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빛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홍수철 목사님은 대표곡[철없던사랑] 등히트곡으로 1980년대 가요프로 1위를 차지했던 인기가수로 화려한 연예인 생활을 했다. 그는 또한 권투 선수 홍수환씨의 동생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같은 교회에서 장로님으로 섬기고 계십니다.
홍수환장로님은 1974년 첫 번째 챔피언에 올랐을 때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리고 “그래 내 아들아, 대한국민 만세다”라는 대화로 새로운 유행을 만들고 우리나라 최초의 두 체급 세계 타이틀 석권이란 신화를 만들어 낸 분이시죠.
처음에는 찬양사역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를 가라고 권면해서 나중에는 찬양사역에 유익을 위해서 신학을 했는데 결국 목사님으로 쓰임받게 됩니다.
신학을 졸업하고는 처음 홍목사님은 큰 교회에서 사역을 배우고 개척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사모님이 그럼 나는 다른 교회에 다니겠다고 해서 결국 개척을 하게 됩니다.
원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북에서 믿으셨고 아버님이 신앙생활을 했는데 주일학교까지도 다녔답니다.
어머님은 불신자이셨고 결국 교회를 그만두게 됩니다.
나중에는 어머님도 예수믿고 천국가셨는데요.
홍목사님은 가수를 활발하게 할때 그런 환경속에 있을 때 만족을 할수가 없었답니다.
세상적으로는 풍요롭지만 허탈함과 고독속에서 빈 공간을 찾을수 없어서 여러가지를 해 보았지만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아내 박미령 사모를 예비해 두십니다.
집안 대대로 믿는 사모를 만나서 20년을 떠나 있던 교회를 다니는데 아직은 엉터리 신앙이였답니다.
그래서 교회들어가기전 시간이 아까워서 담배를 3개를 피우고 들어가기도 했답니다.
당시 영락교회 최재순전도사님이 가수 홍수철에게 예배 전에 주보를 나누어주며 "세상 인기보다 하나님의 인기를 얻는 사람이 되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그 때마다 인기 가수인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어느 날 그는 "내가 교회를 계속 나가든지 아니면 끊든지 분명히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이 상태로는 너무 불편해서 교회에 다니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 때가 지난 1988년 12월 24일이었어요. 크리스마스 이브인데도 그날따라 스케줄이 여유가 있었어요. 집에 성화가 있어서 진지하게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되었지요. '하나님, 도와 주세요. 교회를 제대로 나가 술과 담배도 끊고 살든지 아니면 그만 두겠습니다'라는 식으로 기도를 하게됩니다.
그 때 갑자기 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갑자기 회개의 기도부터 많은 기도를 하게 되었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게 되고 내가 기도하면 응답하심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오랜만에 찾아 온 여름휴가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던 차에 당시 영락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임영수 목사가 '성경통독'을 권유했다.
그 때가 1989년이었다. 그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홍 목사는 신앙생활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중 예수님이 왜 그렇게까지 고난을 받으셔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분명 잘못이 있어서 이렇게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한것인데 이유를 찾을려고 더욱 성경을 집중하게 됩니다.
성경을 계속 읽던 그는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지만 그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주님, 절 용서해 주세요."라는 고백 밖에 나오지 않았다.
드디어 예수님이 나때문에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고 고난을 당하신것을 발견하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 때 참 기쁨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았어요. 그 동안 화려해 보이는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항상 공허함에 시달렸었거든요.
이제부터는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요."
이런 은혜를 체험하니 방송이 싫어지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것이 좋아서
선한 거짓말로 방송보다는 예배시간을 드리게되고 나의 달란트를 하나님께 드리겠가고 고백합니다.
대중음악 작곡가, 가수 방송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컴패션밴드의 음악감동으로 온누리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주영훈 씨를 소개합니다. 1993년 심신의 "내가 처음 사랑했던 그녀" 를 통해 작곡가로 데뷔해 엄정화의(배반의 장미) 터보의(나어릴 적 꿈) 컨트리 꼬꼬의(오! 가니) 유채영, 코요태, 김종국 등 많은 가수들의 작곡가로 유명하답니다. 지금은 방송인으로써 열심히 하고 계시는데요.
