주인의 후원으로 소년은
미술 공부를 계속하였고
자신의 재능을 펼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소년이 나중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미술가이자 천재화가인
세계적인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삶 속에서 성실함을
잃어버리고 인생을 허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럼 위대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있는 "천지창조"나
"피에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도  성실함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신다"
(시 31:23)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
(잠 28:6)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잠 28:10)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시 37:3)

​성실하게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
성실하게
기도하는 사람,

꾸준하게
섬기는 사람,
성실하게
예배드리는 사람,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성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

시간이 흐를수록
맛이 나는 사람,
오래될수록
더욱 신뢰가 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인이 50명 정도 되는
교회의 중 고등부 전도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설교했더니
교인들의 마음이
전도사에게로
​전부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전도사님을
불러 교회에서
나가달라고 했습니다.

​전도사님은
그 말을 듣고
‘담임목사가
그 정도밖에 안되니
참 불쌍하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당뇨 합병증으로
시각장애를 가진
장로님 한 분이
전도사님을 찾아와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전도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시기 전에
우리 교회는 교인도 적고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평화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님이 오신 후
​그 평화가 깨졌습니다.

​무능한 담임목사
한 분도 섬기지 못하고,
​행복하게 하지
못하시는 분이

어떻게 불신자를
전도하여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좋은 목사가
되실 수 있겠습니까?

​전도사님은
똑똑하기는 하지만
​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시네요.”

​그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담임목사를 찾아가
용서를 구한 다음
그 교회를 떠나
개척했다고 합니다.

요즘  들어서
유난히 주위 사람들에게
비판적이고 모든 일들이
부정적으로 보이고
말이 거칠어졌다면,

말을 그치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마음이 바뀐 사람입니다.

바로 살려고
애를 쓰지만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다툼과 갈등이 생긴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사람과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같은 생각,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마음이 되고,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낮게 여기고,
자기 일만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출처:유기성 목사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중에서
[규장 출판사]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느부갓네살 왕은
엄청난 규모의
금 신상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에게 강제로 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 문제로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고발을 당한다
(단 3:12).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것이
왕의 분노를 자아냈고,
결국 잡혀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지고 말았다.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단 3:20,21)

이 부분을 묵상하는데,
특히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라는 구절에
정말 중요한 영적 원리와 포인트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문을 통해 깨달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경험해야 할 변화는 무엇일까?

우리가 만들어놓은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고정관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잘 변하지 않는 굳은 생각 또는
지나치게 당연한 것처럼
알려진 생각”인데,
신앙생활 하는 우리에게도
신앙적인 고정관념들이 많다.

요한복음 11장의
마르다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마르다의 오빠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죽은 지 벌써 나흘이
되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죽은 오빠를 살려주겠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 11:39)

여기에서 마르다가 가진
고정관념, 즉 마르다가 가지고 있던
‘지나치게 당연한 것처럼
알려진 생각’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오빠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셔서
오빠의 병을 고쳐주셔야 한다,

죽으면 끝이다’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고정관념에 따라
설정된 데드라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오빠가 죽어버렸다.

이 고정관념이
너무 크다 보니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죽은 오빠를
살려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소용없는 일 하지 마세요.

우리 오빠가 죽은 지 벌써
나흘이나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이 마르다가
가진 고정관념이었다.

다니엘서 3장의 본문을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과 그 결과로
그들이 정해놓은
데드라인이 무엇이었는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는
처할지언정 던져지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는 그들이
기적적으로 건져지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이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그 세 사람은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고 말았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절대, 더 이상 희망 없음’의
상태 아닌가?

그런데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런 인간적인 고정관념,
즉 인간의 개념으로 정해놓은 데드라인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인간적인
최악의 절망의 지점,
그 마지막 데드라인인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떨어지는 그 상황에서부터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혹시 본문을 오해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일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생길 때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겠다는
기능적인 면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 잘 믿으면
풀무불에 들어가도 죽지 않는다’는
식의 기능적인 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원리’를 깨우쳐주시기
위함에 있다.

본문에서
발견되는 삶의 원리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바벨론 같은
악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다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빠졌던 것 같은 좌절과 고난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

그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라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할 때
우리의 한계 때문에 생겨버린 고정관념,
즉 ‘이제 다 끝났다, 완전한 절망이다,

오빠는
벌써 죽었다’ 같은
생각들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
데드라인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한계를 긋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

믿음을 지키다가
경험하는 고난은
오히려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가 가장 중요하다.

