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혈을 지나"를 작사와 작곡을 한 김도훈목사님은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속한 대학청년국 프뉴마청년선교회 담당하고 계십니다.
이 목사님의 목표는 60세까지 1000곡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주가 거기 계심으로’ ‘주를 향한 그리움’ ‘성령님, 인정합니다’ 등 무려 450여곡을 만들었답니다.
그는 1973년 태어났다. 당시 서울의 큰 법랑회사 사장이었던 아버지가 백혈병을 앓고부터 집안은 기울었답니다. 가장이 2년간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가 여섯 살 때 아버지는 어린 남매와 여린 아내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김 목사의 어머니는 건축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어린 남매를 키웠다. 아들은 어머니의 월급봉투를 훔쳐 오락실과 도박으로 학창생활을 보냈다. 아버지 부재에 대한 반항이었다.
두 살 어린 여동생을 폭력으로 괴롭혔다. 대학생이 된 다음에 알았지만 동생은 ‘오빠를 죽게해달라’고 기도할 정도였다고 했다. 3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기적처럼 살아났다고 했다.
질풍노도의 10대를 지켜준 것은 어머니의 신앙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겨우 철이 들었단다.
당시 조용기 목사의 설교가 바위처럼 굳은 마음을 모래알같이 곱게 만들었다고 했다.
육신의 아버지 보다 더 사랑이 많은 영혼의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뒤늦은 공부에 집중해, 91년 대학(건국대 충주캠퍼스 기계공학과)에 들어갔다. 신입생 환영회 때 만난 한 여학생의 질문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날 선배들이 권하는 술을 끝까지 거부하는 모습을 본 이 여학생의 질문은 “당신이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네요. 말해 줄 수 있나요.”
그 때는 아무 말도 못했다고 했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으로 찾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대학생활은 2년이 흘러갔다. 교회 찬양단원으로 활동하면서 피아노 건반을 익히면서 찬양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신앙생활도 신실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동생을 사랑하게 됐다는 점이다.
찬양곡을 만들기 시작한 때는 98년 대학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올 크리스마스 당신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지’를 묻는 기도를 드렸더니 대답이 기가 막힌 것이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대답은 ‘네가 직접 만든 노래를 듣고 싶다’ 였다는 것이다.
콩나물 머리도 잘 볼 줄 모르는 데 어떻게 작곡을 할지 큰 낭패였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했다. 기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소형 녹음기가 떠올랐다. 당장 오디오 가게로 달려가 녹음기를 샀다. 그리고 2년 동안 어디를 가나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육성으로 작곡을 했다.
‘보혈을 지나’는 1999년에 만들어진 곡인데
당시 동역자들과 함께 국내외 단기선교활동과 중보기도모임을 하고 있었는데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 환상은 십자가 앞에서 한 방울 한 방울 하늘 보좌로부터 보혈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마침내 폭포수처럼 흐르더니 그 보혈을 지나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영혼들은 새롭게 변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환상을 본 김도훈 목사는 기도와 깊은 묵상 끝에 4가지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 첫째는 진정한 회개는 보혈을 지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죄를 씻는 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우리가 하는 기도도 보혈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도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반드시 보혈을 지나야만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선교인데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의 손을 잡고 보혈을 지나야 그 영혼들이 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묵상과 깨달음이 김도훈 목사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았고, 퇴근길의 지하철 안에서 하나님 주신 영감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김도훈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마음 속엔 빨간 십자가가 있어요. 죄와 고통으로 가득했던 청소년기를 이겨내고 순종의 길로 들어선 것은 오로지 보혈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보혈의 은혜를 받고 살아야합니다.
이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흙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큰 사랑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또 오늘도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피흘려죽으신 보혈을 의지하여 당당하게 그리고 묵묵히 전도와 선교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삶이 예배가 되어서 예수보혈의 은혜가 가득한 기도응답과 자녀의 확신의 사람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온 세계 경제가 깊은 수렁에 빠진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날마다 날마다 큰 부흥을 하고 흑자경영을 한 ‘한국 교세라정공’ 이라고 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그 성장의 중심에는 전희인 사장님이 계신데,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고 장로님이세요. 정밀 절삭기 공구를 생산하는 이 회사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주목받는 회사가 되었는데, 일본에 교세라 그룹의 180개 계열사 중에서 이익 증가율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장로님이 밝히는 회사 경영 성장의 비결이 기독교적 경영철학이요, 십자가 경영 이라고 그랬어요. 1997년 IMF가 다가왔습니다. 모든 회사가 문을 닫게 되는 그러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대부분 기업들이 대량 해고를 통하여 기업을 슬림화하고 그 어려움의 고비를 헤쳐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절대 한 사람도 해고시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 120명 직원을 나에게 보내주신 것은 저들에게 선교사로 보내주셨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책임을 가진 내가, 어렵다고 저들을 해고시키면 저들이 다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니까 내가 저들을 해고시킬 수 없다. 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간구하오니 주님 역사 하여 주옵소서. 함께 하여 주옵소서.” 아,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세계 100대 기업 가운데 하나인 일본 교세라 그룹에서 연락이 와서 한국에 지 회사를 두는데 그 회사를 택한 것입니다. 200억 투자유치를 받고 또 전 직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100% 승계해서 회사를 세우게 됐는데, 이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10년 가까이 흑자 경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회사가 되었는데 그 성공의 비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의 목표는 세상의 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저는 이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구하며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구현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고 실현해가는 것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 너머에 있는 그 이상의 가치였습니다. 이 모든 기적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땅의 것을 찾지 말고 하늘의 것, 위의 것을 찾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이 분명히 마태복음 6장 33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어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의 핏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유업을 받았으니 하나님께 속해 있고 우린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고 사는 것이 행복이요 즐거움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삶의 희망을 써 내려가는 예수의 증인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잠언 3:8]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여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탁구 여왕’으로 불렸던 양영자 씨는 잘 훈련된 선교사로 바뀌어 몽골에서 15년간 선교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처음 탁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담임선생님께서 초등학교 3학년때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데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집중을 못하기에 그럼 탁구를 해보라는 제안을 받고 시작을 했답니다. 그는 선수시절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다. 중학교 때부터 팔꿈치 부상으로 고생을 했고 병원에선 탁구를 그만두라고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국가대표를 꿈꿨던 그는 포기할 수 없었고 대신 주기적으로 진통제를 맞아야 했습니다. 나중엔 진통제를 너무 많이 맞아 효과가 없을 정도가 됐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1984년 경기도 가평 한얼산 기도원에서 기적을 체험했다.
