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리더 :: '목사' 태그의 글 목록

비가 주룩주룩 오고 있었다.
​창문가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 창문을 열어 보니
우리 집 처마 밑에
한 형편없는 거지가
보따리를 옆에 끼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너무 불쌍하고 딱해 보여서
대문을 열고 그 사람한테
다가갔다.

“춥고 배고프시죠?

​들어오셔서 몸을
녹이고 식사하세요.”

​그분을 집에 들이고
식사를 차려 드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 순간 형편없던 거지가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반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피곤하고 지치고
병이 든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입장이 180도 바뀐 것이다.

​끔찍한 냄새가 나고
지저분한 누더기 옷을 입고
지친 나를 주님이 다가와서
안아 주셨다.

​그것은 주님의 임재였다.

주님의 눈을 보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주님을 애처롭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주님을 뵙고 보니,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신 것이었다.

모든 수치와 비난과
모멸도 잊으신 채
주님은 내가 내쫓은 문밖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때 주님은
보따리를 푸셨다.

그 안에는
이런 말씀이 적혀 있었다.

“내가 너를
십자가만큼 사랑한다.”

​그리고 주님은 물으셨다.

“너 목사되지 않을래?”

40년 전의 환상이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라.

그날 나는
눈물범범이 된 채
이런 일기를 썼다.

‘나를 사랑하시다 못해,
​기다리시다 못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주님이 이제 내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지금 이때가 아니면
내가 언제 순종할까?’

그날 밤 나의 일생를
주님께 헌신했다.

​질병은 나의
목회1번지이다.

​오늘
내가 나된 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은혜다.

​출처
하용조 목사가 쓴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꾼다>
​중에서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캐나다에
처음 이민 와서 만난 분 중,
12년 전 내가 이곳에
콘서트 겸 왔을 때의
조하문을 기억하는 분을
만나 뵌 적이 있다.

그분은 내가 가수였을 때
나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다녔다고 하셨다.

난 그분에게 “집사님,
집사님이 생각하시는
​ 10년 전 조하문은
1997년 9월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조하문은
이름만 같을 뿐입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제야 비로소
얼굴 표정이 풀리셨다.

그분은 아마
옛날의 나를 기억하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목사가 되었나’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세월이 지날수록,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옛사람의 죽음을 분명하게
포함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주님을 만나고 난
나는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기 위해
그동안 알고 있던 분들을
많이 찾아 다녔다.

그 중에는 당시 내가 운영하던
사업장의 직원들도 있었다.

동일하게
용서를 구하는 과정에서
직원들 중에는
내 달라진 모습을 보고
교회에 출석하는 분이 생기기도 했다.

사업과 음악을 가진 채
만난 예수님은
결국 나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셨고
한참 동안 조용히
혼자 있게 하셨다.

그리고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게 하셨다.

계속되는 훈련 속에서
주의 도구로 만드신 것이다.

극장 사업 이후
내가 손대고 있던 사업을
그만 둔 것도 망해서가 아니라,
신학을 시작하고 보니
두 가지를 동시에
섬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 ’돈’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었고
그로 인해 스스로
폐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손을 잡고 동행하면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지난 9년간 나에게
문제된 것들이 있다면
가끔 그분보다
앞질러 가거나 나의 생각을
그분 생각이라고 우긴 경우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분은 내게 평안을 주셨다.

출처:조하문이 쓴
<내 아픔을 아시는 당신께>
​중에서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어떤 청년이 유명한
부흥사인 스펄전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교회마다
문제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저에게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교회를 소개해 주세요.

” 그때에 스펄전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자네가 돌아다니다가
그런 교회를 찾게 되거든
나에게 꼭 연락을 해주게.

나도 그 교회에
가서 목회하고 싶다네.”
 그리고는 한마디를 더했습니다.

 “만일 그런 교회가
있다면
절대로 가지 말게.
자네가 그
교회에 가는 순간에
그 교회는
다시 문제가 생길 것이네.”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 와서 문제를
보고는 실망해 합니다.

