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경의 아브라함 외에 또 다른 유명한 아브라함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입니다.
신앙생활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링컨 대통령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며 묵묵히 갈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아주 좋은 대답입니다.
링컨은 유달리 실패를 많이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정치가로 입문하고 나서 그는 무려 일곱 번이나 계속해서 낙선의 고배를 마신 후 1860년에 미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때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이 실패가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링컨은 자신이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자신의 꿈은 더 자라났고 믿음도 더 온전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인내할 줄 아는 믿음을 통해서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존경받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신경증을 앓고 있어서 신경질이 많았던 링컨의 아내가 어느 날 건어물 가게에서 흥정하다가 가게 주인과 싸우고 15분 동안이나 욕설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다음 날, 가게 주인이 링컨을 만나 “당신 부인이 정치가의 부인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내게 무려 15분간 욕설을 퍼붓고 갔습니다.”라고 항의하자, 링컨은 정중하게 사과하면서 말했습니다. “저는 15년간 인내하고 살았거든요. 제아내에게 15분간 당하신 고통을 참고 잊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재 상황이 어렵다고 느끼십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필요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능하고 사랑이 많으신 전능자 그분을 만나지 않으시겠습니까? 엘 샤다이,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명언은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하나님이 이끄시게 하라”이다. 이 세 단어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신뢰야말로 바로 거룩한 확신이다.
우리의 정서적인 문제들은 대부분 뿌리 깊은 영적인 문제 , 곧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부족에서 비롯된다. 과거의 죄책감, 현재의 스트레스, 미래의 불안함,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해 확신을 얻지만, 그것은 확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다. 거룩한 확신은 환경과 전혀 무관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관계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환경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도록 너무나 자주 허용한다. 거룩한 확신은 우리와 환경 사이에 하나님을 개입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거룩한 확신을 갖는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거인들을 소인들처럼 만드실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까지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성화된다는 미명 아래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비 성화다. 자기 힘으로 자기를 돕겠다는 무익한 시도에 불과하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부족은 하나님의 도움을 거부하는 행위 그 이상의 일이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해서, 하나님을 돕겠다는 교만한 시도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고 애쓴다. 하나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노릇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다. 본래 우리 자신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통제하는 것은 사실상 신뢰의 문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더 통제하려고 할 것이다. 통제력을 잃으면 마치 생명을 잃는 느낌마저 든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을 이겨내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내가 10년 전쯤 장 파열로 생사가 달린 수술을 마치고 마취에서 깨어나 병원 침상에 누워 있을 때 그랬다. 갑자기 모든 것을 통제하는 척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사실 그런 척할 수도 없었다. 팔뚝에는 주사바늘이 꽂혀 있고 코에는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술을 잘 견디고 살아남았지만, 수술을 하면서 인간적인 자신감은 죽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드린다.
행성을 궤도에 붙잡아두려고 하는 것보다 영적, 정서적, 인간관계적으로 더 피곤한 것은 없다.
반면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보다 더 기운이 솟는 것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자유는 통제하기를 포기하고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인간적인 자신감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고 거룩한 확신이 부활하게 된다. 이 두 가지는 절대 공존할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힘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들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들이 단기적으로는 고통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그 일들에 대한 거룩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끄시게 하라!
죽음은 우리가 찬양했던 하나님, 사모했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살아왔던 모든 이들을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Good-bye”라는 인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어느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자녀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네 자녀가 있었는데 세 자녀에게는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아들 자니에게만은 “자니, 굿바이,굿바이”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러자 아들 자니가 “아버지, 저에게는 왜 다시 만나자고 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잖니?
너와 나는 다시 만날 소망이 없단다.
자니야, 이 아버지가 너에게 다시 만나자고 애기할 수 있도록 해 줄 수 없겠니?” 아들 자니는 그제야 비로소 울면서 “아버지, 저도 아버지가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구세주로 믿어요”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버지는 힘을 다해 사랑하는 아들의 손과 몸을 끌어안으며 “그래, 아들아,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말한 뒤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떠남인 동시에 만남입니다.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어느 집사님이 소천하셨습니다. 그분은 전도를 열심히 했을 뿐 아니라 슬픔이나 어려움 당한 가정이 있으면 꼭 찾아가서 위로해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교인이 찾아와 그분의 천국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저는 ‘집사님의 출발이 정말 아름답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살 날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선물로 준 보배보다 믿음을 가족과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 이것이 죽음에 대한 최고의 준비입니다. 이동원이 쓴 <인생 레슨>중에서
어미 독수리의 날개에 업힌 새끼는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미의 날개는 강력한 힘을 지닌 보호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은 노아의 방주, 40주40야 비가 쏟아져 내렸고, 그 물이 땅 위에 150일 동안 창일 했음에도 어느 한 곳 허술함 없이 안전했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잠잠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내’가 약한 인간임을 시인하고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도록 살아야만 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무엇’을 주시려고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소유된 자를 구원하심에 있어 시시한 임시 미봉책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독수리 날개에 업힌 새끼는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