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리더 :: '간증 모음' 카테고리의 글 목록 (11 Page)

먼저 하나님의
부름받으신
김준곤 목사님은
한국 대학생 모임인
CCC대표를 섬기면서
 거쳐간 대학생이
40만명이나 됩니다.

평신도는 350만
배출했습니다.

그분의 간증을 소개합니다.
 
전남 신안에
있는 2만여
주민이 사는
지도가 고향인데요.​​

유학자 집안으로
7대조 제사를
드리는
집안이며

아버지는
동네
유림회 회장으로
엄격한 선비셨습니다.

어머님이 제일먼저
예수믿으시고
철야기도를
많이 하신분입니다.

여덟살 때
문준경 전도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

일본군에
 끌러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오기도 했습니다.

해방후 첫 아내
인정진 사모와
결혼 했습니다.

김준곤목사님의 간증입니다.

6.25가 발발하자  
그 당시 지도면
일대에서는
2천여 명의 민간인이
공산당에게 떼죽음을 당했다

나와 아내가
끌러나가고
어린 딸
살릴려고
조용히 끌러갔습니다.

 동네 뒷산까지
끌려갔더니 마을 친척들을
비롯한 60여명의 사람들이 끌려
나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곤봉으로 사람들을
때려 신신시킨후
한꺼번에
죽창이나 일본도로
찔러 절명시켰는데
내 눈앞에서 아버지와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다 

곤봉에 맞아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셔서
아들인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계셨다

의식을 잃어가던
나는 아버지의 피 토하는
그 부르짖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시체더미 밑에
깔려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나는 그 때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죽음,
고통, 저주, 절망을 짊어지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울부짖었던 예수님의 고토을 보았다 

바로 그 십자가의 고통이
하나님과 만날 수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만날수 있게 해준 것이고
이런 고통 속에서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의
죽음을 경험했기에
전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고
통과 죽음을 함께 체험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아
‘전라남도를
거룩한 도시로 만들자’하고
다짐했다
​ 지금 지도는
63%가 기독교화 되었다

전남 성시화 운동은
그렇게 씨가 터서 싹을 냈다 

김준곤목사님의 또 다른
간증입니다.

둘째 딸 신희는
​ C.C.C에서 아버지를
도와 간사를 하다가
결혼하고 미국에 갔는데
미국 병원의 오진으로
뒤늦게 위암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나와
165일동안
투병하다가 내게 슬픈
무덤을 남기고
하늘나라에 갔다 

나는 내 딸 신희가
가혹하게 죽음의 순간까지
견디었던 극한 고통을 보면서 
그리고 아버지와 첫
아내의 죽음을 보면서
정신을 놓을 만큼
감당못할 아픔을 겪었다 

‘아빠, 살길이
없을까요?
살고 싶어요’

간절하게
되뇌던 딸은
죽는순간 마지막
유언기도를 했다

‘사랑하는 주님
나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이
찬송으로 사랑과 기도로
변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딸은
말을 못하고
의식을 놓더니
하늘나라에 갔다 
손이 점점 식어가면서
굳어져 갔다 

그 모든 존재가 사
라지는 제로점이었다 

그때
나의 아버지가
숨을 넘기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나 
내가 신희의
이름을 부른 것이나 
 
첫 아내가 순교하면서
딸 은희를 불렀을 것이나 
그리고 신희가 죽으면서
불렀을 아이들의
이름을 생각할 때 
그 모든 고통들 앞에서
존재가 사라지는
‘존재의 제로점’을 느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으면
피 흘리는 구원이 없었다면
그때 그 사건이 없었다면
회복할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섭섭함이 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때 십자가의
예수님은 소나기 같은
 피를 흘리고 계셨다 

내가 없어지는
존재의 제로점에서
나는 주님을 만나서
영혼 전에 택했다는
사랑도 이해되고

아버지의 학살과
첫 아내의 순교가
이해되고
소중한 보물 같은
내 딸아이의 죽음도
용서가 되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일산에 말씀과
찬양의 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김종찬 목사님

 78년 가수로
데뷔했으나
주목을 받은 건  
그의 1집 앨범
‘내 사람아’ 등을
발표한 85년 이후부터,
‘사랑이 저만치 가네’라는 곡으로

모든 방송
 가요 차트를 석권했고 
 ‘토요일은 밤이 좋아’,
‘당신도 울고 있네요’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10대가 수상을 받는 등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는 당시  
가요계의 최고의 아이콘이 되었다.

한때 TV, 라디오만 틀면
온통 그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승승장구하며
​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중반을 주름잡던
그가  
1996년 ‘산다는 것은’
음반 이후 
어느 날 그 무대에서 사라졌다.