세상에서는 문제가
 생겨도 교회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거든요.

정치에서나
경제에서나
문제가 있는
줄로 알았는데,
교회에 와 보니까
여기도 문제가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죄인이거든요.
죄인이 모였으니
문제는 당연히
있게 되는 겁니다.

어쩌면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치료가 필요하기에
교회에 모이는
것이지요.

이제 문제가
기도제목으로
바꾸어서
사람들을 살리는
축복의 사람이
되세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11).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마약치료·재활공동체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을
만든 신용원 목사님은
17년째 마약 중독자
재활을 돕고 계십니다.

3대째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 태어났지만
아버지께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셔서 가세가
기울게 되자 방황을 했습니다.
전교 1등 하던
그 학생이 삐뚤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부잣집
아이들 돈을 뺏고
싸움하다가 마약까지
손을 대게 되어서
마약중독자가 되고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수배자가 되어 도망을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숨을 곳을 찾던 중
숨어들어간 곳이
오산리 기도원입니다.
이 오산리 기도원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41세에
청상과부가 되어서
늘 자기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신
어머니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그때에 그가 기도원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통곡하며
부르짖고 기도할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고백합니다.
“하늘을 보며
살려달라고 빌었죠.
‘어머니가 맨날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데,
나에게 그걸 믿게 해주시면
평생 배신하지 않겠다고’요.

그런데 정말
‘어마어마한 불덩어리’가
몸 안에 쑥 들어오는 거예요.
방언이 뭔지도 모를 때였는데
제가 ‘방언’을
제가 하고 있었어요!

8시간이나 울다가
웃다가 하며 뒹굴었어요.
아침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걸 보는데,
그게 그렇게
아름다운 거예요.
그때부터 거짓말처럼
마약이 끊어지더라고요!”

신학을 공부한 다음
 17년 째 자기처럼 마약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해내는
 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고,
2005년에는 세계 마약의 날
기념국민근정포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복음’으로 안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마약보다 강력한 체험은
‘성령 체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신 목사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중독자및
그 가족 40여명을 모아
마약치료·재활공동체 ‘소망을
나누는 사람들’을 만들었습니다.
​  재활을 위해
인천시 남동구
모래내 시장에 떡집과
순대공장을 만들었다.
 이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고추장에 빠진 순대’라는
프랜차이즈 회사를 차렸습니다.

 신 목사는
프랜차이즈가 성공한다면
언제가는 마약사범을 노동으로
교화시킬 수 있는 전용교도소를
운영할 꿈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 충만 받고
주님이 주신 희망을 품고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넉넉히 잘 이겨내고
승리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5:18)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조용필의 (상처), 유미리(젊음의 노트)
최진희의 (꼬마 인형), 박정식(천년바위)
장미화의 (어떻게 말할까) 등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별명이
히트 제조기일 정도의
인기를 누렸고

그 당시에 크게 히트했던
가요 "고목나무"를 불렀던
 장욱조씨가
예수님을 만나고
목사님이 되셨는데요.

장욱조목사님은
총회 개혁신학
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일산 한 소망교회
선교 목사로
계신답니다. 

 수많은 히트곡과
천곡이 넘는 곡을
작곡했던 이분이
 
어느 날
음반 제작을 하다가
완전히 실패해서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집마저
다 잃어버리고
 빚잔치하고 나니까
가진 것이 없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내가
그를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만약 한참
잘나가고
뭐 여기저기
부르는 곳이
많았더라면
아마 교회 오기가
힘들었을지 모릅니다.

완전히 실패하고
빚더미에 앉은
그를
아내가 인도할 때
순순히 교회로
따라 나왔던 것입니다.

그가
교회에 나와서
연예인 선교단과 함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양을 부르다가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때의 고백입니다.

“하루는 연예인
선교단을 따라
찬양집회를 갔는데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찬양을 부르면서
마음에 이상한
감정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그 전부터
알던 찬양이었는데
그날따라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눈물 콧물 쏟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빚을 갚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술집 무대에
서지 아니하고, 
 약속의 말씀만
붙잡고 나아갔습니다.
 
