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가수로 데뷔했으나 주목을 받은 건 그의 1집 앨범 ‘내 사람아’ 등을 발표한 85년 이후부터, ‘사랑이 저만치 가네’라는 곡으로 모든 방송 가요 차트를 석권했고 ‘토요일은 밤이 좋아’, ‘당신도 울고 있네요’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10대가 수상을 받는 등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는 당시 가요계의 최고의 아이콘이 되었다. 한때 TV, 라디오만 틀면 온통 그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승승장구하며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중반을 주름잡던 그가 1996년 ‘산다는 것은’ 음반 이후 어느 날 그 무대에서 사라졌다.
무대에서 사라진 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98년 IMF를 겪으며 사업은 부도가 났고 여러 사람들에게까지 큰 손해를 입혀 결국 구치소에 수감됐다. 화려했던 톱스타의 자리에서 곤두박질친 그는 미움, 분노, 증오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고통 중에 보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교도관 한 명이 왼쪽 오른쪽의 사람을 모으더니 찬송을 부르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가 미션스쿨에서 즐겨 부르던 찬송 '234장 나의 사랑하던 책'이었다. 자연스레 그 모임에 동참하게 되었다. 어릴 적 미션 스쿨을 다니며 불렀던 찬송이 머리에서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절대 세상의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 모임을 갖던 중 그는 주체할 수 없는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두 가지 서원을 했다. 한 가지는 나머지 인생을 주님의 종으로 살겠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절대로 세상 노래는 부르지 않고 주님만 찬양하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약속이었다. 수감을 마친 후 그는 7년간 신학을 공부했고, 2009년 10월 한국 독립교단 및 선교단체 협의회 (한독선연 총회장 김상복 목사)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 (한국 백석대학 신학과 졸업)가 되었다. 현재 김종찬 목사는 교도소, 보호감호소, 군부대, 탈북자, 병원, 장애인 치매노인시설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찬양을 부르며 지내고 있으며, 아시아, 남미, 미주 등 전 세계를 돌며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직접 6곡을 쓰고 가사도 쓴, 4집 찬양음반 ‘생명의 빛’ 등도 발매했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가장의 뜻을 지지해줬다. 일산에서 찬양집회를 통하여 영광을 돌리고 계시며 일산에 개척하여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사역하고 계십니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사업 실패하고 구치소에 있을 때 교도관이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 순간 성령님의 역사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성경을 통독하고 이제 저는 목사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특별한 은혜로 개입하시고 날마다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김종찬 목사님은 가장 힘들때 만났던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시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갈려는 순종의 고백이 우리들에게도 가득해 지기를 축복합니다.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 씨는 벌써 시즌 14회를 넘겼으며 MBC 역군 특집에도 참여한 대한민국 희극배우인 김현숙 씨를 소개합니다.
처음 시작을 연극과 뮤지컬을 하다가 개그는 10개월만 했는데 워낙 인기가 있다가 보니 대부분 사람들은 개그를 먼저 했는 줄 안답니다.
출산드라 시작했을 때 첫 회이었는데는 댓글이 100페이지가 된 것은 최초였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인기 급증한 그때에 원래의 꿈인 배우를 위해 그만두게 됩니다.
사실 그 뒤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믿음이 있었답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주셨냐면 배우로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셨답니다.
그때 미녀는 괴로워를 통하여 영화배우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김현숙 씨는 중대한 결단의 순간에는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응답을 누린답니다.
김현숙 씨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의 때와 하나님의 때는 다르답니다."
이렇게 확신과 항상 웃음을 주는 그녀이기에 살아온 삶이 평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어릴 때에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랐다고 하네요.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어머님이 혼자서 삼 남매를 키우셨답니다. 그러다 보니 원망을 많이 했다는 데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일기장에 "왜 나는 이런 집에 살아야 하나요.?하면서 방에서 혼자서 울기도 하고 세상이 혼자인 것 같고 하나님이 정말 계신 것 맞는가 하면서 너무 비틀어진 성격 때문에 엄마가 신경정신과에 상담받을 정도였답니다. 모태 신앙이던 그녀가 초등학교 때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만 힘들고 어려움을 누구에게 말할 수가 없으니 일기장에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를 많이 하게 되었답니다.
어머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는데 20년 넘게 청소년에 관심을 가지고 복지의 비전을 품고 계신 어머님이 복지관도 하셨고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놀이방도 운영했기에 학교에 다녀오면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먹고살기 힘든데 어머님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날마다 하나님께 삼 남매에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시면서 믿음으로 삶을 보이셨기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보고 깨닫게 되었답니다.