무대에서 사라진
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98년 IMF를 겪으며
사업은 부도가 났고
여러 사람들에게까지
큰 손해를 입혀  
결국 구치소에 수감됐다.
​ 
화려했던
톱스타의 자리에서
곤두박질친 그는 미움,
분노, 증오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고통 중에 보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교도관 한 명이 왼쪽
오른쪽의 사람을 모으더니  
찬송을 부르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가 미션스쿨에서
즐겨 부르던 찬송
'234장
나의 사랑하던 책'이었다. 

자연스레
그 모임에 동참하게 되었다. 
어릴 적 미션 스쿨을 다니며
불렀던 찬송이
머리에서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절대 세상의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

모임을 갖던 중 그는
주체할 수 없는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두 가지 서원을 했다.

한 가지는 나머지 인생을
주님의 종으로 살겠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절대로 세상 노래는 부르지 않고 
주님만 찬양하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약속이었다.

수감을 마친 후
그는 7년간 신학을 공부했고, 
2009년 10월 한국 독립교단 및
선교단체 협의회
(한독선연 총회장 김상복 목사)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
(한국 백석대학 신학과 졸업)가 되었다.

현재 김종찬 목사는 교도소,
보호감호소, 군부대, 탈북자,
병원, 장애인 치매노인시설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찬양을
부르며 지내고 있으며,

아시아, 남미, 미주 등
전 세계를 돌며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직접 6곡을
쓰고 가사도 쓴,
4집 찬양음반
‘생명의 빛’ 등도 발매했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가장의 뜻을 지지해줬다. 
 일산에서 찬양집회를 통하여
영광을 돌리고 계시며
일산에 개척하여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사역하고 계십니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사업 실패하고
구치소에 있을 때
교도관이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 순간 성령님의 역사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성경을 통독하고
이제 저는
목사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특별한 은혜로 개입하시고
날마다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김종찬 목사님은
가장 힘들때 만났던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시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갈려는
순종의 고백이
우리들에게도 가득해
지기를 축복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AOA이라는 그룹의
요즘에 핫한 설현이라는
가수가 속해있고

최근 MC유재석을 영입하여
연일 화재를 일으키고 있는
FNC를 이끌고 있는
한성호(42) 대표이야기 입니다.

인기 5인조 밴드 그룹
FT아일랜드의 제작자이자,
남성 보컬그룹
SG 워너비의 프로듀서로써
드라마 온에어, 풀하우스 등
인기 드라마 주제곡의 작곡가로
유명한 한성호 집사

그는 꿈꾸던 가수는
 되지 못했지만
‘‘아이돌 밴드
미다스의 손’이 됐다.

FNC는 SM과 YG에 이어
한국 연예계를 대표하는
엔터테인먼트 사다

회사 이름에서부터
 예수의 향기가 드러난다

그가 말하길
“FNC는 FT아일랜드와
씨엔블루의
첫 글자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게 아닙니다.

사실은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
(Fish & Cake)의 기적을
의미합니다.”

회사 이름은
한 대표의
15년 전
서원기도에서 비롯됐다.

 명지대 중어중문과에 들어가
교수를 꿈꾸던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교내 밴드
‘화이트홀스(백마)’였다.

작곡가 이경섭 씨를
만난 것이
터닝포인트였다.
98년 녹음부터
믹스, 마스터링을
다 마친 곡(투 헤븐)이
조성모에게 넘어가면서
한 대표의 인생은 ‘‘못 다 핀
꽃 한 송이’ 신세가 됐다.

날마다 방황하며
술에 취해 살았는데
어머님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하루는 낮술을 먹고
속상해서 있었는데
어머니의 잔소리로
나가려고 하는데

"어머님이
한 번만 교회에
가보면 안되겠니"

일주일만
다니기로
마음먹고
어머니 소원 들어
 주기로 했다.

그때부터
새벽예배를 
 목동 반석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계심을
보여주세요.

다음날
또 기도하고
새벽에 기도하니
다른 성도가
청바지에
계속하니
술 취한 줄 알았다.

일주일 한 달
계속 다니던 중에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한 대표는 결혼 후
서울 방배동으로 이사해
로고스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다시 작곡을 한 것이
지금의 기적을
낳는 촉매제가 됐다.

당시 작곡비로
1001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받았는데
몽땅 감사헌금으로 냈다.

그리고 그때 막연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약 제게 음악을
하게 해주시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 후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2006년 12월 그는
 마침내 FNC뮤직(2013
 FNC 엔터테인먼트로 전환)을
설립했다.

고비도 많았다.
씨엔블루가 나오기 전
3030억 원의 부채를 져
부도 위기를 맞았지만
한 대표는 철저한 신앙생활을
 무기로 역경을 견뎠다.

3년 전 매출
 320320억 원에서
지난해에는 매출 600억
70007000만 원을
돌파했으며
코스닥에 상장하는 데
성공했다.