그때 붙들었던
말씀이 마태복음
6장 26에서 33절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 붙잡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기적이 임했습니다.
축복이 임했습니다.

1년 6개월 만에
모든 빚을 다 갚고
그리고 장막 터까지
마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예수를 믿고
미쳤다고 했지만
기쁘기만 했답니다.

복음을 전하고 찬양집회를
다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은혜받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엇일까?"하다가
내린 결론이 가족을 먼저
전도하기로 합니다.

장인을 집으로 모시 고와
병든 몸을 1년간 수발하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드디어 장모가 먼저 변화되었고
40년간 원불교였던 장인도
예수를 믿게 됩니다.

너무 기쁘고 감격에 넘쳐서
지은 찬양들이 "할 수 있다 하신이는"
"주님 나의 동산" 하늘나라 여는 문"
"전하세"등 100여 곡을
발표하게 됩니다.

특히 신앙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들 때에 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할 수 있다 하신이는"의 가사는
이영후 장로님이 주셔서
본인이 작곡을 하게 된 것이랍니다.
 
 그런데 교회에 사역을 하면서
말씀의 갈증을 느끼게 되면서
평신도이기에 설교와 축복권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같은 동역자인 김석균 와
노문환목사,그리고 김민식전도사와
의논을 하여
"우리가 평생 하나님의 종으로
사역을 할 거라면 신학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결론을
내리고 네 사람이 함께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아내는 신학교를
가지 말고 평신도로 찬양으로
사역을 하라고 말렸지만

3년 동안 설득하여 결국
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졸업을 하여
2000년 안수를 받게 됩니다.

현재는 일산 한 소망교회에서
선교목사와
남양주 세계로 교회의
협동목사로 섬기며
한국 복음성가 협회를
섬기고 계신답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2014 MBC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왔다 장보리'로
대상을 수상하며

 "사랑하는 우리
남편 정말 감사하다.
힘들고 어렵지만 함께
오래 오래 행복
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전한
탈렌트 이유리의
신앙고백을 나누고자 합니다.

영화와 드라마를
23편이상 출연하며
오랫동안 내공을 쌓았는데요.
 
그녀가 지금의
신앙생활을 하기까지
뿌리깊은 불교 집안의
높은 벽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나 하면
그의 차에 늘 불경을
담은 cd가 있을 정도였답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저의 집안은
대대로 불교집안이었어요.
어느 누구도 안 믿으시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는
안 좋은 것들을 믿으셨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셔서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1남3녀중
막내딸로 태어난 그는
다른 사람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외향적인 성격이였지만  

또한 내성적이고
상처를 많이 받아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의 울타리에 갇혀서
청소년기에는 왕따와
다름없는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의외로 그는
미술를 전공했는데
우연히 오디션을
보게 되었고 그 경험이
너무 좋아서 연기속을
빠져 들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발견하게
된것이지요.

그의 고백입니다.

"연기를 하는데
온 몸에서 떨리는
희열이 느껴지더라구요."

그는
연기자로 해석하고
소화하기 어려울때는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감당할수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냐하면
촬영을 마치고
모니터를 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발견하게 되고
감사가 된다고 하네요.

이유리씨의
가정구원의 간증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유리씨 집안은
아무도 안 믿으셨는데,
제가 하나님께
4년 정도 계속 기도했답니다.

부모님께 같이
교회 다니자라고 권면하면
소리지르고 너나 가라고 할때에도
꾸준히 식사때 혼자  기도했답니다.

이유리의 고백입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저를 기다리시는 거예요.
식사를 안 하시고.
그래서 이왕 하는 거
엄마, 아빠 함께 기도하면
좋겠다고 하니
순순히 들어 주셨어요.

저는 기도 기도할 때
‘하나님, 맛있는
음식을 주셔서 감사하옵고,
이 음식물이
에너지가 되게 해 주시고,
이 음식을 만든
저의 어머니 손길을
기억하여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아버지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한 거예요.

