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 온누리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나는 곧 교회 안에 있는 창조과학위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또 7주 새신자 등록 과정 중 ‘창조주 하나님’과정을 맡아 약 3년 동안 섬겼습니다. 그 후 순장으로, 다른 위원회의 총무로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신앙생활에 한계가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여기지 않고, 내 아까운 시간을 쪼개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내가 성공한 과학자로 보였는지 모르지만, 사실 나의 내면에는 많은 열등감과 수치심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 자유가 없었습니다. 내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학교, 교회, 창조과학회 일에 완벽을 기하려 했지만,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일 뿐이었습니다.
그냥 두면 폭발할 것이 뻔한 나의 내면을 돌보기 위해 나는 1년간 안식년을 갖기로 했습니다. 밥 버포드의 <하프 타임>이라는 책을 읽으며 내 인생을 다시 조율하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깊이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1999년에 내적치유위원회 팀장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처음 6개월 동안 팀장으로서 내가 한 일이라고는 집회 때마다 우는 일뿐이었습니다.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 꼭꼭 숨겨 두었던 상처를 하나님께 내드리고, 죄를 회개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적치유를 받으면서 성령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성령님이 나를 강력하게 사로잡기 시작하셨습니다. 나 자신을 포기하는 만큼 성령님이 일하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온누리교회 집사님이신 우리 한국의 국가대표선수로 이름을 날린 이영표 집사님, 2002년 한일월드컵 주역이자 KBS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어릴때 기독교가 싫었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세뇌당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데 자신들이 사랑하지 않고 서로 용서하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용서하지 않아서 싫었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선악과를 주셨고 따먹게 그대로 두셨는가?
한국에 복음이 오기전에 있는 조상들은 어떻게 되는가?
어떤 사람들은 선하게 사는데 고통을 당하는데 공평하다고 하는가?
이런 고민으로 기독교가 싫었답니다.
그런데 국가대표선발이 되고 친구들이 계속 전도를 했는데 하나님을 믿게된 계기가 있었답니다.
결정적인 두가지가 있었답니다.
첫번째가 제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후에 무언가 있다라는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귀신을 과학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귀신은 있기에 나는 어떻게 할것인가의 고민으로 갈등합니다.
그때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을 믿을수 없습니다.
당신과 나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두번째는 살아계신다고 믿는 사람들을 보니 믿을수가 없습니다.
제 앞에 컵이 있는데 이 컵을 올렸다가 내려놓던지 아니면 하나님이 나타났다가 살아지던지 하세요." 라고 질문을 드렸는데
컵이 사라지거나 하나님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또 다른 질문이 있었다. 내 마음을 바꾸어주세요.
그런데 그때부터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고 성경공부를 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닭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서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주신 말씀이
"나는 언제나 네 주위에 있었는데 네가 믿지 않아서 만나지 못했다."
처음 믿고 예수님을 자랑하고 다니는데
그날도 숙소에서 전도를 하고 있으니 어떤 선배가 너만 믿지 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가라고는 말을 듣고
호텔에 들어왔는데 책을 읽을려고 6개월을 들고 다닌 곳을 펴니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하얀백지에 "진리를 아느자가 진리를 모르는 자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죄이다.
그때부터 침묵하지 않았고 나중에 그 책에서 하얀백지에 한줄이 있는 그곳을 다시 찾는데 그 책에는 없었답니다.