FNC는 현재 직원
150150여 명이
근무하는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 대표는 매주
 월요일 신우회 회원
3030여 명과 함께 오전
9시309시 30분에
예배를 드린다.

한성호 대표의 기도의 방법은
아이가 엄마에게 하듯이
솔직하게 고백한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드러내는
기업으로 만들었잖아요.

망하면 세상에서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하는 거잖아요.

나를 왜
여기에 세우신 건가요?

여기에 세우셨다면
어디를 가든
하나님 기업으로 말하려면
부끄럽지 않아야 하잖아요.

업계에 가서
밀리고 치이고
그럴 때 사람들이
재는 크리스천이래
그럼 말 들으면 속상하잖아요"

모든 일에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기 위해
일하기 전에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늦게 일어난 날은
교회에 들려서 기도하고
온답니다.
이렇게 기도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새벽 예배를
참석하지 못한 날은
꼭 하나님의 전에
들려서 기도하고
회사에 갈 것과 모든 일에
앞서서 하나님한테 기도하자"
라고 였답니다.

교회를 한 나라의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라고
생각을 한다면 
매일 30분 먼저 가서
한 시간 먼저 일어나서
교회를 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꿈이 없는 인생은
쓰지만
희망과 꿈은
인생의 사탕입니다.
 FNC는 엔터테인먼트계
구원의 방주가 되고 싶습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고 싶어요.

그리고
때가 되면
NGO를 설립해서
고아원과 학교를
100개 세우고
싶습니다.

씨엔블루가
아프리카에 학교를
세웠지만
홍보가 아닙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학교에 모으고 싶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한성호대표처럼
하나님께 소원을 두고
기도하시다가
하나님의 귀한 쓰임 받는
축복의 사람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24-26)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30년의 개그우먼이며
충현교회 다니는 이성미씨는​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TBC 개그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데뷔했습니다.

2013년에는 SBS 연예대상
 러브FM 부문 라디오 DJ상을 수상을
하기도 했는데요.

첫번째 신앙생활은 
새벽기도를
통해서 시작되었답니다.

새엄마가 새벽기도
나가보지 않겠니라는
말에 나가게 되고
10일후에 방언이 터지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중보기도의 동역자의
중요성을 깨닭았답니다.

이성미씨의 어린시절은
어머니가 4명이랍니다.

초등학교를 4학년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후에 새엄마가
그렇게 많게되고
그때마다 삐탁하게
살아옵니다.

아버지 사랑만 받고
살아와서
늘 죽음만을 생각하고
늘 유명했지만
불행했답니다.

인터넷을 보면서
내과거를 지으고
싶어요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2002년 월드컵때
케나다로 떠났습니다.

내 좋은 것 다 빼았아 가서
늘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TV프로 7개와 라디오를
2개를 하는데도
캐나다로 떠났습니다.

이유는 아이가 유학을
간다고 해서 갔지만
도망치듯이 갔습니다.

2002년 9월
한국을 떠날 때 이 집사는
 마흔셋, 큰아들은 열셋,
​둘째 딸은 다섯 살이었다.

 막내딸은 태어난 지 14개월.
​낯선 곳에서 가족은 힘들었다.
​특히 아들은
 심하게 사춘기를 보냈다.

그때부터 아들과의
갈등이 있었고
공부와의 갈등으로
괴로워합니다.

사실 욕쟁이였답니다.

내안의 상처가 있어서
욕을 아들에게
하기 시작합니다.
“미친놈,“이 XX 진짜 똑똑하다.”
​밥먹듯이 했습니다.

공부를 너무 해서
공부안하면" 너
거지된다."라고 했습니다.

학교를 안가면
학교에서 전화가
오니
"너는 학교 교장이니."라고
욕을 했답니다.

이번에도 아들이
컴퓨터하고 있는데
나오라고 했는데

아들이 애이씨라고
했는데
내가 때릴려고 하니
나를 잡았고
또 욕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갑자기
"집사란 인간이
집안에서 이러는것 알아."
하는데 힘이 빠지고

새벽기도를 또 갔습니다.
가면 아들 바꾸어달라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다음날도
아들에게 밥을 주면서
"야 날샌놈 밥먹고
학교가."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 말씀
하신겁니다.

"네 아들 네가 말한대로
만들어 줄까."

갑자기 두려움이
들었고 17년욕을 한것을
방에 가서 회개했습니다.

놀랍게 기도하고 나서
욕을 하지않으니
이제 아들이 욕을
안먹으니 너무 고민이되어
일주일되어서
물었답니다.

"왜 욕을 안해."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이젠 순종한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아들이 공부하고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직 내안에
있는 쓴뿌리가 남아있었고
이때 큰 사건이 터지게됩니다.