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딱히 부모님 교회 나오게
해 달라는 그런
기도를 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하나님께서 성경에
식사기도 하라고 해서
작은 행동을 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어머니가  크리스마스 때에
교회 등록을 하게 하시고,
세례를 받게 하셨어요.

어느 날
기도하고 성경을 보는데
언니가 ‘네가 지금 그럴 때냐.
영화보고, 연기연습 할 때인데
성경말씀만 볼 때냐’고
다그쳐서 굉장히 상처를 받았어요.

그런데
한 달 후 언니가
자기도 교회 나가야
되겠다고 하는 거예요.

언니는 얼마 전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당시 저는 몰랐지만,
제가 한 작은 행동들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시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유리씨가
처음 신앙생활했던
고백입니다.

 2003년 1월에 친구가
교회 가면 좋다고 하여
나도 한 번 가볼까 하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때 그녀는
인생에 정답이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알 길이 없어서
철학을 공부할까 생각하던
무렵이였답니다.

친구가 사 준
성경책에서
주기도문을 읽게 됐어요.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 말씀을 읽고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제가 살아온
환경이 악했었나 봐요.
이유도 없이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거예요.

예배를
드리러 들어갔는데
왜 이제야 불러주셨느냐는
듯이 앞으로 넘어져서
주님 앞에 엎드렸어요.

그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세상 속에서 채울 수 없던
가슴에 뻥 뚫린 구멍을
하나님이 사랑으로 채워 주셔서
하나님을 만나자마자
사랑하게 됐어요.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후에
이상하게 주일만되면
촬영이 있어서 괴로웠답니다.

몇 주 동안
주일을 못 지키고
 어느 날 차 뒤에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막 나오는 거예요.
아무 이유도 없이 너무 힘들고….

매니저에게 가까운
교회에 가자고 했어요.
예배도 없는데.
교회에 발만 들여놓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확 느껴지는 거예요.

제가 회복되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예배드리지 못할 때는
금요철야예배라라든지,
그렇지 못할 때는
제가 섬기지 않은
교회라도 가면
하나님이 늘 계시는 거예요.

성전에 들어가기만 해도
저를 만나 주시고,
찬양만 들어도
하나님이 만나주셔서
밥은 굶고 잠은 못 자도
꼭 하는 것은 기도와 예배입니다.


이유리씨가
 가장 좋아하는 찬양인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를
즐겨 부르는 것도
큰 것에서부터 지극히
작은 것까지
세밀하게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 마냥 좋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생에
 2막장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는데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강력한 성령의 체험을 하면서
새로운 2막2장을
 써나가기로 했습니다.

한국 교회를 위해
저의 달란트를 아낌없이
드리고 싶은 소망이 생겼어요.”

작은 도움이라도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려 한다.

또 조연 주연,
심지어 엑스트라든
배역의 크고 작음을
더이상 개의치 않는다.

“최근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셨어요.
손이 3개나 되더라고요.

 원래 두 손에다
야망의 끈을 잡고 있는
한 손이 더 보였어요.
잘못된 손은 반드시
제거해야죠.”

이유리는 배우자를
위해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존경할수 있는 사람이요.
그리고 저를 하나님께
더 끌어 줄수 있고
멘토가 되어 줄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사람은
완벽할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만나면
그 부족한 부분이
조금씩 완벽해지는 것을
느끼는데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런
남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이유리의 남편 조목사는
원래 잠실에 호산나교회라는
작은 교회에 전도사를 했고
이유리보다 나이가
12살연상인데요.

이유리는 이전에는
큰교회를 다녔는데 
그쪽에는 일꾼도 많고
더 하나님께
헌신할곳을 찾다가

 크지 않는 호산나교회를
다니게 되는데
그곳에 하나님은 선물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호산나교회의
목사님이 여자목사이고
지금의 이유리
시어머님 되시죠

여목사님을 따르고
좋아해지다가
그분의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유리의 고백입니다.