안수 기도를 받고 팔꿈치 부상이 완쾌된 것이지요. 그는 고백하기를 그는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했다.
얼마후엔 간염이 발목을 잡았고 연습을 제대로 못하면서 그의 기량은 떨어지니 나중엔 국가대표팀에서 탈락하기까지 했다. 그때 주신 말씀이 잠언 24장 16절 말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리라" 이였답니다.
‘양영자의 시대는 갔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났다. 86년 상비군을 거쳐 30여 게임을 치르면서 국가대표로 재발탁됐다. 생방송으로 전국에 방송된 서울 올림픽에서 최강 중국을 환상의 팀인 현정화와 함께 무너뜨린것입니다.
최강 중국을 꺽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나왔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날마다 기도해주시던 어머니의 간암으로 먼저 천국에 가면서 우울증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람만나기가 싫었고 아침에 해뜨는 것이 싫었답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 의사와 지인의 도움으로 서서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당신 내 자신도 저의 상태를 몰랐었고 우울증 겪으면서 부족한 믿음을 확인하고 큐티를 통해 말씀묵상과 성경공부를 하게되었습니다" 그때에 주신 말씀이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시편 107편 10~1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때를 위해 만남을 주셨는데 이가 바로 남편 이영철선교사입니다. 은퇴하고 제일모직에서 트레이너로 활동하던 때, 연합뉴스 국제부 기자였던 남편을 인도네시아에서 우연히 만났다. 남편은 같은 교회를 다니던 성도였고 자연스레 교제가 시작됐습니다.
1992년 5월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선교사를 꿈꾸던 남편은 이듬해 회사를 그만두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신학공부를 마친 남편과 함께 선교사로 떠나기 앞서 그는 96년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거기서 WEC국제 선교회를 알게 됐고 6주간 선교 교육을 받았다. 드디어 WEC선교사로 1997년에 몽골 선교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공산 국가였던 몽골이 개방이 되어 이때 하나님은 양영자 선교사 부부를 몽골로 부르셨다. 교회를 시작했으나 선교 활동은 말처럼 쉽지 않았고 언어와 문화 차이 때문에 힘들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안면 근육이 마비되면서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때 주신 말씀이 "우리의 모든 환난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는 고린도후서1장4절 말씀입니다.
남편과 뿌리를 내린 곳은 울란바토르에서 차로 10시간 떨어진 ‘생샨드’이었다. 선교 사역을 시작할 때 교인을 단 한 명. 하지만 지금은 200명으로 늘었다. 그는 고백합니다.
“몽골의 한 시골에 들어가서 현지인 2명과 함께 교회를 세웠던 기억이 납니다. 몽골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는 몽골을 제 2의 고향이라고 말하며 지금의 기도제목은 전 세계에 흩어진 몽골족 800만영을 주님께 말씀으로 세계를 정복하하는 귀한 통로가 되기 원한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선수 시절엔 오직 성적이 목표였는데 지금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살아가고 있어요. 사람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고통을 치유해 주고 있지요. 인생의 목적이 달라진 거예요. 제가 체험한 예수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남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몰라요.”
하나님께서 쓰실려고 위기때마다 말씀과 은혜로 회복시키시고 인도하셔서
결국 몽골의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기위해 왕년의 한국의 탁구 여왕 양영자선교사님을 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들어쓰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버지! 지금 사단이 제 염장을 지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뭐했냐고 묻는데 아버지, 솔직히 할 말이 없습니다. 아버지, 저는 왜 이래야 합니까? 제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거 맞습니까?"
그때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의 부르심은 다르다. 너는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너의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부르심은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을 쫓아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그 필요대로 쓰임 받는다.
구체적인 부르심이 각각 다른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을 보라. 75세에 부르심을 받아 고향을 떠난 뒤 사고 쳐서 아들 하나 낳고, 약속의 말씀대로 둘째를 낳고 그 후에도 몇 명의 자녀를 더 낳고 나서 생을 마감한다. 믿음의 조상치고 큰 민족을 일으킨 적도 없고 놀라운 이적과 능력을 행했다는 기록도 없다.
애써 멋있게 꾸미려고 해도 꾸밀 밑천조차 없다.
그러나 그는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된다. 왜냐하면 그 부르심을 쫓아 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놀라운 능력을 행하거나 큰 사역을 일으키는 것과 별 상관이 없었다.
바로 부르심이다. 우리는 그 부르심을 쫓아 그분의 계획대로 순종하면 된다. 나머지 모든 평가와 결산은 그분이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