아들이 운동을 잘하는데
운동장을 금을 긋고
축구하고 한쪽은 하키를하는데
서로 싸우게 되고
축구공을 발로 찾는데 그중에
한 아이가 맞으면서 넘어져
뇌진탕으로 쓰러지고
아들은 교장실에 갇히게
됩니다.

경찰과 엠브란스를 불렀고
아들의 문자를 받아서
가서 볼려고 차를 탔는데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율법으로만 가르치는 모습을
보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키우지 못하고
내 이름에 먹칠할까봐
날마다 잔소리로 했는데
40분을 회개하고 갔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너희는 추방될것이고
아들은 감옥갈것이다라고
합니다.

가서 만나는데
마침 무전기로 연락이 오길
다친 아이가 깨어나서
아들이 처벌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학교에서 14일 정학만 맞고
집에 오게 됩니다.

집에 와서
아들에게 무릎을 끊고
내가 미안하다
내가 잔소리하고
잘못했다라고
했는데

아들이
나에게 한번이라고
잘한다라고 한적있어라고
하는데 같이 울었습니다.

다음날 새벽기도를
갈려고 하는데
아들이 같이 가겠다는
거예요.
그날부터 같이 다니게됩니다.

어느날 아들이
새벽예배때
하나님이 날 부른데라고
합니다.

목회를 해야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달뒤에 아들이
목회한다고 하는데
너무 기뻤답니다.

다시 한국으로 오는데
아들을 데리고 오고
싶은데 하나님이
이제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돈도 주지 말고
하나님이 축복주신것을
가로채고 있다고 해서
혼자 알바하면서 공부하는데

어느날 전화가 왔는데
4년 장학금을 받게 하였습니다.

이성미집사에게 큰 위기가
개인에게 찾아오게됩니다.

건강검진이 아니라
 방송을 위해서
검사하던중에
유방암이 발견되어
12번 수술을 하게됩니다.

그때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열심히
사는데 어떻게 암이 올수 있나?
하면서 나중에 알수 있겠지 하는데

사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울랄라세션의
리더였던 임윤택씨가
 한참 암 투병때
이성미집사는
복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마음속에 갈등이
"난 암을 겪지 않아서
고통을 모르니 말로만 떠든라."라고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게도
 그런 고통이 있다면
내가 다가가서
위로할수 있을텐데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암을 주셔서 암으로 고생하는
임윤택에게 전화를 걸어서

"윤택아 내가 암에
 걸려보니까 그동안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는 내가 조금 알겠다"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고난이 축복입니다라고
고백을 한답니다.

결국 무사히
수술을 마친 후 이성미는
"내가 하루하루를 덤으로 사는구나.

내 인생에서 눈을 감았다가
내일 뜬다는 보장이 없다면
내가 오늘 하루 정말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달라진 마음가짐을 알렸다.

그리고는 "그 이후로
 버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순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고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옛날에는 먼 미래에
어떤 행복을 꿈 꾸곤 했는데
이제는 오늘 하루가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이 집사는 북한선교에
 대한 비전을 밝히기도 했다.

이 집사는 "하나님께서
북한선교에 대한 비전을 주셨다"며
 "하나님께 칭찬받는 딸이 되고 싶다.
북한선교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집사의
성경 속 신앙 롤모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구레네 시몬이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서
주변에 힘들어 하는 동역자가 있다면
그 짐을 나누고 싶어서라고 한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누군가 힘들어 할 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되기를 바래요.

그래서 많은 이들을 섬기는 것과
그들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을 허락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어요."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탤런트 하희라는
최수종의 아내이기도 하며
선하고 아름다운교회집사입니다.

절친인 신애라씨의
기도제목중에
하희라의 예수믿는것이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개입도 있었는데요.

방송시작하게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초등학교6학년때
선생님과 같이
방청을 왔다가 선생님이
합창단을 하라고 해서
시작하다가 방송을
했다는데요.

집안이 딸이 세명인데
서로 화기애애하게
자랐답니다.

중국요리를 잘하는
중국아빠와 한국의 엄마와
만나서 자랐기에
다문화 가정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고합니다.

하집사님는 2008년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했다.

 불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언니와 동생을 따라 교회에 다니고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간증했다.  

하집사님의 고백입니다.
 “결혼 초 불교신자였어요.
 시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교회에 다니기도 했지만
사람의 상처로
교회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죠.

 사실 집안대대로 믿어왔던
불교와 미신을 지키면서
영적으로 힘든 성장기를 보냈어요.

미신 때문에
벽에 못 박는 것조차 하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어요.

결혼하고 나서도 몸도 아프고
 무섭고 영적으로 많이
예민할 때가 있었는데
불교신자였던 동생이
먼저 교회에 가야겠다는 거예요.

동생이 엄마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 엄마가 반대해도
나는이제 교회가야돼."
하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을 받게되고

저도 계기를 찾고 있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그날 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교회에 가겠다고 했어요."