"어느날 스쿠터를 탄
그분이 헬멧을 쓰고 있는데
너무 멋져보이더라.
내심장이 시동이 걸렸고

내 스타일은 아닌데
장갑을 터프하게 끼고
헬멧을 쓴 뒤 시동을
거는 모습에 반했다."

 그때부터
짝사랑이 시작됐고
놀이동산에서 남편이
짝짝이로 신은 양말을
보면서 평생 챙겨주고
싶어서 먼저 고백을 했는데

남편은
여자로 보이지 않고
여동생으로 밖에
안 느껴진다는 말에
그전에는 청바지만 입던
여자가 여성스러운 옷으로
변신하기 시작했고

남편 집안에서도
나이차이와 연예계 쪽과
목회쪽이 달라서 반대를
했답니다.

1년동안
꾸준히 사랑하는
변함없는 마음에
결국 받아주시고
결혼에 공인하게 됩니다.

이유리는 삶속에서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자
남보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최선을 다해
NG없이 연기하려고
노력을 한답니다.

몸관리를 위해서도
꾸준한 운동을
위해서 수영과
헬스를 쉬지않고
정서적인 연기자가
되기위해서
색소폰과 무용도
배운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가족구원과
삶의 응답으로
인도하신줄 믿습니다.

이유리씨처럼 자신의
달란트를 발견하고
성실하게 준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고의 작품답게
최선을 다해 사는
예수의 증인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먼저 하나님의
부름받으신
김준곤 목사님은
한국 대학생 모임인
CCC대표를 섬기면서
 거쳐간 대학생이
40만명이나 됩니다.

평신도는 350만
배출했습니다.

그분의 간증을 소개합니다.
 
전남 신안에
있는 2만여
주민이 사는
지도가 고향인데요.​​

유학자 집안으로
7대조 제사를
드리는
집안이며

아버지는
동네
유림회 회장으로
엄격한 선비셨습니다.

어머님이 제일먼저
예수믿으시고
철야기도를
많이 하신분입니다.

여덟살 때
문준경 전도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

일본군에
 끌러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오기도 했습니다.

해방후 첫 아내
인정진 사모와
결혼 했습니다.

김준곤목사님의 간증입니다.

6.25가 발발하자  
그 당시 지도면
일대에서는
2천여 명의 민간인이
공산당에게 떼죽음을 당했다

나와 아내가
끌러나가고
어린 딸
살릴려고
조용히 끌러갔습니다.

 동네 뒷산까지
끌려갔더니 마을 친척들을
비롯한 60여명의 사람들이 끌려
나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곤봉으로 사람들을
때려 신신시킨후
한꺼번에
죽창이나 일본도로
찔러 절명시켰는데
내 눈앞에서 아버지와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다 

곤봉에 맞아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셔서
아들인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계셨다

의식을 잃어가던
나는 아버지의 피 토하는
그 부르짖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시체더미 밑에
깔려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나는 그 때 이
세상의 모든 죄와 죽음,
고통, 저주, 절망을 짊어지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울부짖었던 예수님의 고토을 보았다 

바로 그 십자가의 고통이
하나님과 만날 수 없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만날수 있게 해준 것이고
이런 고통 속에서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의
죽음을 경험했기에
전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고
통과 죽음을 함께 체험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아
‘전라남도를
거룩한 도시로 만들자’하고
다짐했다
​ 지금 지도는
63%가 기독교화 되었다

전남 성시화 운동은
그렇게 씨가 터서 싹을 냈다 

김준곤목사님의 또 다른
간증입니다.