미국에서 아버지께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났답니다.
어느 날 예언하시는 권사님을 모시고 와서 아들 중에 목사가 나온다고 했는데 주영훈 씨를 신학교에 보낸다고 해서 한국으로 도망을 왔다고 합니다.
도망 올 때에 전 재산이 27만 원이었고 공항 세관에게 악기가 걸려서 세금을 78만 원을 내라고 해서 한 시간을 울면서 빌기도 했답니다.
20대 초반에 목사님을 따라 미국 동부 워싱턴으로 이민을 와서 아버지께서 사역하시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또한 찬양대로 봉사를 하였답니다. 주영훈 씨가 음악을 하게 된 계기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나중에는 고백합니다.
주영훈 아버지께서는 이북 출신으로 보수적인 분이셨답니다.
예배 도중에는 아멘을 크게 해도 안되고 교회에서 기타나 드럼도 함부로 하면 안 될 정도였답니다.
찬송가를 제외한 세상 모든 음악을 마귀의 음악이라고 해서 반대가 심하셨다고 하네요. 그래서 학교를 갔다 오면 LP가 항상 두 동강 나있었고 교회 가면 기타를 칠 수 있어서 같지만 아버지가 계실 때는 찬송가를 치다가 안 계실 때 몰래 세상 음악을 했답니다. 지금도 초청을 받아서 교회에 가서 메들리를 하다 보면 찬양을 하다가 중간에 일반 음악을 부르면 손뼉을 치다가도 멈추어 계신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팝송을 좋아해서 혼자서 DJ가 되겠다고 연습도 하기도 했답니다. 홀로 한국에 와서 테이프를 만들어 각 기획사를 찾아다니면서 들어봐 달라고 발품을 팔면서
잘 되지 않으니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한국에 나오게 해달라고 했다가 다시 왜 한국에 오게 했냐고 원망했답니다.
많은 사람을 1년 동안 만나면서 수백 곡을 만드는 시간이었답니다. 그래도 교회는 다녔지만 뜨거움은 없었답니다.
술 취해서 울면서 기도하기도 했답니다.
심신의 가수를 만나게 되면서 그분이 점을 보면서 점쟁이가 웃는 모양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주영훈 씨였답니다.
나중에 주영훈씨는 하나님께서는 귀신을 쓰기도 한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도 점보러 가서 너는 예수믿어야 산다고 해서 진짜 예수 믿기도 하지요.
그때는 인기 있는 가수와 만남이 시간 되면서 심신의 작곡을 7곡을 하면서 소방차까지 연결되고 태진아 씨와도 시작됩니다.
주영훈 씨가 만든 곡들이 거리에서 울려펴지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지고 자신이 교만하게 재능을 하나님이 주신 것인 줄을 몰랐답니다.
주영훈 씨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유독 주영훈 씨가 온갖 오해와 억측으로 어려움이 겪게 되고 많은 어려움을 가지는데요.
나중에는 하나님이 이런 경험을 통해서 지금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게 된답니다.
자신의 연약하고 부족함을 훈련시키기 위해 좋은 벗들을 연결해주시고 온누리교회를 통해서 뜨겁게 기도하고 이전에 잃어버린 첫사랑을 깨닫게 되는데요.
성공한 작곡가에게 사실 여러 번 위기가 찾아옵니다.
손태영과의 결별과 오해 살이 빠졌다고 두 번이나 검찰청에 불려가서 마약검사를 받기도 했고요.
주영훈 씨의 고백입니다.
"살을 갑자기 예전에 많이 뺐을 때는 마약조사를 받을 때도 있었고,
2007년도에 학력을 속였다 그래서 모든 방송도 쉬게 됐던 적도 있었고,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면서 빚도 지고 공황장애도 많이 앓았었고.
하용조 목사님께서 큰 힘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힘들거나 할 때 정말 하 목사님이 보고 싶어요."
2007년 온누리교회에서 주최한 일본 문화선교 집회 ‘러브 소나타’에 참가했는데,
손지창 형제가 하용조 목사님 부탁으로 주변의 연예인을 모을 때 저도 불려가게 된 거예요.