지금은 세자매가
믿음으로 서로를 위로해주고
함께 할수 있어서 감사한답니다.

하집사님은  
1991년도부터
가위에 누리기 시작했는데
상가집을 갔다오거나
사고 난 장면을 보고 나면
사람의 모양으로 귀신이
나타나서 목을 누르고
침대를 뛰어다니고
시달림에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교회를 가야되겠다고
 한 순간부터
​가장 무섭고 두려운
그 일이 없어지게 되고

한번은 드라마를 하다가
잠결에 무엇인가가 나온것 같아서
예수 그리스도이름을 물러거라고
외치고 그주에 주신 말씀이
이미 승리한 싸움이였고
예수이름으로 승리했다라는
승리의 깃발을 꼿게됩니다.

집사님의 고백입니다.

“수요예배에 처음 나갔는데,
신기하게 그날부터 지금까지
가위 눌린 적이 없고
 귀신 따위는 보이지 않아요.
 교회 다니기 시작한 날부터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강하게 이끌어
주셨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결혼전에 하희라집사가
믿지 않는 집안이라서
점을 치러갔더니
남편과 결혼을 하면
1년을 못산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속았답니다.

연기 생활을 하면서 만난
동료 탤런트 최수종 집사와
1993년 결혼, 봉사활동에 앞장서며
연예계 ‘잉꼬 부부’로 소문나있는데요.  

“크리스천 남편과 결혼했지만
신혼 초기에 잠깐 교회에 따라갔다가
제 딴엔 어떤 상처를 받아
교회를 다니지 않았어요.

그런 저를 남편은
무려 15년이나 기다려준 겁니다
아마 남편이 제게 종교를 강요했다면
저 또한 교회를
형식적으로 다녔을 거예요.”

하희라씨가 예수믿기전에
절에 가게되면
남편 최수종씨는 같이 가서
기다려주고

집안에서도 다같이
기다려주었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감사하고 있답니다.

한번은 특송을 할
스케줄이 있는데
그날 아침에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그때 깨닭는 사명을
회복하게  됩니다.

연약함을 통해서
아픈사람들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그들을 섬길수있게
되었답니다.

 남편 최수종 씨가
시나리오가 좋다고 해서
 출연하게 된 드라마
‘바보 엄마’를 시작할 때에는
일을 시작하면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질 것 같아 걱정했다고 한다. 

“믿음을 가진 상대역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랬는데 신현준 씨가
상대역이라고 해서 놀랐어요.

일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연기했어요.
힘들 때면 하나님께서는
신현준씨를 통해 저를 회복 시키셨구요.
믿음의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어요.” 

믿음으로 하나 된 부부는
요즘 봉사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몇 년 전 손에 화상을
심하게 입는 경험을 한 후,
병원에서 고통 가운데 있는
 화상환자들을 위해
지속적인 봉사를
결심하게 됐다고 합니다.

화상환자들을 위해
음반제작을 하면서 재능기부라는
분야를 생각하게 되었고,
체계적인 공부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을 돕기 위해
시작한 대학원 공부
(사회복지학)에도 매진하고 있답니다.
최수종,하희라 부부는
죽어서도 선행할것이라고 하면서
인체조직 기증 희망서약을 했는데요.

인체조직은 뼈·연골·근막·피부·
양막·인대·건·심장판막·혈관 등
9가지를 말하는데요.

피부이식이 필요한 화상환자,
암치료 후 뼈나 조직의
재건이 필요한 환자,
당뇨나 협심증 등으로
새로운 혈관 이식이
필요한 환자 등에 쓰인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1978년 데뷔하며
대학생 때 데뷔하여
30년이 넘어간 세월 동안
연기자로 활동한
서울 온누리 교회 집 사이 신
강석우 씨를
소개합니다.

모태신앙이며
본인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봐
항상 날마다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본인은 삶이 예수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기 원하는
개인적인 소망이기도 합니다.

10 때의 교회에서의
수련회 때의 신앙이 가장
뜨거웠다고 하는데요.

충현교회 장로님들이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그대로 순종했는데
그 믿음이 지금도
감사로 느껴진다고 합니다.

연기자가 아니었다면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요.

대학교 때 프로듀서를 하고 있었고
학과에서는 뮤지컬을 하고 있었는데
선배가 연기자로 지망하라고 하는데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상금을 타면
그것으로 무얼 먹자고 하는데
가서 그곳에서 뽑히고
연기자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1978년에 선배 이미례 감독님의
권유와 도움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던
영화진흥공사 주최 '제1회 남녀
주연배우 공고'를 통해 영화계에 입문했다.