둘째 딸 신희는
​ C.C.C에서 아버지를
도와 간사를 하다가
결혼하고 미국에 갔는데
미국 병원의 오진으로
뒤늦게 위암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 나와
165일동안
투병하다가 내게 슬픈
무덤을 남기고
하늘나라에 갔다 

나는 내 딸 신희가
가혹하게 죽음의 순간까지
견디었던 극한 고통을 보면서 
그리고 아버지와 첫
아내의 죽음을 보면서
정신을 놓을 만큼
감당못할 아픔을 겪었다 

‘아빠, 살길이
없을까요?
살고 싶어요’

간절하게
되뇌던 딸은
죽는순간 마지막
유언기도를 했다

‘사랑하는 주님
나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이
찬송으로 사랑과 기도로
변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딸은
말을 못하고
의식을 놓더니
하늘나라에 갔다 
손이 점점 식어가면서
굳어져 갔다 

그 모든 존재가 사
라지는 제로점이었다 

그때
나의 아버지가
숨을 넘기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나 
내가 신희의
이름을 부른 것이나 
 
첫 아내가 순교하면서
딸 은희를 불렀을 것이나 
그리고 신희가 죽으면서
불렀을 아이들의
이름을 생각할 때 
그 모든 고통들 앞에서
존재가 사라지는
‘존재의 제로점’을 느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으면
피 흘리는 구원이 없었다면
그때 그 사건이 없었다면
회복할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섭섭함이 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때 십자가의
예수님은 소나기 같은
 피를 흘리고 계셨다 

내가 없어지는
존재의 제로점에서
나는 주님을 만나서
영혼 전에 택했다는
사랑도 이해되고

아버지의 학살과
첫 아내의 순교가
이해되고
소중한 보물 같은
내 딸아이의 죽음도
용서가 되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

일산에 말씀과
찬양의 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김종찬 목사님

 78년 가수로
데뷔했으나
주목을 받은 건  
그의 1집 앨범
‘내 사람아’ 등을
발표한 85년 이후부터,
‘사랑이 저만치 가네’라는 곡으로

모든 방송
 가요 차트를 석권했고 
 ‘토요일은 밤이 좋아’,
‘당신도 울고 있네요’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10대가 수상을 받는 등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는 당시  
가요계의 최고의 아이콘이 되었다.

한때 TV, 라디오만 틀면
온통 그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승승장구하며
​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중반을 주름잡던
그가  
1996년 ‘산다는 것은’
음반 이후 
어느 날 그 무대에서 사라졌다.

무대에서 사라진
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98년 IMF를 겪으며
사업은 부도가 났고
여러 사람들에게까지
큰 손해를 입혀  
결국 구치소에 수감됐다.
​ 
화려했던
톱스타의 자리에서
곤두박질친 그는 미움,
분노, 증오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고통 중에 보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교도관 한 명이 왼쪽
오른쪽의 사람을 모으더니  
찬송을 부르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가 미션스쿨에서
즐겨 부르던 찬송
'234장
나의 사랑하던 책'이었다. 

자연스레
그 모임에 동참하게 되었다. 
어릴 적 미션 스쿨을 다니며
불렀던 찬송이
머리에서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절대 세상의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

모임을 갖던 중 그는
주체할 수 없는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두 가지 서원을 했다.

한 가지는 나머지 인생을
주님의 종으로 살겠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절대로 세상 노래는 부르지 않고 
주님만 찬양하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약속이었다.

수감을 마친 후
그는 7년간 신학을 공부했고, 
2009년 10월 한국 독립교단 및
선교단체 협의회
(한독선연 총회장 김상복 목사)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
(한국 백석대학 신학과 졸업)가 되었다.

현재 김종찬 목사는 교도소,
보호감호소, 군부대, 탈북자,
병원, 장애인 치매노인시설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찬양을
부르며 지내고 있으며,

아시아, 남미, 미주 등
전 세계를 돌며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직접 6곡을
쓰고 가사도 쓴,
4집 찬양음반
‘생명의 빛’ 등도 발매했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가장의 뜻을 지지해줬다. 
 일산에서 찬양집회를 통하여
영광을 돌리고 계시며
일산에 개척하여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사역하고 계십니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사업 실패하고
구치소에 있을 때
교도관이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 순간 성령님의 역사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성경을 통독하고
이제 저는
목사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특별한 은혜로 개입하시고
날마다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김종찬 목사님은
가장 힘들때 만났던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시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갈려는
순종의 고백이
우리들에게도 가득해
지기를 축복합니다.
Posted by 주님닮기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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