가서 할 일은 연예인들과 함께 찬송가 두 곡 부르는 것밖에 없어서 저는 솔직히 편한 마음으로 따라갔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회개하는 눈물 많이 흘렸어요.
그때 은혜를 참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받고 나서 제게 어려운 일이 바로 닥쳐왔습니다.
일본에 다녀온 지 2주 후였어요. 뜨거워지려고 할 때 사탄이 제게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더군요.
아마 은혜가 없었다면 과거처럼 예민해서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큰 어려움이었어요.
하지만 “올 테면 와봐라” 하는 담대함이 생겨 감당할 수 있었답니다.
사실 군대를 못 갈 수밖에 없는 심실 조기 흥분 증후군이라는 질병이 있는데
일부러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주영훈 씨는 독신 주의자였고 이윤미를 만나면서 마음이 바뀌게 됩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악성 루머와 사업 실패 그리고 대인 기피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2006년 이윤미와의 결혼으로 평안을 회복하게 됩니다.
주영훈 씨의 고백입니다.
"배우자 기도를 오래 했어요, 제가 혼자서. 항상 웃는 여자, 나보다 남에게 배려가 더 많은 여자, 키 170센티미터 플러스마이너스 1 이렇게 구체적으로 적었어요.
10가지를 정확하게 가진 아내를 제가 만났기 때문에 만나자마자 하나님이 보내주셨나 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됐죠."
배후자의 기도에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잘 웃는 여자인데 이윤미 씨가 심하게 잘 웃는 여자랍니다.
또 하나는 야망이 크지 않는 여자인데 다시 말하면 가정적인 여자를 원했는데
결혼 후에 아내의 내조 덕분에 신앙이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어느 정도로 이윤미 씨가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가 하면
주영훈 씨의 고백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수첩을 봤더니 남편이 잘 되게 하는 기도 방법과 주로 남편을 위해 책을 읽고 있었고 항상 우리 오빠 기도를 우선하니 너무 감사하답니다"
부모가 딸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요.
두 부부는 큰 딸의 이름을 주 아라라고 지었는데 그 뜻을 "주님의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며"라고 지었답니다.
가수이며 방송인 황보 씨는 여성 댄스그룹 샤크라의 멤버로 데뷔하여 200년부터 2005년까지 활동을 하다가 그룹이 해체되어 솔로곡을 내기도 했으며
요즘은 방송뿐만 아니라 식당과 카페를 운영하며 패션사업에도 활발하게 하고 있답니다.
현제는 동부 이촌동에 있는 충신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송은이, 박미선 씨도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여 행복한 신앙을 시작했답니다.
학창시절에 교회는 당연히 학교처럼 다녀야 되는 줄 알았답니다.
방송을 데뷔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아는 언니가 레스토랑을 도와주라고 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처음에는 이혜영 씨가 데뷔를 권했고 가수 이상민 씨가 가수해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룹 브로스로 처음 데뷔하게 됩니다.
2000년도에 샤크라에 데뷔를 하자마자 인기를 얻게 되었고 리더이기에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답니다.
그런데 샤크라의 멤버들과 의견을 나누고 해체를 선언하면서 홀로서기를 하다 보니 힘든 시기였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시기가 있었는데요.
소속사 사장이 돈을 가지고 가버리고 세금을 대신 내야 되는 상황이 되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됩니다.
고소하고 재판을 준비하는데 "용서"라는 단어가 떠올리게 되는데 계속 하나님께 다시 다른 생각을 달라고 했지만 결국 용서하게 됩니다.
그 대신에 동업하셨던 분이 무료로 곡을 내게 해주셨답니다.
예능에서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이었지만 본인은 일반인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홍콩을 가게 됩니다.
사실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송은이 씨가 무한걸스를 하다가 가버리면 안 된다고 해서 가까운 홍콩을 택하게 되었답니다.
1년 6개월을 있으면서 교회에 가면서 더욱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한 끼라도 교회에서 밥 먹는 것에도 감사하게 되었답니다.
한편으로는 외로운 생활에서 울면서 지내면서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홍콩에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기획사의 엑스트라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면서 살게 되었답니다.