다니엘서를 더 읽어보면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떨어졌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이 고난으로 인해 오히려
느부갓네살 왕의 인정을 받으며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위험한 불 근처에도
가지 않게 해주시고,
홍수 같은 위험도
다 막아주신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위험한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불 가운데로 지날 때도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주님의 임재가 형통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다니엘서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깨어짐으로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도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정말 우리 삶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출처:이찬수 목사의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산다는 것"중에서
[규장 출판사]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

만약 기도 없이도
진정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주님은
기도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님의 모범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시대든지
간에 교회를 지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은
기도 사역에 철저했다.

성경이
증거하는 바에 따르면,
교회의 지도자들은
탁월한 기도의 모범을
보인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있었고,
반대로
부족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기도의 능력으로
교회를 이끌었다.

그들이 교회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역에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고
대신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물러나시게 하고,

인간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일을 위해
기도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기도를 위해 일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

기도를 얼마나
세게 하느냐에 따라
일의 가치가 결정된다.

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이
침체에 빠질 뿐만 아니라,
일 자체도 망쳐버린다.

기도 없이는
어떤 일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도가 없는 일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
내미는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해
‘가장 좋은 것’을 포기한다면,

결국에는 ‘좋은 것’과
‘가장 좋은 것’을
모두 잃게 된다.

사탄의
교활한 간계에 넘어가
기도 시간을 줄이고
일하는 시간을 늘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 일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기도를 포기하거나
기도 시간을
줄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리가 너무 바빠서
더 이상 기도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너무나 손쉽게 무장해제를
당한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역자는 사역자가 아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역자는
애당초 자기의 사명을
잘못 알았거나,
아니면
그를 사역자로
부르신 하나님께
실망과 슬픔을
안겨드리는 것이다.

누군가
적절히 표현했듯이
“기도 골방에서
쟁기질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추수하지 못한다.”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누가복음 5:16)

출처:E. M. 바운즈의
"기도의 불병거"중에서
[규장 출판사]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호주 힐송 교회의
브라이언 휴스턴 목사가
굵은 영국식 억양으로 이렇게 외쳤다.

"The best has not come yet!"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대형 강당에 참석한 청중이
그를 따라 외쳤다.

  "The best has not come yet!"

몸이 오싹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나도 외쳤다.

마음속으로는 '더 좋은 것,
아니 최고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를 되뇌었다.

2006년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
컨벤션션터에서 열렸던
아주사 거리 부흥
100주년 대회에서의 일이다.

대회 기간 동안
수많은 집회에 참석했지만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각인된 문장은 오직 하나,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다.

  더 좋은 것은
분명 빛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찬란히 빛나는 것들은
언제나 앞에,
미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토크빌이 말한 것처럼
인생의 최종 목표는
인생 저 너머에 있다.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이름 뜻은 '기쁨'이다.

한나의 이름 뜻은
'풍성한 은혜'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삶은 이름과
정반대로 슬픔과
한탄의 나날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삶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결국 나오미와
한나의 삶에
더 좋은 것들이 찾아왔다.

  지금 모든 것이
버렸다고 자탄하는가?

내게는 다시 사랑할 힘이
없다고 울부짖고 있는가?

재기의
기회마저 사라졌다며
절망하고 있는가?

그래서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지려 하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찬란히 빛나는 것은
앞에 있다.

그 빛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이태형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생명의 말씀]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인생은 큰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야구 경기에
빗대어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마지막 회가
끝날 때까지
절대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야구 경기의 묘미는
마지막 9회 말에 있습니다.

9회 말 마지막 순간까지
경기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신비로운 역전승을
종종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신화적인 야구 선수였던
요기베라는 "다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전승의 은혜란
고통으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최후에 웃는 자가 최후 승리자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도우시면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역전될 수 있습니다.

현실이 막막하더라도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우선 생각을 바꾸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역전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십시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을 변화시키십시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홈런을 날릴 수 있도록
자신을 성장시키십시오.

아직 홈런을
날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야구 경기는
9회 말로 끝나지만
인생이란 게임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마지막은 축복입니다.

역전승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최종 정착지는 천국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항상 아름다운 결론을
맺도록 도와주십니다.

출처:강준민목사
인생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