본격적으로 연기자를 시작하게
되는데 1982년 보통 사람들에
캐스팅되어서 인기 있는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내 길이 아닌가라고
갈등이 항상 있었고
젊은 의 행진을 시작하게 되고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큰 박수를 듣고 살면
나중에 잘못되겠다고 싶어서
그 후에는 쇼 프로는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 들할 때 미리 한 시간 전에
들어가서 미리 기도하면서
힘을 얻고 이겨내기도 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겸손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1986년의 겨울 나그네를
하게 되는데 이곳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이 영화가 흥행하지 못하면
나는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고 했답니다.

하물며 낚시터에서의 장면을
찍기 위해서 일주일을 머리 감지
않고 지낼 정도였답니다.

본인이 신앙이 흔들리는 것은
나이 들면서 더욱 흔들리게
되는데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으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기도제목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 꿈이자
목표입니다."

강석우 씨는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찬양을
너무 크게 불러서
아내와 자녀들이
하소연을 한다고 하는데요.

부인이 하는 말이 "너무 큰소리를
내서 부끄럽다고 하면"
강석우 씨의 말이
"회사에 회식 가거나 야유회 가면
고속버스에서 노래를 목이 쉬도록
부르는데
교회에서 크게 부르다가
죽으면 좋지."라고 한답니다.

한 번은 강석우 씨의 부인이
천주교를 다니다가 와서
강석우 씨가 십일조 헌금을
많이 내는 것을 보고

"당신 무슨 헌금을 그렇게
많이 내요, 돈 모을 수 있을 때
모아야지."라고 했을 때

강석우 씨가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이고
하나님의 명령이야."라고
해서 단 한 번도 그렇게
단호하게 말 한적 없는 남편의
말에 놀랐다고 합니다.

주일날에 스케줄이 잡혀서
지방 촬영을 가야 한다고
전화를 하면
단호하게 "주일엔
교회 가야 합니다."라고 한답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해도
적당히 하면 좋겠지만
그의 신앙에 영향을 주신 분이
계신데요.

특히 어머님의 기도에
영향을 많이 받으셨는데요.

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
주위 사람들이 천사 같다고
하며 고부 간의 갈등이 없을
정도로 며느리하고 관계도
좋았다고 합니다.

남아 드신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양보하다 보니 갈등이 없었답니다.

어느 정도로 기도하셨냐면
무릎이 나중에는 못쓸 정도로
기도하신 분이 셨답니다.

그래서 매일 밤 12시 되면
아들방에서 딸의 방에서
같이 기도한답니다.

강석우 씨가 고백하기를
"가정예배가 가장
좋은 것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대학교에서 강의할
일이 있었을 때
꼭 하는 말이
십일조를 꼭 합니다라고
고백을 한답니다.

믿음의 유산이
축복이라고 고백합니다.

좋은 부모님
좋은 목사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좋은 기도의 모델이
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강석우 씨가
인생의 삶의 포인트는
첫째 가정예배
둘째 기도의 모델
셋째 십일조를
통하여
믿음의 유산을
남기길 기도한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개그 콘서트 출산드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여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도
출연하였고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 씨는
벌써 시즌 14회를
넘겼으며
MBC 역군 특집에도 참여한 
대한민국 희극배우인
김현숙 씨를 소개합니다.

처음 시작을 연극과
뮤지컬을 하다가
개그는 10개월만 했는데
워낙 인기가 있다가 보니
대부분 사람들은
개그를 먼저 했는 줄
안답니다.

출산드라 시작했을 때
첫 회이었는데는
댓글이 100페이지가
된 것은 최초였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인기 급증한 그때에
 원래의
꿈인 배우를 위해
그만두게 됩니다.

사실 그 뒤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믿음이 있었답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주셨냐면 배우로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셨답니다.

그때 미녀는 괴로워를
통하여 영화배우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김현숙 씨는 중대한 결단의
순간에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응답을 누린답니다.

김현숙 씨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의 때와 하나님의 때는
다르답니다."

이렇게 확신과
항상 웃음을 주는
그녀이기에
살아온 삶이 평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어릴 때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랐다고 하네요.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어머님이 혼자서
삼 남매를 키우셨답니다.

그러다 보니 원망을
많이 했다는 데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일기장에 "왜 나는
이런 집에 살아야 하나요.?하면서
방에서 혼자서 울기도 하고
세상이 혼자인 것 같고
하나님이 정말 계신 것 맞는가 하면서
너무 비틀어진 성격 때문에
엄마가 신경정신과에 상담받을
정도였답니다.

모태 신앙이던 그녀가
초등학교 때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만

힘들고 어려움을
누구에게 말할 수가 없으니
일기장에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를
많이 하게 되었답니다.

어머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는데
20년 넘게 청소년에
관심을 가지고 복지의
비전을 품고 계신 어머님이
복지관도 하셨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놀이방도 운영했기에
학교에 다녀오면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먹고살기 힘든데
어머님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날마다 하나님께 삼 남매에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시면서 믿음으로
삶을 보이셨기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보고 깨닫게 되었답니다.