신앙심이 깊어진 계기가 있었는데요.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 사흘 전 부상을 당합니다. 근육이 12센티미터가 찢어져서 6주 진단에 회복까지는 석 달 이상 걸린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기부스를 하고 아파서 쩔뚝거리며 월드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인은 교회 집사로 1년 반 동안 하나님, 월드컵에 나가서 좋은 성적을 얻어가지고 그래서 유럽에 프로선수로 진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했는데 그만 부상을 당한 거예요. 그래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욥기를 읽다보니까 마음에 탐심이 있었어요. 월드컵을 발판으로 내가 유럽으로 진출해서 내 이름을 좀 날려야 되겠다. 기도 하는데 주님 물으십니다. “지금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월드컵입니다.” “그 월드컵을 날 위해 포기할 수 있느냐?” “네. 포기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회개하고 자기의 욕심, 모든 것 다 내려놓으니까 맘이 편안해지는데 그때부터 이상하게 다리가 아프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 두 시합을 쉬고 그다음 나간 것이 포르투갈전인데
포르투갈전에 그의 어시스턴트로 말미암아 박지성이 꼴을 넣어서 역사상 최초로 16강에 진출합니다.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다음날 신기하게도 다리가 아프지 않은 거예요. 목발 없이 걸었고 사흘 뒤에는 뛰게도 되더라구요. 의료팀에서는 오진이 아니었느냐라는 말까지 나왔어요. 처음 두 경기는 쉬고 세 번째 포르투갈전에 나갔는데 보통 선수가 열흘 정도 쉬면 체력이 떨어져 90분을 소화하지 못하는데 저는 전혀 힘들지가 않더라구요. 그날 어시스턴트한 공이 들어가 16강 진출이 결정되자마자 믿는 선수들끼리 무릎 꿇고 한참을 감사하며 기도드렸어요. 그다음에 더 놀라운 일은 이탈리아전에서 그의 어시스턴트로 안정환이 다시 골을 넣습니다. 이때 4강 신화를 만들어냈는데요. 이때도 탁 어시스턴트 했는데 그 골이 들어갔어요. 다 포기하니까 하나님이 주셨어요. 이런 간증을 합니다. 월드컵이 끝나고 온누리교회에서 6개월 간 거의 매일 새벽기도를 했어요.
그러던 2002년 11월 24일 주일예배에 찬양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에 감동이 밀려오고 눈물이 났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셨거든요. “내가 너를 유럽에 보내주겠다.” 그리고 정확하게 두 주 후, 히딩크 감독님이 저를 찾으셨어요. 그리고 또 정확히 5주 후,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네델란드 아인트호벤으로 갔어요. 제 능력이라기보다 그분의 보이지 않는 손이 보내주신 것이죠.
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이렇게 간증합니다. “저에게 축구는 예배입니다. 저의 실력과 위치를 인정하고 겸손히 무릎 꿇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냅니다. 성공과 실패가 중요하지 않아요. 오직 한 곳을 향해서 달려갈 뿐입니다.
제 역할을 다할 때 아름다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축구를 하는 예배자입니다.”
대중음악 작곡가, 가수 방송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컴패션밴드의 음악감동으로 온누리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주영훈 씨를 소개합니다. 1993년 심신의 "내가 처음 사랑했던 그녀" 를 통해 작곡가로 데뷔해 엄정화의(배반의 장미) 터보의(나어릴 적 꿈) 컨트리 꼬꼬의(오! 가니) 유채영, 코요태, 김종국 등 많은 가수들의 작곡가로 유명하답니다. 지금은 방송인으로써 열심히 하고 계시는데요.
미국에서 아버지께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났답니다.
어느 날 예언하시는 권사님을 모시고 와서 아들 중에 목사가 나온다고 했는데 주영훈 씨를 신학교에 보낸다고 해서 한국으로 도망을 왔다고 합니다.
도망 올 때에 전 재산이 27만 원이었고 공항 세관에게 악기가 걸려서 세금을 78만 원을 내라고 해서 한 시간을 울면서 빌기도 했답니다.
20대 초반에 목사님을 따라 미국 동부 워싱턴으로 이민을 와서 아버지께서 사역하시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또한 찬양대로 봉사를 하였답니다. 주영훈 씨가 음악을 하게 된 계기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나중에는 고백합니다.
주영훈 아버지께서는 이북 출신으로 보수적인 분이셨답니다.
예배 도중에는 아멘을 크게 해도 안되고 교회에서 기타나 드럼도 함부로 하면 안 될 정도였답니다.
찬송가를 제외한 세상 모든 음악을 마귀의 음악이라고 해서 반대가 심하셨다고 하네요. 그래서 학교를 갔다 오면 LP가 항상 두 동강 나있었고 교회 가면 기타를 칠 수 있어서 같지만 아버지가 계실 때는 찬송가를 치다가 안 계실 때 몰래 세상 음악을 했답니다. 지금도 초청을 받아서 교회에 가서 메들리를 하다 보면 찬양을 하다가 중간에 일반 음악을 부르면 손뼉을 치다가도 멈추어 계신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팝송을 좋아해서 혼자서 DJ가 되겠다고 연습도 하기도 했답니다. 홀로 한국에 와서 테이프를 만들어 각 기획사를 찾아다니면서 들어봐 달라고 발품을 팔면서
잘 되지 않으니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한국에 나오게 해달라고 했다가 다시 왜 한국에 오게 했냐고 원망했답니다.