홍콩에서의 삶을 적응해 가는 시기에 건강 악화로 아버지가 쓰러지게 되었으며 한국에서 다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다가 그만두셨는데 지금은 세례를 받았답니다.
오랜 병원생활로 많은 병원비를 감당하게 되면서 십일조를 드리는데 생활비가 부족함이 없더랍니다.
황보 씨의 고백입니다.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신기하답니다.
십일조를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믿음으로 드리기 시작하면서 기대를 했는데 가방 안에 있는 3만 원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더욱 드리는 것에 기쁨을 누리게 되었답니다.
현제는 컴패션이라는 단체에서 전 세계에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1대일 후원하는 일에 사역을 하면서
그곳에서 벤드로 활동을 하면서 "광고비를 줄여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을 돕자"라는 취지로 활동하게 되었답니다.
가수로써 노래를 부를 때보다는 봉사자로서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하답니다.
한 번은 비전트립으로 방글라데시로 가서 말라리아 약을 미리 먹고 가는데 그 약을 먹고 본인이 힘들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는데
한 아이가 다가와서 아임 해피 아임 해피 하는데 다시 힘을 얻게 됩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께 기도를 들렸답니다.
"내일부터 약 먹지 않겠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게 해 주세요"
그 다음날부터 아이들과 즐겁게 지내고 왔답니다.
이전에는 황보 씨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알리지 않으려고 했답니다.
크리스천으로써의 먹칠을 하기 싫었고 차인표, 신애라 씨가 닦아놓은 봉사단체에도 혹시 해가 될까 봐 주저했답니다.
그런데 황보 씨가 봉사를 한다고 해서 많은 분들이 가입을 하게 되면서 다시 당당하게 알리게 되었답니다.
황보 씨의 고백입니다. "저 같은 비슷한 사람들이 보면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라고 외치고 싶답니다.
황보 씨가 새롭게 하소서를 출연 후엔 인스타그램에 올린 진솔한 신앙고백입니다.
"종교방송은 언제나 부담되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피하게 되기도 합니다.
나 또한 그리 살지 못하기에. 떳떳하지 못하기에. 하나님이 늘 용서해주시는 건 막살라고 해주시는 게 아니라 다시 살라고 기회를 주신다 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두 얼굴로 살면 힘들지 않느냐고... 아니요 저는 두 얼굴로 사는 걸 숨기는 게 더 힘듭니다. 그러나 그 나약함을 나누고 그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2003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대상을 수상하고 2004년(휠릴리)골든디스크 대상까지 거머쥐었던
우리들이 잘아는 노래 휠릴리, 덩그러니 굿바이등 수많은 노래를 부른 이수영씨를 소개합니다.
가수가 꿈이였던 이수영씨가 중3 때 라디오프로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주 장원을 했어요.
제가 가수의 꿈을 꾸면서 계획했던 절차 중의 첫 번째 관문이었어요.
거기서 상 받고 대학가요제 가서 그런 꿈을 꿨는데, 그전에 하나님의 계획이 계셨던 거예요.
고3때 친구따라 가스펠 콘서트한다고 해서 그것도 모르고 그냥 갔어요.
처음에는 가수들이 나오는 걸로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막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가슴은 뜨겁고 눈물은 쏟아지고…. 친구 손잡고 그냥 간 건데. 친구가 나를 전도하기 위해 애를 쓴 것도 아닌데
그냥 가서 울게 되고, 그 다음날부터 제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어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그리고 호기심이 끝도 없이 시작됐어요.
가수를 준비한 소속사에 전화를 걸어 가수하지 않겠다고 하고 가수의 꿈을 접고
24시간 중에 다른 친구들은 4시간 자고 20시간 공부할 때 저는 4시간 자고 20시간 전도하는 데에 시간을 다 썼어요.
300명의 친구들을 전도했답니다.
이수영의 아버지는 그녀가 초등학교 2학년일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으며
어머님은 스무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후 2명의 동생과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그 때부터 여동생과 남동생의 가장이 됩니다.
큰 시련이 오니 하나님을 원망하고 가수의 길로 다시 가게되어 인기있는 가수가 됩니다.