IMF 어러움이 오게 되고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늘을 보았는데
하늘은 공평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하늘을 보는 사람은
똑같기에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더 큰 응답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처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특별한데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숙제로 12년 살아온
전기를 써서 발표하라고 했는데

평소에는
항상 얌전하고 부끄러운
성격의 그녀가
토요일 한국 영화를 보면서
약장수가 외친
“하늘 나는 저 새를 봐!
힘이 없어? 아니야.
그건 영양실조야!
이 약 한 번 잡숴봐!”
이 대사를 듣고
글을 쓰게 되었답니다.

다음날 학교에서 발표하는데

남들은
“저는 1978년 몇 월 며칠 어디서
 태어났고 장래 희망은요” 그랬는데
 저는
“자, 때는 1978년이야!
현숙이가 응애 응애 태어나는데...” 하고,
했는데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고
자신감으로 성격이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때 연극반을 하다가
부산 경성대학 연극 영화과를
다니면서 처음에는 뮤지컬을
시작했답니다. 

우연히 갈갈이 박준형 씨가
KBS 방송팀과 부산에 내려오면서
일찍 데뷔를 할 수도 있었는데요.

제안을 받았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펑키 펑키라는
공연에 3차 오디션 합격하여
출연하게 되고
그때 컬트 초기 멤버 정성환 씨가
창의적인 새 대사를 추가하다 보니
그녀의 분량이 40분이 늘었답니다.

그때 개그우먼 김지혜 씨가
보고는 박준형 씨에 말을 했는데
놀라운 것은 이미 박준형 씨가
부산에서 알고 있었기에
찾아오게 되었고

개콘에서 드디어
대학에서 한번 해보았던
출산드라를 했는데
대박 나게 된 것입니다.

 김현숙 씨는 자신의 힘들고
어려웠던 과거의 삶을
통하여 연기를 배우게 되었답니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면서
간접경험이 아닌 직접경험을
통하여서 지금은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견딜 만큼만 주셨고
지금은 너무 감사합니다."

김현숙 씨의 기도제목은
청소년의 수련장을 세워서
어머니의 꿈을 이어서
 희망을 미래에
전달하는 멘토가
되길 원한답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님을 저의 멘토로 세우 시어
삶을 통하여 증인으로 보여주시고
끝까지 기도를 통하여
집안이 든든한 믿음의
가문으로 바뀌었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KBS 15기 성우이며
"도와줘요 뽀빠이 1"을 외치는
올리브 역할로 유명하며
다수의 에니메니션 더빙을
출연하였고

최근에는 연극 친정엄마, 여보
고마워, 영화는 해운대,
드라마는 시크릿 가든,
별에서 온 그대, 미생,
아이가 다섯, 연애의 발견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 성병숙 집사를 소개합니다.

성우가 된 계기가 우연이었답니다.

개그우먼으로 시작했답니다.
봉숭아 학당의 학생이였고
MC를 하면서 정소녀와
동급으로 인기를 얻게 됩니다.

사실과는 연기와 관계없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남자 형제가 없으니 대학을
졸업하고 선산이나 지키라."라고 해서
 고려대 임학[농업] 과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결국 과에서
 적응을 못하고 방황을
하게 되고 오히려 연극에
열중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TBS 성우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하게 되는데
원래부터 목소리가 좋았고
대학교 때 아르바이트로 잡지사에
근무하는데 기자분이
"넌 딱 성우가 적임이다."라고
하면서 원서를 접수 시켜준 것입니다.

그런데 성우 시험 합격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는데 아버지가
가문의 수치라고 찢어 버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빼앗아 주었고
결국 MC와 리포터로 활동합니다.

아버지께서 방송국 사람과는
안된다고 해서
 27살에 지인의 소개로
첫 번째 결혼을 하면서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살게 되면서 갈등이
있었고

또 다른 것은
짧은 연애 기간인지
갈등으로 결국 3년 만에
딸을 키우는 조건으로
이혼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 이혼 때에
아버지가 풍치가
올 정도로 아픔이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혼자 7년을 딸을 키우며
지내다가 10년 만에
재혼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 남편은 사업을
하면서 경제적으로는
풍족했지만
딸을 돌볼 여유가 없었던지라
딸이 방황을 하게 됩니다.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는데
IMF 때 경제 실패로 인해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100억의 부도를 맞게 되면서
친정아버지 집까지
담보로 되어있어서
결국 넘어가게 됩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중풍에 쓰러지고 
남편은 외국으로
도피를 해서 지금도 소식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친구가 부천에 아파트를
마련해 주어서 그곳에서
있으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친구가 너를 내 옆에
붙여서 돌보라고 하나님이
보낸 것 같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그 친구가
전도왕이 되어야 하니
교회에 나오라고 했고

이제 3주를 나와야 한다고
3주 앉아있고
친구가 성가대 지휘를 하다 보니
같이 있다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플 때에
친구가 아버지의 손을 잡을 잡고
있으라고 하면서 전화로
기도해 줍니다.