많은 사람을 1년 동안 만나면서 수백 곡을 만드는 시간이었답니다. 그래도 교회는 다녔지만 뜨거움은 없었답니다.
술 취해서 울면서 기도하기도 했답니다.
심신의 가수를 만나게 되면서 그분이 점을 보면서 점쟁이가 웃는 모양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주영훈 씨였답니다.
나중에 주영훈씨는 하나님께서는 귀신을 쓰기도 한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의 주변에도 점보러 가서 너는 예수믿어야 산다고 해서 진짜 예수 믿기도 하지요.
그때는 인기 있는 가수와 만남이 시간 되면서 심신의 작곡을 7곡을 하면서 소방차까지 연결되고 태진아 씨와도 시작됩니다.
주영훈 씨가 만든 곡들이 거리에서 울려펴지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지고 자신이 교만하게 재능을 하나님이 주신 것인 줄을 몰랐답니다.
주영훈 씨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유독 주영훈 씨가 온갖 오해와 억측으로 어려움이 겪게 되고 많은 어려움을 가지는데요.
나중에는 하나님이 이런 경험을 통해서 지금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게 된답니다.
자신의 연약하고 부족함을 훈련시키기 위해 좋은 벗들을 연결해주시고 온누리교회를 통해서 뜨겁게 기도하고 이전에 잃어버린 첫사랑을 깨닫게 되는데요.
성공한 작곡가에게 사실 여러 번 위기가 찾아옵니다.
손태영과의 결별과 오해 살이 빠졌다고 두 번이나 검찰청에 불려가서 마약검사를 받기도 했고요.
주영훈 씨의 고백입니다.
"살을 갑자기 예전에 많이 뺐을 때는 마약조사를 받을 때도 있었고,
2007년도에 학력을 속였다 그래서 모든 방송도 쉬게 됐던 적도 있었고,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면서 빚도 지고 공황장애도 많이 앓았었고.
하용조 목사님께서 큰 힘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힘들거나 할 때 정말 하 목사님이 보고 싶어요."
2007년 온누리교회에서 주최한 일본 문화선교 집회 ‘러브 소나타’에 참가했는데,
손지창 형제가 하용조 목사님 부탁으로 주변의 연예인을 모을 때 저도 불려가게 된 거예요.
가서 할 일은 연예인들과 함께 찬송가 두 곡 부르는 것밖에 없어서 저는 솔직히 편한 마음으로 따라갔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회개하는 눈물 많이 흘렸어요.
그때 은혜를 참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받고 나서 제게 어려운 일이 바로 닥쳐왔습니다.
일본에 다녀온 지 2주 후였어요. 뜨거워지려고 할 때 사탄이 제게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더군요.
아마 은혜가 없었다면 과거처럼 예민해서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큰 어려움이었어요.
하지만 “올 테면 와봐라” 하는 담대함이 생겨 감당할 수 있었답니다.
사실 군대를 못 갈 수밖에 없는 심실 조기 흥분 증후군이라는 질병이 있는데
일부러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주영훈 씨는 독신 주의자였고 이윤미를 만나면서 마음이 바뀌게 됩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악성 루머와 사업 실패 그리고 대인 기피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2006년 이윤미와의 결혼으로 평안을 회복하게 됩니다.
주영훈 씨의 고백입니다.
"배우자 기도를 오래 했어요, 제가 혼자서. 항상 웃는 여자, 나보다 남에게 배려가 더 많은 여자, 키 170센티미터 플러스마이너스 1 이렇게 구체적으로 적었어요.
10가지를 정확하게 가진 아내를 제가 만났기 때문에 만나자마자 하나님이 보내주셨나 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됐죠."
배후자의 기도에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잘 웃는 여자인데 이윤미 씨가 심하게 잘 웃는 여자랍니다.
또 하나는 야망이 크지 않는 여자인데 다시 말하면 가정적인 여자를 원했는데
결혼 후에 아내의 내조 덕분에 신앙이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어느 정도로 이윤미 씨가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가 하면
주영훈 씨의 고백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수첩을 봤더니 남편이 잘 되게 하는 기도 방법과 주로 남편을 위해 책을 읽고 있었고 항상 우리 오빠 기도를 우선하니 너무 감사하답니다"
부모가 딸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요.
두 부부는 큰 딸의 이름을 주 아라라고 지었는데 그 뜻을 "주님의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며"라고 지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