정상의 위치에 있으나 영혼은 공허해지고 너무 힘들어 했는데
그때 친구인 이지훈가수가 너 왜 그렇게 사니? 그때 정신이 바짝들게 됩니다.
이지훈씨 자신이 간증하면서 새벽2시부터4시까지 기도하면서 자신은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거예요.
그친구의 손을 잡고 기도모임에 같는데 2시간의 기도가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나중에는 잊고 살던 방언기도가 터지면서 밑바닥까지 잊고 살았던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세월을 지었던 죄, 받았던 상처를 씻어주셨고 그때부터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되었습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너무 부끄러웠고 시편 2편4절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는 말씀을 깨닭게 해주셨습니다.
처음 가수 시작한 소속사가 가수가 혼자이였고 사장이 핍박이 심해서 그것때문에 힘들어서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고 그것이 상처가 되어 힘들었고 어려웠답니다.
그곳에서 주일을 지킬수도 없었답니다.
기도중에 최고의 몸값일때 기독교인 사장의 소속사를 만나게 돈보다는 신앙을 선택하여 처음은 좋았습니다.
또 다시 소속사가 가수를 키운곳이 아니라서 회사가 커질수록 사장의 모습이 바뀌면서 너무 힘들게 됩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다 내려놓고 오직 기독교인 사장을 선택했는데 잡은 것이 썩은 밧줄입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오직 수익 창출과 악행을 보면서 끝까지 기도하면서 기다렸는데 돌아오지 않아서 돌아서게 되고 그 회사가 소송을 걸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자신의 고모가 부모역할을 했는데 대리법적으로 오고 가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것입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고난을 주신것에 감사하게 되면서 잘 정리해 주게됩니다.
결국 일인 기획사로 시작하게 되면서 목사님과 예배드리게 되었고
그때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라" 이 말씀에 경험이 없지만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응반8집에 "내려놓음"을 발표하게됩니다.
지금은 2013년 9월 이후 블루프린트 뮤직 소속이다.
이수영씨가 전도했던 탈렌트 서민정씨의 간증을 들어보면 하나님은 놀랍게 역사하시게됩니다.
서민정씨가 2004년 SBS 라디오에서 DJ를 하고 있을 때 그의 프로그램에 가수 이수영씨가 출연하여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날따라 이수영씨가 아름다워 보였기에 그 비결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수영씨는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예전같았으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비웃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날만큼은 알지도 못했고 알수도 없었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셨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방송중 광고나 노래가 나올때마다 이수영씨에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주었는지를 물었다.
이수영씨는 이번 주일 우리교회 한번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함께 분당 지구촌교회 예배에 참가했다.
하지만 설교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찬양할때마다 사람들이 손을 드는 모습도 어색하고 무서웠다.
그래서 몇번 예배를 참석하다가 이수영씨의 전화를 피하게 되었다. 이수영씨는 마지막 음성 메세지를 다음과 같이 남겨주었다.
"너를 통해 다시 겸손함을 배우게 된다. 네가 나에게 하나님에 대해 질문할때 나는 전도할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마음이 들떠있었는데 하나님은 다시 들뜬 내마음을 내려놓게 하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하나님은 한번 시작하신 일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나의 임무는 여기까지이지만 다른 사람을 너에게 붙여주셔서 더깊이 하나님을 알게 하실거야. 그때까지 기대하고 기도를 할께"
그후에 사랑과 야망이라는 드라마를 찍으면서 이유리씨를 만나게 되면서
결국 서민정씨는 예수를 믿게 되었고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서 인기도 얻고 미국에서 결혼해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수영 커플은 다니는 교회 지인의 소개로 만나 1년 가량 교제한 끝에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
이수영은 예비 신랑을 “내가 항상 기도해오며 꿈꾸던 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통해서 이지훈을 통해서 이수영씨가 예수믿고 또 서민정씨가 예수믿고 참 하나님은 멋진분 같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들통해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릴려고 잠시 어려움과 고난이 와도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이 있답니다.
고난을 당당하게 기도와 말씀으로 붙잡고 지금도 하나님께 나오지 못하는 영혼들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도록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