IMF 어러움이 오게 되고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늘을 보았는데 하늘은 공평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하늘을 보는 사람은 똑같기에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더 큰 응답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처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특별한데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숙제로 12년 살아온 전기를 써서 발표하라고 했는데
평소에는 항상 얌전하고 부끄러운 성격의 그녀가 토요일 한국 영화를 보면서 약장수가 외친 “하늘 나는 저 새를 봐! 힘이 없어? 아니야. 그건 영양실조야! 이 약 한 번 잡숴봐!” 이 대사를 듣고 글을 쓰게 되었답니다.
다음날 학교에서 발표하는데
남들은 “저는 1978년 몇 월 며칠 어디서 태어났고 장래 희망은요” 그랬는데 저는 “자, 때는 1978년이야! 현숙이가 응애 응애 태어나는데...” 하고, 했는데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고 자신감으로 성격이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때 연극반을 하다가 부산 경성대학 연극 영화과를 다니면서 처음에는 뮤지컬을 시작했답니다.
우연히 갈갈이 박준형 씨가 KBS 방송팀과 부산에 내려오면서 일찍 데뷔를 할 수도 있었는데요.
제안을 받았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펑키 펑키라는 공연에 3차 오디션 합격하여 출연하게 되고 그때 컬트 초기 멤버 정성환 씨가 창의적인 새 대사를 추가하다 보니 그녀의 분량이 40분이 늘었답니다.
그때 개그우먼 김지혜 씨가 보고는 박준형 씨에 말을 했는데 놀라운 것은 이미 박준형 씨가 부산에서 알고 있었기에 찾아오게 되었고
개콘에서 드디어 대학에서 한번 해보았던 출산드라를 했는데 대박 나게 된 것입니다.
김현숙 씨는 자신의 힘들고 어려웠던 과거의 삶을 통하여 연기를 배우게 되었답니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면서 간접경험이 아닌 직접경험을 통하여서 지금은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견딜 만큼만 주셨고 지금은 너무 감사합니다."
김현숙 씨의 기도제목은 청소년의 수련장을 세워서 어머니의 꿈을 이어서 희망을 미래에 전달하는 멘토가 되길 원한답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님을 저의 멘토로 세우 시어 삶을 통하여 증인으로 보여주시고 끝까지 기도를 통하여 집안이 든든한 믿음의 가문으로 바뀌었답니다.
KBS 15기 성우이며 "도와줘요 뽀빠이 1"을 외치는 올리브 역할로 유명하며 다수의 에니메니션 더빙을 출연하였고
최근에는 연극 친정엄마, 여보 고마워, 영화는 해운대, 드라마는 시크릿 가든, 별에서 온 그대, 미생, 아이가 다섯, 연애의 발견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성병숙 집사를 소개합니다.
성우가 된 계기가 우연이었답니다.
개그우먼으로 시작했답니다. 봉숭아 학당의 학생이였고 MC를 하면서 정소녀와 동급으로 인기를 얻게 됩니다. 사실과는 연기와 관계없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남자 형제가 없으니 대학을 졸업하고 선산이나 지키라."라고 해서 고려대 임학[농업] 과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결국 과에서 적응을 못하고 방황을 하게 되고 오히려 연극에 열중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TBS 성우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하게 되는데 원래부터 목소리가 좋았고 대학교 때 아르바이트로 잡지사에 근무하는데 기자분이 "넌 딱 성우가 적임이다."라고 하면서 원서를 접수 시켜준 것입니다.
그런데 성우 시험 합격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는데 아버지가 가문의 수치라고 찢어 버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빼앗아 주었고 결국 MC와 리포터로 활동합니다.
아버지께서 방송국 사람과는 안된다고 해서 27살에 지인의 소개로 첫 번째 결혼을 하면서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살게 되면서 갈등이 있었고 또 다른 것은 짧은 연애 기간인지 갈등으로 결국 3년 만에 딸을 키우는 조건으로 이혼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 이혼 때에 아버지가 풍치가 올 정도로 아픔이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혼자 7년을 딸을 키우며 지내다가 10년 만에 재혼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 남편은 사업을 하면서 경제적으로는 풍족했지만 딸을 돌볼 여유가 없었던지라 딸이 방황을 하게 됩니다.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는데 IMF 때 경제 실패로 인해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100억의 부도를 맞게 되면서 친정아버지 집까지 담보로 되어있어서 결국 넘어가게 됩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중풍에 쓰러지고 남편은 외국으로 도피를 해서 지금도 소식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친구가 부천에 아파트를 마련해 주어서 그곳에서 있으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친구가 너를 내 옆에 붙여서 돌보라고 하나님이 보낸 것 같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그 친구가 전도왕이 되어야 하니 교회에 나오라고 했고
이제 3주를 나와야 한다고 3주 앉아있고 친구가 성가대 지휘를 하다 보니 같이 있다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플 때에 친구가 아버지의 손을 잡을 잡고 있으라고 하면서 전화로 기도해 줍니다.