그때의 기도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니까
치료될 것을 믿어."라고
하면서 뇌졸중과
치매가 많이 치유되었고

결국 친구의 인도함으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100억 대의 빚을 고스란히
안게 되어 날마다 채무자들이
생방송하는 곳까지 찾아옵니다.

또 다른 충격을 받게 되는데
딸이 우울증으로 집 밖을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되고
결국 딸을 캐나다 유학을
보내고 혼자서 빚을
갚기 위해 어떤 일이든지
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의지하면
친정어머님이 충격으로
치매에 걸리시게 되고
본인 때문이라고
자책을 하게 됩니다.

IMF로 인해서
성우의 일도 없어지고
아버지 쓰러지셨고
어려울 때에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라디오의
DJ를 인도하게 해주셨고
그 프로그램이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힐링하는 프로를
하다 보니 더욱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자신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것입니다.

아침마당 생방송하면서도
채무자가 왔는데도
 동료들이 같이 위로해주고
서로 함께 해주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성병숙 집사의 기도가
"힘든 중에도 하나 되게
해 주세요."라고 했는데

계속 작품을 주시고
가족이 함께 해주셨고
특히 어머님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젊을 때 일이 터지니
다행이다."라고
여장부같이 힘을 줍니다.

성병숙 집사가 엄마에게
"나 하나님 믿을 거야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주신 것 같아."
라고 했더니

어머님이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럼 나도 오늘부터 하나님을
믿는다.
한 집에 두 신이 있으면 안 된다.
나는 너와 같아"라고 결단을 내리십니다.

사실 이전에는 점치러 다니고
굿하고 하던 어머님이  단 한 번에
바뀌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디.

아버지는
완고하시고 나를 믿어라고
했던 분이신데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요양 원가실 때에 목사님께
예배를 드려달라고 부탁을
했고 놀라운 일은
아버지가 매너 있게
네 네 하시는데

목사님이 아버지께
이렇게 묻습니다.
"따님을 사랑하시죠."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럼요."대답하니

"그럼 따님의 소원은
아버지가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 즉시 아버님이
예수님을 모신 후에
3달 지나서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배우 성병숙 집사는
엄마가 나를 해바라기처럼
사랑했는데 본인은
딸을 사랑하지 못 해서
너무 힘들어했는데

그때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세월이 지나면 사랑하게 되고
진정한 친구가 된단다.
그리고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다 보듬어 주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본인의 재혼으로 아빠에게
보내게 되어
딸이 아빠에게 가 있었을 때
할머니가 너를 버렸다고 해서
딸이 그렇게 엄마를 괴롭혔고
너무 힘들어서 유학을 보내버립니다.

사실 재혼 후 중간에
딸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무작정 오게 되었고
그때까지는 서로가 좋았답니다.

그런데 IMF 이후에
딸이 학교를 가기 싫어해서
캐나다에 보내게 된 것이지요.

성병숙 집사님이 빚을
갚아야 하니 갈 수가 없었고
딸을 그곳에서 혼자 힘들게
있다가 방학 때 와서 이런
고백을 했답니다.

딸의 고백입니다.
"사실 유학하면서
방황하고 친구들과 나쁜 짓들을
하려고 하면 계획이 잘못되어지고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라고 하는데 성 집사님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감사한다고
고백을 했답니다.

유학을 보냈는데
고3 때에 한국에 짐 싸고 와서
연기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준비시키고
두 번째에 합격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합격하기까지
하나님의 기적이
있었답니다. 
 교회에
새 신자를 섬기기 위해
갔는데 첫 번째 시험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두 번째 시험이 있기 전
일주일 동안 판소리를
배워서 판소리로
합격하게 됩니다.

어렵게 들어간 학교에 가서
딸이 공부를 하지 않아서
참 힘들었는데

지금은 제자훈련을
먼저 하고 방언도 먼저 하고
새벽 기도를 먼저 하는
믿음의 딸이 되어
동역자로 쓰임 받게 됩니다.

서병수 집사님의 고백입니다.

"보잘것없고 상처투성이인
자신를 묵상하지 말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묵상하세요."라고
하신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답니다.

힘든 이들에게 서 집사님의
위로 말 한마디입니다.

"지금 나 때문이야
나는 이 정도 밖에 안되라고
힘들어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지나간 것 상처에 괴로워하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과 성경에 있는 것을
삶에 적용하시면 나중에
나를 훈련하시는 것이구나."라고
깨닫게 된답니다.

사실 서 집사님의 삶의
무게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친구의
전도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허락하시고 아픔과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묻어나는 것 같아서
같이 기쁘고 행복해지네요.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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