그때의 기도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니까 치료될 것을 믿어."라고 하면서 뇌졸중과 치매가 많이 치유되었고
결국 친구의 인도함으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100억 대의 빚을 고스란히 안게 되어 날마다 채무자들이 생방송하는 곳까지 찾아옵니다.
또 다른 충격을 받게 되는데 딸이 우울증으로 집 밖을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되고 결국 딸을 캐나다 유학을 보내고 혼자서 빚을 갚기 위해 어떤 일이든지 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의지하면 친정어머님이 충격으로 치매에 걸리시게 되고 본인 때문이라고 자책을 하게 됩니다.
IMF로 인해서 성우의 일도 없어지고 아버지 쓰러지셨고 어려울 때에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라디오의 DJ를 인도하게 해주셨고 그 프로그램이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힐링하는 프로를 하다 보니 더욱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자신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것입니다.
아침마당 생방송하면서도 채무자가 왔는데도 동료들이 같이 위로해주고 서로 함께 해주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성병숙 집사의 기도가 "힘든 중에도 하나 되게 해 주세요."라고 했는데
계속 작품을 주시고 가족이 함께 해주셨고 특히 어머님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젊을 때 일이 터지니 다행이다."라고 여장부같이 힘을 줍니다.
성병숙 집사가 엄마에게 "나 하나님 믿을 거야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주신 것 같아." 라고 했더니 어머님이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럼 나도 오늘부터 하나님을 믿는다. 한 집에 두 신이 있으면 안 된다. 나는 너와 같아"라고 결단을 내리십니다.
사실 이전에는 점치러 다니고 굿하고 하던 어머님이 단 한 번에 바뀌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디.
아버지는 완고하시고 나를 믿어라고 했던 분이신데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요양 원가실 때에 목사님께 예배를 드려달라고 부탁을 했고 놀라운 일은 아버지가 매너 있게 네 네 하시는데
목사님이 아버지께 이렇게 묻습니다. "따님을 사랑하시죠."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럼요."대답하니
"그럼 따님의 소원은 아버지가 예수님을 영접하시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 즉시 아버님이 예수님을 모신 후에 3달 지나서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배우 성병숙 집사는 엄마가 나를 해바라기처럼 사랑했는데 본인은 딸을 사랑하지 못 해서 너무 힘들어했는데
그때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세월이 지나면 사랑하게 되고 진정한 친구가 된단다. 그리고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다 보듬어 주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본인의 재혼으로 아빠에게 보내게 되어 딸이 아빠에게 가 있었을 때 할머니가 너를 버렸다고 해서 딸이 그렇게 엄마를 괴롭혔고 너무 힘들어서 유학을 보내버립니다.
사실 재혼 후 중간에 딸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무작정 오게 되었고 그때까지는 서로가 좋았답니다.
그런데 IMF 이후에 딸이 학교를 가기 싫어해서 캐나다에 보내게 된 것이지요.
성병숙 집사님이 빚을 갚아야 하니 갈 수가 없었고 딸을 그곳에서 혼자 힘들게 있다가 방학 때 와서 이런 고백을 했답니다.
딸의 고백입니다. "사실 유학하면서 방황하고 친구들과 나쁜 짓들을 하려고 하면 계획이 잘못되어지고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라고 하는데 성 집사님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감사한다고 고백을 했답니다.
유학을 보냈는데 고3 때에 한국에 짐 싸고 와서 연기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준비시키고 두 번째에 합격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합격하기까지 하나님의 기적이 있었답니다. 교회에 새 신자를 섬기기 위해 갔는데 첫 번째 시험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두 번째 시험이 있기 전 일주일 동안 판소리를 배워서 판소리로 합격하게 됩니다.
어렵게 들어간 학교에 가서 딸이 공부를 하지 않아서 참 힘들었는데
지금은 제자훈련을 먼저 하고 방언도 먼저 하고 새벽 기도를 먼저 하는 믿음의 딸이 되어 동역자로 쓰임 받게 됩니다.
서병수 집사님의 고백입니다.
"보잘것없고 상처투성이인 자신를 묵상하지 말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묵상하세요."라고 하신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답니다.
힘든 이들에게 서 집사님의 위로 말 한마디입니다.
"지금 나 때문이야 나는 이 정도 밖에 안되라고 힘들어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지나간 것 상처에 괴로워하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과 성경에 있는 것을 삶에 적용하시면 나중에 나를 훈련하시는 것이구나."라고 깨닫게 된답니다. 사실 서 집사님의 삶의 무게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친구의 전도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허락하시고 아픔과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기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묻어나는 것 같아서 같이 기쁘고 행복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